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1:1-11 입다

세상에는 여러 계층과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라는 것만 생각한다면 어떤 계층이나 종류라는 것이 성립이 안되지만, 세상은 사람을 단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라는 시각으로만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통용되는 말 중에는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사람도 사람 나름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의 상식과 이치에 의해서 사람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도 그러한 분류와 평가에 대해서 한몫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고 구분할 때는 나름대로 기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가지는 기준이 다르지만 어쨌든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타인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즉 사람치고 사람에 대해서 평가하지 않고 구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고 구분하는 것은 다양합니다. 윤리적인 사람은 윤리와 도덕을 기준으로 해서 사람을 평가할 것입니다. 그에게는 돈이 있고 권력이 있다는 것보다는 예의가 바르고 도덕이 있는 사람이라면 돈 있으되 윤리가 없고 권력이 있으되 양심이 없는 사람보다는 괜찮은 사람으로 여길 것입니다.

반면에 돈 있는 사람은 돈 없는 사람에 대해서 무능한 시각을 가질 것입니다. 결국 돈 있는 사람에게는 사람이 돈이 있고 없고에 의해서 평가되고 분류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이 있고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을 때, 자연히 그것이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의 정신으로 굳어지게 되고 그 정신에 의해서 사람을 평가하고 분류하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분류하고 평가할 때 이루어지는 것은 각자 자신에게 맞는 부류와 어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누군가가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집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어떤 집단에 어울리고자 할 때는 자신과 상대방을 비교하고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뭔가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불편한 관계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에 불편을 피하기 위해서 그 집단을 회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편안한 집단, 즉 자신에게 어울리는 집단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사람은 끼리끼리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집단에서 그 집단의 특성과 전혀 맞지 않는 누군가가 끼어 든다면 집단은 그를 배척을 하게 됩니다. 배척을 함으로서 자신들의 고유성을 지키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과 전혀 반대된 입장에 있는 타 집단에 대해서는 공격성과 배타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일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살아가시면서 그것을 많이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내게 어울리는 모임이 있는가 하면 어울리지 않는 모임이 있음을 아실 것입니다. 가령 돈 없는 사람이 돈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에 참여했을 때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배우지 못한 사람이 많이 배운 사람들만 모이는 모임에 갔을 때 그 모임이 편안하겠습니까? 역시 자신에게 어울리는 계층이 따로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사람을 계층과 계층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계층은 자연스럽게 돈과 권력, 신분 등등의 기준으로 인해서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으로 나뉘어 집니다. 그리고 이들 계층은 서로 공존하기가 힘들며 상위 계층은 하위 계층을 무시하게 되고, 하위 계층은 상위 계층에 대해서 공격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상위 계층이 하위 계층을 무시하는 것은 하위 계층의 사람이 그들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의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시하게 되어집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를 무시한다면 그는 분명 여러분 자신에게 도움을 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러한 계산대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고, 무시했던 사람이 힘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인간관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입다라고 하는 사람과 길르앗 장로들과의 이야기입니다. 1절에 보면 입다는 길르앗 사람이며 '큰 용사'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즉 힘이 있고 용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출신은 비천하였습니다. 그 어머니가 기생이었던 것입니다. 즉 입다의 아버지된 사람이 정식 부인이 아닌 기생과의 인연에서 입다를 낳게 된 것입니다.

물론 기생이 낳았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고 취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시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생이 낳았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편견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입다는 자신의 이복 형제 되는 사람들로 인해서 결국 다른 곳으로 도망을 치게 됩니다. 2-3절에 보면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입다의 이복 형제들은 입다를 기생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기업을 이을 자식으로 인정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결국 위협을 느낀 입다는 형제들을 피해서 돕이라는 땅에 거하게 되고, 평소 용사처럼 힘이 세었던 입다가 돕에 거한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잡류들, 즉 지금으로 말하면 불량배들이 모여들어서 입다를 추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입다는 형제들의 편견으로 인해서 쫓겨남을 당하게 되고 자기만의 집단을 형성을 하게 되는데 그 집단은 사회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잡류들의 집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가 그 잡류의 집단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4-6절에 보면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고 말합니다.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필요로 하게 된 것입니다.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힘입니다. 많이 배운 것이 전쟁에서 필요하지 않습니다. 돈 많은 것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합니다. 물론 현대의 전쟁에서는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무기를 사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무리 무기가 많아도 지도자 없이는 오합지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입다 외에는 전쟁을 책임질 지도자가 될만한 용사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큰 용사 입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평소 입다가 길르앗에서 힘있는 모습을 많이 보였던 것으로 알 수 있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길르앗 사람들로서는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 입다는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찾아오게 되고 자기들의 장관이 되어서 암몬 자손과 싸워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이들은 전쟁이 없었다면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장로라면 그 사회에서는 어른이며 존경받는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분명 그 장로들도 그들의 사회에서는 지도자 위치에 있었을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 인격 등 여러 가지가 많은 사람들 보다 뛰어났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행실이 좋지 않은 잡류들과 어울리는 입다에 대해서는 당연히 배척을 했을 것입니다. 분명 평소 같으면 함께 할 수 없고, 입다의 도움이 전혀 필요하지 않는 그런 관계의 사람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힘이 있어야 하는 전쟁의 위기가 닥치자 결국 입다의 힘을 원한 것입니다. 장로들이 평소에는 무시했던 입다를 찾아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고 부탁을 한다는 것은, 우리들을 위기에서 구출해 줄 수만 있다면 입다 같은 사람이라도 우리들의 지도자로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장로들의 이러한 부탁에 대해서 입다는 조롱을 합니다.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7절)는 말을 보면, 입다가 자신을 쫓아낸 길르앗에 대해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입다를 쫓아낸 것은 길르앗의 장로가 아니라 그의 이본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길르앗 장로들에게 너희가 나를 쫓아내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것은 길르앗의 장로들이 입다가 쫓겨가는 것을 묵인했거나 동조했기 때문일 수 있고, 또는 입다가 자신이 쫓겨난 것에 대해서 길르앗 전체에 대해서 감정을 품고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입다는 길르앗 장로들에게 대해서 선의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지를 않습니다. 서로가 조화될 수 없는 계층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서로 공존하게 되고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한쪽은 힘을 필요로 하고 한쪽은 필요로 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힘을 필요로 한 쪽은 힘의 도움을 구하는 댓가로 자기들의 장관으로 삼겠다는 것이고, 힘을 가진 자는 도와준 댓가로 그들의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보면서 우리의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본문과 똑같은 상황, 즉 전쟁 때문에 일어나는 상황은 아니라 할지라도 평소에 무시하고 업신여겼던 사람의 도움이 급하게 필요할 때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평소 나를 무시하던 사람이 찾아와서 자존심을 다 버리고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는 상황이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옳은 것입니까?

여러분 같으면 평소 여러분을 무시하던 사람이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할 때, 기쁜 마음으로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아마 어쩌면 입다처럼 '나같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조롱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평소 무시를 받았기 때문에 도와준 대신 그들의 위에서 그들을 지배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우린 오늘 본문을 보면서, 길르앗 장로들이나 입다가 전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장로들은 전쟁의 위기가 닥치자 힘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힘으로 삼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마 전쟁의 위기가 없는 평소에는 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했을지 몰라도 그 섬김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는 섬김이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삼자의 도움을 원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이었기 때문에, 힘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큰 용사인 입다의 도움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살아간다는 삶의 체험이 없었던 것입니다.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기에 급한 상황이 되자 하나님이 아닌 가장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입다의 힘을 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 그들의 믿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들도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위기 상황에서 무엇을 먼저 생각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살아간다고 믿고 있었는지 아닌지의 여부입니다. 아무일 없이 평안하게 살아가는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다고 여겨질 만큼 자신들에게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살아간다고 여겨지는 삶에서 '이 모두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살았는지 아니면 입에서는 하나님을 말했지만 정작 삶은 자신의 힘으로 산다고 생각했는지가 위기 상황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여러분이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고 그것을 고백하는 삶이었다면,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평소의 삶에서 잘되든 못되든 모든 삶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심을 마음 깊이 인식하는 믿음으로 살았다면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도우시든 순종하려는 모습이 증거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안하기 때문에, 내 힘으로도 살 수 있다고 여겨지고, 내가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삶이었다면, 위기 상황에서 보여지는 것은 자신을 위기에서 구출해줄 가장 확실한 힘을 찾아서 그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길르앗 장로들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소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무시했기 때문에 보여지는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현재 살아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임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진심으로 인정하시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위기 상항에서도 가장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막연하게 '하나님이 도우시겠지'가 아닙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믿음에서 자신의 모든 상황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길르앗 장로들이 이런 믿음이었다면 그들은 과거에도 하나님이 도우시고 이방인들을 자기들의 손에 붙이신 것처럼, 지금 역시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고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입다를 찾아가서 우리들의 장관으로 삼을 것이니까 도와달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머리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입다는 어떻습니까? 입다가 그들로부터 쫓겨남을 당하고 그로 인해서 감정이 좋지 않음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입다 역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산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9절에 보면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고 말합니다. 이 말을 볼 때 입다가 장로들과 다른 것은, 입다는 하나님이 암몬 자손을 자기 손에 붙이실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입다는 과거에 하나님이 이방인을 이스라엘 손에 붙이심으로 승리한 여러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을 믿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라는 말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이 붙이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었다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미디안을 붙이심으로서 기드온이 미디안에게 승리를 했을 때, 이스라엘은 기드온에게 자기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을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머리되기를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머리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이 붙이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붙이신 결과로 승리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나말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승리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입다가 '하나님이 암몬을 내게 붙이신다면 내가 과연 너희들의 머리가 되겠느냐?'라는 말을 한 것은, 결국 하나님이 붙이셔서 승리케 하신 것을 자기 공로로 돌려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길르앗 장로나 입다나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한쪽은 하나님이 아닌 입다의 힘을 구하는 것으로 다른 한쪽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힘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믿음 없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말하지만 위기 상황이 되면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도움이 되는 확실한 힘을 찾아서 세상을 헤매는 우리의 현실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도우심의 결과를 내것으로 삼으려는 우리들의 현실이 보이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많이 봅니다. 특히 교회가 목사를 초빙할 때 교회의 믿음 없음이 보여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교회가 목사를 초빙할 때, 목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가를 보는 경우가 참으로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목사니까 당연히 믿음의 부분은 인정해 버리고 지나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교회가 목사의 입을 통해서 복음을 듣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애초부터 없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목사에게 원하는 것은 대개가 교회 부흥입니다.

가령 목사가 돈만 밝힌다는 소문이 있다고 했을 때, 평소 자신의 교회와 상관이 없을 때는 '목사가 돈만 밝힌다'고 하면서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그 목사가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소문이 있고, 또 자신의 교회에서 목사를 초빙할 일이 생겼을 때 돈 밝힌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만 시킨다면 돈을 밝힌다는 것쯤은 문제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만난 관계는 거래 관계일 수밖에 없고 교회는 목사의 재주로 교회의 사람이 늘어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목사는 자신이 교회를 부흥시킴으로서 교회에 대해서 머리 노릇을 할 자격이 주어진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사가 아무리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말한들 그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도우신 결과를 자신의 공로로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가상으로 얘기한 것이지만 이러한 현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이라도 믿음이 있다면 서로 공존할 수 없고 조화될 수 없는 관계가 믿음을 빼버리고 힘이라는 관계에서 만났을 때 얼마든지 공존이 가능하고 조화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참된 공존과 조화는 믿음에서 되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애초부터 서로가 긍휼과 자비라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살았다면 쫓아낼 필요도 없고 쫓겨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무시할 이유도 없고, 나중에 찾아와서 고개 숙일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통해서 믿음이 빠진 인간관계가 어떤 식으로 되어질 수있는가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믿음이 없는 채 서로 만난다면 평소에는 서로 무시하고 배척하다가도 자신에게 필요하다 싶으면 찾아가서 무시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을 하게 되고, 무시를 받았던 사람은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조롱을 하는 모습들이 보여지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자란 자기 이득을 챙기는 계산에서 만나는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믿음이 빠진다면 신자의 관계, 즉 교회는 세상처럼 자신의 이득만 생각하는 관계로 되어지고 맙니다. 필요할 때는 다가가고, 필요가 없을 때는 무시하고 배척하는 관계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마음속에 복수라는 감정을 품고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한번 우리 자신들이 어떤 관계에서 만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은석교회가 과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관계에서 만나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깊이 살펴봅시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서 싫은 것을 좋은 척 다가가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그리고 상대가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상대를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든 내게 있는 것으로 도움을 주려는 마음으로 다가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증거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마음이 만나는 자리에는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될 뿐입니다. 이것이 참된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