삿 9:1-6 인간의 연합

사람이 사람을 의지하느냐 하나님을 의지하느냐에 대한 판가름은 의지했던 대상이 사라졌을 때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대상으로 섬겼던 사람이라면 그 믿음에는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설사 삶 도중에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서 흔들림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 믿음의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의지하는 믿음이라면, 그 사람이 존재할 때는 얼마든지 믿음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기에 그 사람이 지시하고 가르치는 것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르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신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결국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들통이 나기 마련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던 것이 바로 이러한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사람이 하나님만 신뢰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비록 자기를 다스려 달라고 부탁하는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않을 것이고 나의 손자도 너희를 다스리지 않을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서 자신은 결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가 아님을 말했지만, 그 말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기드온의 의도를 깨닫거나 기드온을 다스리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미디안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원한 기드온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너희를 다스린다'는 그 말로 인해서 기드온에게 더 신뢰가 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런 기드온이라면 우리가 믿을 수 있다'는 신뢰를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기드온의 말에서 겸손을 발견할 수 있고, 저렇게 겸손하고 믿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우리가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기드온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을 보지말고 하나님을 보라고 말했지만 이스라엘은 그 말에서까지 기드온을 더욱 신뢰해 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기드온이 죽고 나자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겼던 것이고, 본문에서 기드온의 아들 중 하나인 아비멜렉은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 자기 형제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이 둔 여러 첩 가운데 세겜의 여인에게서 난 아들입니다. 이 아비멜렉이 기드온이 죽고 나자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는 경쟁자가 없어야 했습니다. 당시 아비멜렉의 이복 형제들이 70명이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기드온의 아들인 이상 모두가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사라지는 것이 곧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먼저 자신의 동조자를 만들기 위해서 세겜에 사는 자신의 외조부와 그 가족을 찾아가서 "너희는 세겜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의 골육 지친임을 생각하라"(2절)고 말합니다.

즉 아비멜렉은 세겜사람인 자기 외가를 찾아가서 외가로 하여금 세겜 사람을 설득해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기드온의 아들이 70명인데 70명이 다스리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들과 골육지친임을 내세워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아비멜렉의 말대로 그들은 세겜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게 되고 세겜 사람들의 마음은 아비멜렉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리고 바알브릿 묘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서 아비멜렉에게 줍니다. 바알브릿 묘란 이스라엘이 섬기게 된 바알브릿이란 우상의 신당을 말합니다. 그 신당에 바친 제물 가운데 은 칠십 개를 꺼내서 아비멜렉에게 준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유(돈 받고 일해주는 건달을 의미함)를 사서 오브라에 있는 자기 형제 70명을 죽여 버립니다. 이 일 후에 세겜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보면서 우린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가를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을 세우기 위한 사건들이 끝없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칠십 명이 다스리는 것보다, 한 명이 다스리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고 말하는 아비멜렉이나, 그 말에 동조해서 아비멜렉에게 은을 준 세겜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보지 않고 있는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느 한편이라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보고 살았다면, 즉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봤다면 자기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세겜 사람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봤다면 아비멜렉의 의도에 동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왕이 되어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알았던 기드온은 그 말에 동조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책망을 했지 않습니까? 결국 아비멜렉에 의해서 70명이 죽은 것은 아비멜렉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다스림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속사람의 중심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어느 한 사람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만 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비멜렉은 어미의 집이라는 혈통을 이용해서 사람을 자기편으로 삼으려고 했고, 세겜 사람 역시 혈통과 친족이라는 이유로 아비멜렉을 도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만 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칠십 인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라는 말을 한 것은 다른 형제들도 모두가 왕이 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 말입니다. 즉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는 욕심이 있을 때 자연히 자신과 똑같이 기드온의 아들이라는 위치에 있는 다른 형제들을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왕이 되고 싶어하는 것처럼 다른 형제들도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을 경쟁자로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볼 때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자기 마음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비멜렉이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다른 형제들이 왕이 되려고 한다는 오해를 가졌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오해라는 것도 자기 욕심과 자기 판단에서 나온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두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음을 알고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속 사람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다스림을 받고 있는 사람이 곧 신자인 것입니다. 세상을 볼 때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기준이 되어서 보게 되고, 형제를 볼 때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라는 시각으로 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는 인간에 대한 쓸데없는 오해도, 또는 누군가를 자신의 경쟁자로 삼는 행위도, 그리고 사람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욕망도,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에 동조하는 것도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신자로 인해서 증거될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자기 백성을 남기신 것이 아닙니까? 그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증인다운 행동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습니다. 증인의 모습은 주님께서 만들어내십니다. 행동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속 사람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다스림을 받고 있느냐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다스림 받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증거 되어지는 쪽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동조할 분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에게만 동조하고 그 어떤 인간에게도 동조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파한다면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는 그 말에 동조하십시오. 그 말에 함께 하십시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만약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의롭게 보고 사람에게 동조를 해버린다면 결국 본문의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을 옳게 본다면 내가 옳게 보는 사람을 누군가가 방해하고 나설 때 결국 내가 동조하는 사람 편에 서서 같이 공격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사라지고 오직 인간에 의해서 인간을 중심으로 일어난 본문의 사건을 깊이 생각해 보시고 혹시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난 채 모든 일을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에 의해서 해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살아가지는 않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굳게 세울 것은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신 그 은혜와 사랑이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만을 보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그에게 경쟁자라는 말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경쟁자란 욕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계에서 쓰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안에 함께 모이는 관계라면 그 안에서 경쟁자란 말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린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자고 모이고 있는 것이지 내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모인다면 여러분이 곧 신자이며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