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2:1-5 우는 자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누구나 '어렵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말씀대로 사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가?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대답하면 아마도 '죄인된 인간이 어떻게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가?'라고 반발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죄인된 인간은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우리는 한가지 깊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한 뒤에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무능에 대한 깨달음으로 '말씀대로 살 수 없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단지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여러분의 생각이라면 과연 무엇을 근거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애를 쓰고 노력을 해본 후에 자신에 대한 포기에서 나오는 말입니까? 즉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삶을 통해서 배운 자의 고백이냐는 것입니다. 혹시 그것이 아니면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귀찮고 우리 자신에게 힘든 일이기 때문에 아예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싫어서 성경을 이용해서 '말씀대로 살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까?

예를 들어서 예수님의 새계명에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소위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은 '인간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자'는 실천을 강조하고,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망각하게 되는 것을 염려해서 하는 말이고, 사랑의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니까 우리는 사랑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즉 사랑하지 않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려고 할 필요가 아예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크나큰 부담으로 남을 수 있고, 또 사랑이 없는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말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말로써 모든 부담을 줄이고 오히려 사랑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자들의 노력을 성경을 모른 자들의 헛된 행동으로 여겨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하지만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을 마음 깊이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결론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아예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으로 이끌어 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회개하는 것도 없고 통회하는 자복도 없으면서 '인간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을 한다면 결국 그것은 성경을 내 편리함에 맞추어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이용해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것도 잘못이지만 성경을 자기 편함으로 이용하는 것도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부분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많이 강조한 것 중 하나가 '인간은 할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배우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 말이 할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안해도 된다는 방향으로 이해하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의 지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나오는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할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안해버리는 것은 성경을 자구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머리로만 생각하고 머리로만 계산하고 머리로만 결론을 내리고 머리로만 성경을 말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속에서 말씀이 이야기되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 귀찮거나 부담되는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진심으로 기쁘고 감사합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이 마음 든든함으로 다가오십니까? 사실 우리가 말씀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결코 귀찮은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전혀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천국 보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리게 하신 은혜만 생각하면 되기 때문에, 그것 만으로라면 얼마든지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사랑을 하려고 안해버린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사랑하며 살고자 할 때 하나님은 부담으로 다가오게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고자 하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을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의 사자는 길갈에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이 말은 마치 길갈에 있던 사람이 보김으로 와서 말을 한다는 뜻으로 이해되게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호와의 사자를 길갈에 있던 어떤 사람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란 '천사'를 의미합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모두가 천사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대리한 천사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왔다고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을 길갈에 있던 여호와의 사자가 보김으로 와서 이스라엘에게 말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과거에 길갈에서도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 적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5:13-15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치러 갈 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군대 장관이 여리고를 향해 서서 여호수아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하지 않고 칼을 빼어들고 여호수아를 향해 선 것은,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싸우시는 분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스라엘과 싸우시는 분입니까? 그것은 길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열 두 돌을 가지고 나와 기념비를 세운 곳입니다. 그리고 그 길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 의식을 행했습니다. 할례란 육신은 죽고 새롭게 태어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할례 의식을 요단강을 건너고 나서 열 두 돌을 세운 길갈에서 행하게 한 것은 요단강을 건넌 것과 할례가 서로 연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단강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건넜습니다. 즉 언약궤의 피의 은혜가 그들을 가나안땅에 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열 두 돌을 세운 것은 바로 그 증거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길갈에서 할례를 행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이니까 육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고 살아가겠다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궤의 피의 의미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 5:15절에 보면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여호수아가 할 일은 오직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종을 의미합니다. 종이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여호와의 대리자로 왔습니다. 즉 여호와의 군대장관의 말은 여호와의 말이고, 그의 뜻은 곧 여호와의 뜻입니다. 여호와가 나타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난 그곳은 거룩한 곳이고, 그 거룩한 곳에서 여호수아가 할 일은 오직 신을 벗는 것입니다. 즉 순종하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이 우리의 군대장관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종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길갈입니다.

이 길갈에 나타났던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보김에 나타났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할례를 행할 수 없던 이스라엘이 길갈에 이르러서 할례를 행할 수 있게 된 것이 누구의 은혜 때문이냐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수 없던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서 길갈에서 유월절을 지낼 수 있게 된 것이 누구의 은혜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김에서 이스라엘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길갈에서의 이스라엘과 보김에서의 이스라엘은 다릅니다. 길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두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고 열 두 돌을 세우고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킴으로 인해서 이렇게 되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감사하고 또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는 보김에 나타나서 먼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인도해 오신 것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길갈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어김없이 그대로 시행된 증거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김에서의 이스라엘은 어떤 모습입니까? 길갈에서의 은혜는 다 잊어버린 상태입니다. 가나안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고 그들의 단을 헐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습니다. 이것이 보김에서의 이스라엘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지 않은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거민들이 자신들에게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이스라엘보다 문화나 문명이 더 발달한 민족이 가나안이기 때문에 그들을 이용하면 이스라엘에게 많은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골짜기의 철병거를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철병거가 아까웠던 것입니다. 다른 지파들 역시 가나안 거민을 사역을 시키면 자신들에게 유리하고 득이 많기 때문에 쫓아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이 어떤 땅인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들어올 수 있게 된 하나님의 은혜, 가나안에서 살아갈 삶의 목표, 이런 모든 것을 망각한 채 자신의 앞으로의 삶을 생각했기 때문에 가나안 거민을 남겨 두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거민을 남겨 두면 그들이 자신들에게 득이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의 말은 다릅니다.

3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지 아니하면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가시가 되고 그들의 신이 올무가 될 것이라는 말씀은 새롭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민수기 33:55절에서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 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라고 말씀을 하셨고, 또 여호수아 23:13절에서도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고 경고를 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경고의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지 않은 것은 말씀은 잊어버리고 보이는 이득을 쫓아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을 남겨 두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했겠습니까? 말씀을 생각하면서 갈등하면서 가나안 거민을 남겨 두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고 말씀을 합니다. 즉 이미 경고하신 대로 되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럴 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이 얼마나 부담이 되고 귀찮겠습니까? 말씀을 잊어버렸을 때는 말씀에 대한 부담이 없습니다. 앞으로 가나안 거민으로 인해서 주어질 이득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것이 말씀대로 살아갈 마음이 없는 이스라엘에게는 참으로 귀찮고 부담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이 이스라엘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따라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면 말씀에 대해 부담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교회만 나와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간섭자로 파고들 때 그때는 말씀이 부담되고 싫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고,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지기 때문에 말씀과 멀어지고 싶은 마음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4-5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의 말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의 반응이었습니다.

보김이란 '우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사자의 말에 대해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울음이 어떤 의미의 울음이겠습니까? 얼른 생각하면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왜 울었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회개의 울음'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이스라엘의 울음이 다른 의미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스라엘의 울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남겨둔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지 않으실 것이고, 그들이 결국 이스라엘에게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될 것이라는 여호와의 사자의 말에 대한 반응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스라엘은 앞으로 잘살고 싶은 마음에서 가나안 거민을 남겨 두었는데, 결국 그러한 그들의 소망을 누가 방해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이스라엘의 소망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말씀을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달갑지가 않고 오히려 귀찮게 느껴질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울음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속상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린 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척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간섭하고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간섭하고 계신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물론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간섭을 실제 삶에서 만나시는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간섭을 만나실 때 말씀이 있다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부담이 되고 귀찮으며 하나님의 간섭이라는 것이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싫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편합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같이 흘러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항상 세상과 부딪힙니다. 자연히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여러분에게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말씀을 따라가려고 한다면 말씀이라는 것이 얼마나 나를 힘들게 하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말씀을 따라가려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를 다스리고 하나님이 간섭한다는 말에 대해서도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18-19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베드로가 성령에게 붙들리게 되면 베드로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끌려간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게 붙들림으로 인해서 주님의 소원이 곧 베드로의 소원이 되어서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섭을 받는 자의 결과입니다.

말씀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소원대로 살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속상하지 않습니까? 울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의 소원은 세상에서 생존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소원은 생명에 있습니다. 우리의 원함과 전혀 반대된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세상이 내 삶에 이용가치가 있다고 여기며 살아간다면 세상을 버리기가 아까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버리지 못한 세상이 오히려 우리에게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우리의 마음도 몰라주는 하나님이라고 불평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간섭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세상을 버리도록 하실 것입니다. 세상을 아까워하지 않는 신자되는 쪽으로 여러분을 가르치고 인도해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까워하는 세상 것이 오히려 우리들에게 올무와 가시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하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왜 인도하시는가를 잊어버린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해서 가나안에 들여보내시듯,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에서 나오게 하여 생명의 나라에 들여보내시기 위해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미련을 둔다면 하나님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속상함만 있게 될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왜 있는가를 생각하시고 오직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전부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