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9:7-21 존재의 이유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고 계획일 수 있지만,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고 계획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무엇이 되어지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잊어버린다면 결국 자신의 마음과 계획대로 되어지지 않는 결과에 대해서 실망하고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되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실망을 하게 되는 것은, 되어지고자 하는 것 자체가 오직 자신의 즐거움과 유익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면, 왜 의사가 되려고 하는지 자신의 마음가짐부터 살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사람을 살리는 의술을 배워서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마음으로 의사가 되려고 했다면 그 사람은 의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회 봉사, 즉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사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의사가 되지 못했다고 해도 현재 되어진 자신의 상황과 환경에서 이웃에게 봉사하고 유익이 되는 일을 찾아갈 것입니다. 의사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의사가 못된다고 해서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사가 되려는 것이 자신의 출세와 성공에 염두를 둔 계획이고 목적이라면 그는 의사가 되지 못했을 때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사가 되려는 자기 계획이 성사되지 못함으로서 자신의 인생은 출세와 성공에서 실패했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대해서 회의감을 가지게 하고 삶의 힘을 잃어버리게 하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 되고자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되고자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 되고자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명확하다면 무엇이 되든 그에게는 실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되어진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 되어진 모습에서 되고자 했던 이유와 목적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즉 무엇이 되어지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대로 되어지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되고자 하는 방향과는 전혀 달리 되어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 이유는 인생의 주관자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계획과 달리 하나님의 계획이 존재하고 있고 하나님은 그 의지를 결코 굽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차근차근 이루어지는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안기실 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 이유가 하나님이 안기신 일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라는 것에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그 뜻에 순종하고 있다면 내가 되고자 하는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어졌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낙심과 원망으로 남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현재의 모습으로 되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고 되고 싶은 내 욕망에서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과 되어지는 결과는 서로 전혀 다른 세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세계를 사는 사람은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 잡혀 살아가기 때문에 되어지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지만, 되어지는 결과가 자신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아는 사람은 자기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통치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되어지는 것에 대해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신자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현재 되어진 자신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신자라면 그 삶은 참으로 행복하다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의 경우 되고자 하는 자기 욕망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되고자 하는 자기 욕망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오늘 본문이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서 세겜 사람을 충동하여 함께 힘을 합해서 아비멜렉의 이복 형제 70명을 살해한 사건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있습니다. 9:5절에 보면 생존자는 여룹바알의 말째 아들 요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 요담이 세겜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취한 행동에 대한 내용입니다. 요담은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리심산으로 가서 세겜 사람들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무들이 자기들의 왕을 구하기 위해서 감람나무에게 나아가 '우리들의 왕이 되라'고 합니다. 그러자 감람나무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9절)고 대답합니다. 즉 자신의 할 일은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기름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왕됨을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나무들은 다시 무화과나무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 역시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11절)는 말로써 그들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무화과나무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족하기 때문에 왕됨을 거절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나무들은 포도나무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포도나무 역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13절)는 말로써 그들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포도나무 역시 자신이 하고 있는 역할에 순종할 뿐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나무들로부터 왕됨을 거절당하자 나무들은 가시나무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같은 요구를 하자 가시나무는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15절)고 대답합니다. 왕됨을 허락한 것입니다. 이것이 요담이 세겜 사람을 향해서 외친 우화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요담의 이야기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종류는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 종류는 가시나무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확실하게 구분되는 두 종류의 사람들중 과연 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이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고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감람 무화과 포도나무는 왕됨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이유는 왕되는 것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하며 살아가는 삶에 더 감사하고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입장에서 볼 때 분명 성공과 출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왕되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것이 성공이며 출세이지 포도나무가 포도열매를 맺고 감람나무가 기름을 내고 무화과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는 것은 사실 하찮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 나무는 그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주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왕이라는 권력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있는 것이었습니다. 세 나무가 맺고 있는 열매가 가치 있고 귀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 나무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름과 열매를 귀한 것으로 본 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즉 세 나무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님과 사람에게 봉사하고 섬기라는 이유로 주어진 것임을 알았고 그들은 그러한 삶으로 만족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왕됨을 거절한 것입니다.

세 나무의 특징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왜 주어졌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라는 이유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나를 가치있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하라고 주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것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 요동할 수 없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 나무는 자신들에게서 맺어지는 것들, 즉 감람 기름, 무화과나무 열매, 포도나무 열매는 자신들 스스로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사고방식에 철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왕되기를 원하는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던 가시나무는 어떤 사고방식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실 가시나무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가시나무는 열매가 없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가시로서 오히려 이웃을 해롭게 하는 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가시나무는 스스로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는 말을 합니다. 가시나무의 그늘이 과연 뜨거운 햇빛을 넉넉히 가려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가시나무는 내 그늘에 피하라고 합니다. 결국 자신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결코 나무들이 피하는 그늘이 될 수 없음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자,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여긴 사람은 자신의 것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다스리려고 하게 됩니다. 내 밑으로 들어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게 의지하고 내게 피하면 내가 도와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시나무입니다.

결국 자신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 출처를 하나님이 아닌 자기로 본다면 그에게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전혀 없는 가시나무와 같은 자입니다. 그러면서도 내 그늘로 피하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보다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보호할 수 없기에 힘있는 자를 의지함으로서 그 그늘에서 자신의 안위를 보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피난처일 수 없습니다. 힘있는 사람의 그늘로 피한다는 것은 곧 힘있는 사람에게 예속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힘있는 사람의 보호를 받고 살아갈 때 그 사람의 요구와 지시에 대해서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결국 사람의 그늘로 피한다는 것은 사람의 다스림 아래 들어가는 것이고 또 자신의 힘으로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도 결국 '너는 내 밑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시나무 역시 그러한 속셈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15절 중반에 보면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내 그늘에서 벗어나면, 즉 내 권세 아래서 벗어나면 그에 합당한 보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요담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세 나무는 기드온과 그 아들들에 비유하고 가시나무는 아비멜렉에 비유를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왕됨을 거절했을 때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신이 미디안을 이긴 것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승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하고 의지할 그늘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힘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드온은 미디안을 이긴 승리의 출처가 하나님인 것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승리의 출처를 기드온으로 본 세겜 사람들은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사람을 봤기 때문에 의지하는 사람이 사라진 이상 또 다른 사람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서 옛날에 그들이 섬겼던 기드온의 집을 쳐서 그 아들들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습들입니다. 사람을 바라봤기 때문에 결국 또 다른 사람을 의지하기 위해서 예전에 자신들이 왕으로 삼으려고까지 했던 기드온의 집을 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져 있든 그 출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봉사하고 섬기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항상 고민하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되고자 하는 자기 세계가 아닌 되어진 것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통치의 세계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되고자 하는 마음까지 버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되고자 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되고자하는 것은 우리들의 계획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삶의 목적은 되어진 것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봉사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주어진 것의 출처를 하나님에게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맺어진 것이 없는 가시나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는 내 그늘에 거하라고 큰소리치며 살아갈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재미로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라고 스스로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신자로 인정하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사고방식을 찾을 것입니다. 그것이 곧 본문의 세 나무가 보여주는 정신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의 출처를 하나님에게 두고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봉사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것에 삶의 목적을 두는 그 정신이야말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사는 신자, 즉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신자에게는 주어진 것에 대한 불평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어진 것에 대한 불평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 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세 나무는 자신을 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들에게 기름이 주어지고 포도 무화과 열매가 주어진 그 이유만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만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 자신들이 해야할 바를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 역시 세상에서 살아가실 때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보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되고자하는 분이 아니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삶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였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스스로 그 자리를 피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존재 이유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고, 우리를 살리시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믿는 신자라면 왜 하나님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시고 지금 내게 있는 것을 주셨는지 그 이유를 알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본문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무엇에 삶의 목적을 두어야 하는지 그 방향이 확실해 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날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존재 이유입니다. 이웃이 없었다면 우리 역시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웃 때문에 존재하고 있음을 잊지 않을 때 그 삶은 이웃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이기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삶으로 되어질 것입니다.

세 나무는 나에게 기름이 있으니까, 무화과 열매가 있으니까, 포도 열매가 있으니까 나에게로 와서 내 그늘에 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출처가 자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족하고 감사했던 그 마음을 깊이 이해하도록 합시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의 존재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왕되고 다스리는 자 되는 것이 존재 이유가 아니라 섬기고 봉사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존재 이유인 것입니다. 내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시고 이웃을 해롭게 하고 상처 입히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며 살아가는 것을 삶의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