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0:3-16 나를 버리고

하나님을 믿던 사람이 도중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기를 즐겨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서 자기 만족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며 살아가는 삶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 회의감을 가질 수가 있고 결국 다른 신을 믿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앙하며 살아가는 삶에서 과연 만족을 얻고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신앙하며 살아가는 삶이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단지 여러분이 불교를 찾지 않고 다른 종교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며 사는 삶에 만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시면서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 자체에 마음을 뺏기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이 또 다시 우상을 섬겼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6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라고 말씀합니다. 우린 이 말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던 것을 완전히 없애 버리고, 다시 말해서 제사하던 것이나 할례 행하던 것 등 모든 의식을 다 철폐하고 이방 신을 자기들의 신으로 섬겼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그러한 의미로 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수없이 반복적으로 우상을 섬기는 실패의 역사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를 하다가 우상을 섬기고 다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제사 등 하나님을 섬기는 의식적인 행위는 지속이 되면서도 이방 신을 마음에 두고 그를 의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삶에 매료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다른 종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만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처럼 한 국가 안에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여러 종교가 존재하는 것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내용을 우리처럼 기독교를 믿다가 불교를 믿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겼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스라엘이 지금 정착한 땅은 원래 이스라엘의 땅이 아니라 이방인이 거주하던 땅을 하나님에 의해서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멸절하라는 명령을 하셨고, 이스라엘은 그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고 자기들을 위해서 가나안 족속을 남겨 놓았습니다.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는 것이 앞으로 자신들의 삶에 있어서 도움이 되겠다는 계산이었던 것입니다.

국가의 경제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분명 이스라엘보다는 가나안 족속이 한 수위에 있습니다. 수십 년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닌 이스라엘에 비해서 오랫동안 한 곳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고 살아온 족속이 모든 면에서 월등하게 발전했지 않겠습니까? 결국 가나안 족속이 살아가는 삶을 목격한 이스라엘은 그들의 삶 자체에 욕심이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좇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말씀에 대한 순종보다는 자신들의 삶이 부강하고 윤택하게 되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둬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봤을 때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신을 섬기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돈을 버는 것에 대해서 어느 쪽에 더 삶의 가치를 두고 있습니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돈 버는 것에 더 마음을 두고 있고 가치를 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빠지지 않고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과연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결국 그 사람에게는 돈이 의지할 힘으로 존재합니다. 즉 돈이 우상인 셈입니다. 돈을 의지하면서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본문의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어느 누가 완벽하게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실 그러한 말을 하기가 너무 부끄러운 우리들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 역시 이스라엘처럼 겉의 행동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의 마음에는 다른 것이 가치 있고 귀한 것으로 자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어떤 조치를 내리겠습니까?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이방 신을 섬긴 이스라엘을 이방 나라에 팔아 버립니다. 7-9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그 해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니 요단 저편 길르앗 아모리 사람의 땅에 거한 이스라엘 자손이 십팔 년 동안 학대를 당하였고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을 치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우린 성경에서 이러한 내용의 말씀을 수없이 목격할 수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징벌하시고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볼 때마다 우리의 머리에서는 '하나님께 범죄하면 하나님이 징벌하신다'는 생각이 스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자식이 잘못했을 때 매를 때리거나 야단을 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야단을 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도 우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징벌을 하시겠습니까?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이 우리가 잘못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신자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징계하시는 것입니까? 뭔가 하나님 편에서 계획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징벌하시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면 멸망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징벌을 했다고 결론짓기는 사실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상을 섬긴 자들을 멸망하지 않고 돌이키게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이스라엘은 끝까지 멸망해서는 안될 민족들입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참으셔야 하고 끝까지 돌이키셔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이 결국 멸망을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이 단순히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 차원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랑이라면 하나님의 사랑도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죄에 대해서는 참지를 못했다는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은 이스라엘을 위한 사랑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과 의지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 또한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지난 수요일에 설교를 하면서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탄이 땅으로 쫓겨난 상태에서 하나님은 사탄에 대한 완벽한 심판을 계획하시고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이 선택된 것은 결국 그들을 여호와의 군대로 삼아서 사탄의 세력과 싸우시기 위한 계획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군대로서 군사다운 모습은 여호와 앞에서 마음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광야에서 40년을 고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이 고생한 것은 결코 애매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생 자체도 하나님에게 쓰여지고 있는 과정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군사다운 모습은 세상이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부러워하지 않고 그들처럼 살고 싶은 마음에서 떠난 것으로 증거 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자리할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왔고 은혜로 가나안 땅에 들어왔음을 잊지 않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을 멸절하라는 것도, 이스라엘이 오직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만을 귀한 것으로 여기고 가나안의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내려진 명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마음에 이미 가나안 족속이 살아가는 삶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자리했다는 증거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우상을 섬겼다는 것은 가나안 족속의 삶에 대해서 부러움을 가진 결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서 말한 대로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어떤 차원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이스라엘 개인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차원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면 징계는 사탄과 전쟁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사탄과의 전쟁에서 군사로 부름 받은 사람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사탄과 싸우는 것은 가나안이라고 하는 이방 족속의 삶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삶은 오직 자신들의 번영과 성공을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신을 섬기는 것도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거기에 싸우는 것은 주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섬긴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군사로서의 삶을 버리고 사탄의 세력에 합류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징계란 단지 벌준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징계를 통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않고 이방신을 불렀던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 여호와를 부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 하였나이다"고 외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자신들의 범죄를 알았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동안 이방나라들로부터 그들을 구원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신을 섬긴 이스라엘에 대해서 다시는 구원치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11-13절). 이 말씀을 보면 앞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씀으로 들리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두말하는 분이십니까? 그러므로 다시는 구원치 않으시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말썽만 피우는 자식에게 부모가 '너같은 놈은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다 나가라'고 했을 때 그것이 실제 부모의 마음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부모의 실망과 진노의 표현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14절에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너희 환난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는 말씀 역시 실제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이 택한 이방 신에게 가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부르짖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방 신은 이스라엘을 환난에서 구원할 능력이 없는 신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구원할 능력도 없는 신을 찾아서 부르짖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나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단지 우상을 섬겼다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게 된 그들의 생각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지금껏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으면서도 이방 신이 자신들을 책임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하고 이방 신을 부른 그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셨고 인도하셨음을 잊어버리고 마치 다른 힘이 자신들을 인도한 것으로 여겨버린 그 자체가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어리석음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며 우리의 구원 역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잊어버린 것 자체가 어리석음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돈과 권력이 우리의 삶을 책임지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돈만 있으면 인생을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합니다. 돈이 내 손에 주어지고, 세상의 것을 누리게 된 것이 하나님 때문임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돈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에서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다른 힘되는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은 주위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받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아비멜렉 후에 돌라라는 사사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그리고 돌라가 사사로 지내는 동안 이스라엘은 별 문제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돌라 후에 야일이 사사가 되는데, 그에게 아들 삼십이 있고 그들이 어린 나귀 삼십을 탔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읍 삼십을 두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어린 나귀를 탔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닌 것과 같습니다. 즉 부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야일이 사사가 되어서 이스라엘에게 보여준 것은 부귀 영화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이스라엘이 야일이 죽은 후에 이방 신을 섬겼다고 한 것을 보면, 부를 누린 야일을 본 이스라엘의 마음에 부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의 상징인 이방 신을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들을 때는 뭔가 마음에 각오를 가진 것 같았는데 밖에 나가서 세상 사람들이 누리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세상에 대한 욕심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신자이겠습니까? '지금껏 날 인도하시고 지켜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고 없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다'고 하면서 변함 없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군사로서 제대로 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방 신이 자신들을 지켜주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을 부르짖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짜오되 우리가 범죄 하였사오니 주의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날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15절) 이것이 이스라엘의 외침입니다. 이스라엘이 보기에 좋은 대로가 아니라 주의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하시라고 합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하시는 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시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살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하신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지혜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이러한 지혜로 바라볼 때, 그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변함 없이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주위의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든 상관없이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렇게 쓰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유월절 어린양이었습니다. 즉 어린양의 피의 은혜로 살아났고 그 은혜로 약속의 땅에 들어왔기에 누구든 피 앞에서는 차별이 없음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 정신이 약자보호로 나타나고 서로 나누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내것을 고집할 때 결국 약자가 고통을 당하고 나누는 것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사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가나안 족속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신을 섬긴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미 여호와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살아가는 증거인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무엇을 위해서 살아갑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게 하신 것은 단지 우리를 천당 보내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여호와의 군대로 쓰시겠다는 의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여호와를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짐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린다면 우리의 삶은 이 땅에 내 것을 모으기 위한 것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 대해서 하나님은 징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징계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세상에 신자로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