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9:22-23 깨어진 인간관계

사람을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의 마음은 어느 한 사람에게만 고정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따라 움직이는 마음이라면 결국 또 다른 사람에게로 얼마든지 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그 사람의 편에 서서 그를 지지하는 행동을 했을 때 사람을 향한 마음이 절대 불변이라는 보장이 없는 이상 언제든지 또 다른 사람에게로 마음이 떠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 상태는 여러분이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아오면서 많이 경험한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남녀간의 좋아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의 문제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로 모였을 때 여러분 주위에는 수십 명의 교우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모든 분을 다 마음에 들어하십니까? 아마 그런 마음으로 모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모인 분 중에는 어쩌면 여러분이 마주치기 싫어하는 분이 있을 수 있고, 또 어쩌면 교회에 나오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되는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런 마음이 전혀 없기를 바라지만, 인간의 마음이 우리들의 눈에 확인되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그러한 의심도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가?'라는 의심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과연 누군가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로 모이지는 않는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교회란 인간의 마음, 내 마음을 가지고 모이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모이는 곳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면서 이것만은 놓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내 마음을 가지고 교회로 모인다면, 내 마음에 의해서 누군가가 상처를 입게 되고 결국 그리스도의 몸이 훼방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은 결국 내 편이고 나를 항상 옳은 편에 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누군가를 의심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정답게 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그 순간부터 우리의 마음은 부지런히 그 사람에 대해서 의심을 하게 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닌지' '저 사람이 나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우리의 생각과 의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진행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정답게 대하지 않았을 때, 혹시 그 사람에게 무슨 나쁜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을 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단지 '왜 나를 정답게 대하지 않는가?'에만 골몰할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과 마음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오직 내 입장과 내 느낌과 내 생각만 가지고 모든 판단과 결론을 내리려고 해버립니다. 이것이 결국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마음이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마음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람을 따라가는 마음이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람은 사람에 대해서 언제든지 실망할 수 있고 또 사람이란 변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인간관계는 오직 사람을 따라서 형성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 내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 내 생각을 편들어 주는 사람, 나와 인맥이 있는 사람, 이렇게 사람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그 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연합을 하다가도 나중에 사소한 일로 인해서 굳건하게 보이던 관계가 깨어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따라서 움직이는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한 사람이 평생토록 내 마음에 들 수는 없습니다. 오늘 내 마음에 들었다가도 내일이면 또 다시 어떤 일로 인해서 마음 밖으로 멀어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우리들의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모르고 산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우리는 그러한 내 마음 자체가 문제가 있고 죄악된 것임을 생각하기보다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속에 품고 말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인데 용서가 있겠습니까? 양보가 있고 사랑이 있겠습니까? 결국 다툼과 시기로 끝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인간들의 관계입니다. 그러고 우리 역시 이러한 인간 관계를 벗어버리지 못한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교회라는 것을 통해서 배울 수가 있습니다. 교회란 수요일 또는 주일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흩어져 버리면 끝나는 그러한 관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참으로 특이한 관계로 모여지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우리 자신들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과연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대신 피흘리고 죽으신 그분인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입에서는 십자가에 피흘리신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고 해도 삶에서는 십자가에 피흘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 채 나를 드러내고 나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라는 관계에서부터 보여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말씀을 드린 것은 인간관계의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그 사람 편을 들고, 나와 선후배 관계, 인척 관계, 이런 것을 이유로 들어서 함께 할 때 그러한 관계는 결국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임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으로 엮어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누가 나를 좋아하는가?'를 살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살핌은 결국 내 속에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자를 구별하고 갈라놓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고, 그것으로 이미 그 사람에게 있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다툼과 분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인간관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간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인가를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마치 우리들이 형성하는 인간관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버려야 할 인간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상황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해방한 기드온이 살아있을 때는 이스라엘이 기드온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기드온은 큰 영웅이었던 것이고, 또 기드온을 따라갈 만한 영웅이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마음은 한결같이 기드온을 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드온이 죽고 나서 발생합니다. 기드온이 죽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중심적인 인물이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았다면 기드온이 살았던 죽건 그것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기드온이 죽었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마음에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기드온이었기에 기드온이 죽었다는 것은 이제 이스라엘의 마음을 다스리고 이끌어갈 존재가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이제 무엇을 중심으로 행동하겠습니까? 내 속에서 내 마음을 다스리는 존재가 사라졌다면 결국 인간은 자기 마음에 옳은 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즉 내 마음에 드는 쪽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인간은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당연히 내 마음에 드는 사람 편을 들게 됩니다.

물론 사람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내 마음에 든다'는 것이 무엇으로 결론 내려지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인척관계입니다.

기드온이 죽자 기드온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왕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 왕이 되려고 하다 보니 걸림돌이 보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복형제들입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왕이 되려는 야망을 가지고 보니 다른 형제들에 대한 의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은 자기 생각과 입장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하게 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보니 다른 형제들이 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아버지가 회사를 운영하는데 아들이 셋이 있습니다. 그중 두 아들은 회사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한 아들은 회사를 자신이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 그 아들의 눈에는 두 형제가 어떻게 비쳐지겠습니까? 회사에 욕심이 없는 두 아들이 길을 가다가 회사 직원을 만나게 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을 해도 '혹시 회사를 차지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아마 회사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면 두 형제가 회사의 누구를 만나든 그런 의심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욕심에서 의심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아비멜렉은 이복 형제 70명을 죽이게 됩니다. 그런데 죽이는 과정에서 자기 혼자 힘으로 일이 안될 것을 안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인 외가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외가를 선동해서 세겜 사람이 내 편을 들어줄 수 있도록 말을 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결국 세겜사람은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아비멜렉을 도와서 이복 형제를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말씀을 드린 대로 요행히 살아난 말째 아들 요담이 그리심산에서 세겜을 향해 저주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아비멜렉의 이복 형제들은 인간관계에 의해서 죽었다고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전에 말씀을 드린 대로 세겜 사람들의 속마음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결코 동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린다는 기드온의 그 마음과 하나 되어 있었다면 기드온이 죽은 후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었을 것이고, 왕이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서 인척을 끌어들이는 아비멜렉에 대해서, 그리고 그러한 아비멜렉에 동조하는 외가의 사람에 대해서 오히려 책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겜 사람들 전체가 이미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기드온을 대신할 인물이 필요했고 그 인물을 단지 외가가 자기 고향 사람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선택을 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보응을 하시는가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22-57절까지의 말씀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관계의 분열입니다. 서로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을 골라서 싸우는 관계가 되버린 것입니다.

22-23절에 보면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삼 년에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셨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앞으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악한 신이 그들과 함께 함으로 나타난 현상이고, 그렇다면 오늘날 인간관계 안에서도 오늘 본문과 같은 그러한 현상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악한 신이 함께 함으로 나타난 현상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 신은 교회와 상관없이 단지 세상 안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신은 얼마든지 우리가 모이는 모임 안에서도 활동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악한 신을 보내셨다는 것은, 악한 신의 활동을 허용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관계 안에서 악한 신의 활동으로 드러난 것이 과연 어떤 현상인가를 안다면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무엇이 악한 신이 활동함으로 나타난 결과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악한 신의 활동을 그리스도의 뜻이라고 우기지 않을 것이고, 악한 신과 그리스도를 분별함으로서 그리스도 쪽으로 나아가는 교회로 모여지지 않겠습니까?

본문의 내용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악한 신의 활동입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배반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을 했다는 것은, 뭔가 아비멜렉이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등을 돌린다는 것은 결국 처음부터 이들의 연합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19-20절에 보면 "만일 너희가 오늘날 여룹바알과 그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과 의로움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을 인하여 즐길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를 인하여 즐기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에게서도 불이 나와서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음에서 살아남은 요담이 세겜을 향해 외치는 말입니다. 그 내용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도운 것이 진실이며 의로움이라면 세겜과 아비멜렉은 진실과 의로움의 관계에서 서로 즐길 수 있지만, 만약 진실과 의로움으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서로에게서 불이 나와서 서로를 사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진실과 의로움의 관계에서 서로 즐긴다는 것은 용서하고 양보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그러한 관계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깨어지지 않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깨어질 수 없는 것은 진실과 의로움이 지키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과 의로움으로 연합되지 않은 관계는 결국 자기 이해를 기준으로 해서 행동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에 들 때는 함께 하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가차없이 등을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입장이 중요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고 용서하고 양보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요담의 말은 인간이 진실함과 의로움이 없이 단지 세상적인 조건과 이유로서 만나고 연합한 것이라면 그 관계는 결국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임을 외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이 세겜 사람들의 반역입니다. 25절에 보면 "세겜 사람들이 산들 꼭대기에 사람을 매복하여 아비멜렉을 엿보게 하고 무릇 그 길로 지나는 자를 다 겁탈하게 하니 혹이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고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세겜 사람들이 고의로 아비멜렉을 방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들 꼭대기란 세겜을 둘러싼 산들을 의미합니다. 세겜을 둘러싼 산들을 차지하고 그 길을 지나는 자들을 겁탈을 했다는 것은, 어쩌면 아비멜렉의 포악한 정치로 인해서 견디지 못하고 산으로 도망친 세력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들의 행동은 노골적으로 아비멜렉을 방해하고 도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에벳의 아들 가일이라는 사람이 세겜에 오게 되고, 세겜 사람들은 그를 의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신당에 들어가서 연회를 베풀고 먹고 마시면서 아비멜렉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가일이라는 사람은 "아비멜렉은 누구며 세겜은 누구기에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그 장관은 스불이 아니냐 차라리 세겜의 아비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우리가 어찌 아비멜렉을 섬기리요"(28절)라는 말로서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섬기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선동을 합니다.

그러자 성읍의 장관인 스불이 그 말을 듣고 노해서 아비멜렉에게 사람을 보내어 가알과 그를 쫓은 사람들을 칠 것을 선동을 합니다. 결국 가알과 아비멜렉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가알은 싸움에서 실패하고 쫓겨가게 됩니다. 그리고 세겜 망대에 자기를 반대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말을 들은 아비멜렉은 그곳에 불을 질러서 죽이게 합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데베스에 있는 망대를 공격하다가 망대 위에서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서 죽게 됩니다. 이것이 22절부터 마지막까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것이 아비멜렉과 세겜에 내려진 하나님의 보응입니다. 그리고 악한 신이 활동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우린 이 말씀을 보면서 결국 악한 신이 활동한 결과가 인간관계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자기 생각만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내편으로 만들어서 함께 공격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그 사람 역시 내 마음에 들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나중에 또 다시 그 사람을 공격하기 위해서 또 다른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린 세상에서 이러한 인간의 싸움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싸움이 보여질 때마다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심판이며 악한 신의 활동의 모습임을 생각하십시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린 교회로 모입니다. 교회 역시 인간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세상과는 다른 관계로 형성된 모임입니다. 세상의 인간 관계는 인맥을 따지고 출신을 따지지만, 교회는 그런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중심으로 모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를 아는 마음으로만 모입니다. 이것이 진실과 의로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에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 나와 연고가 있는 사람, 나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 등등으로 따지며 끼리끼리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관계로 형성된다면 결국 그 속에서 배척받고 상처 입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라고 해서 악한 신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항상 악한 신의 활동 아래 살아갑니다. 그러나 악한 신의 활동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모이는 교회는 한 성령 안에서 모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신의 활동에서도 깨어지지 않는 교회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겜과 아비멜렉이 어떤 관계로 맺어졌는지,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악한 신의 활동 아래 어떤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였다면,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에만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다. 내 허물을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모일 때, 우리는 인간에 대한 섭섭함이나 미움을 드러내기보다는 그것도 역시 내 허물이며 악함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악한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것을 드러내게 합니다. 자기를 양보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사람을 바라보게 하고 맺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깨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싸움과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내 마음을 따라서 생각하게 되면 결국 우리는 다툼과 구별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신의 활동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한 신의 활동을 허용하심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확인하십니다.

교회에서 수시로 드러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지만, 우리 마음은 악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 생각합시다. 누군가에게 섭섭함이 있을 때,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래서 그를 욕하고 싶을 때, 이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마음인지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는 모습인지 생각해봅시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성령께서 행할 바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