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1:12-28 나 자신을 보자

사람의 눈에는 다른 사람의 실수는 잘 보이지만 자신의 실수는 잘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물론 자신의 행동이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같은 실수를 해도 자신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실수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타인이 자신과 같은 실수를 했을 때는 가차없이 비판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타인에게서 실수가 보이게 되면 그것을 지적하면서 고쳐주겠다고 설칩니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의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빼내야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본다고 하고 그것을 빼내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항상 필요한 것은 형제의 티를 발견하고 그것을 비판하기 이전에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발견하고 그 들보를 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 스스로 들보를 눈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형제의 티를 말한다면 오히려 잘못된 자는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그냥 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에게는 티가 있지만 나에게는 들보가 있음을 알고 형제의 티를 보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에게서는 형제에 대한 책망이 아닌 사랑이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들보를 발견하게 하는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들보가 있는지 우리의 들보를 발견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그 들보를 가지고 하나님에게 나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들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우리들의 들보가 어떤 것인가를 발견하고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지난주에 이어서 입다의 이야기입니다. 지난주의 내용은 입다가 기생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형제들에 의해서 내쫓김을 받았는데, 암몬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전쟁의 위기를 맞게 되자 장로들이 입다를 찾아와 우리들의 머리가 돼서 암몬 자손을 물리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내용에서 우리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아 버리는 인간관계를 볼 수가 있었고,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자들이 맺는 인간관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을 때의 인간 관계는 절대로 형제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 필요에 의해서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입니다. 필요할 때는 그가 누구라 해도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필요하기는커녕 함께 함으로서 귀찮고 피해되는 일이 있다고 생각되어질 때는 가차없이 멀리하고 내 곁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입다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맺어지는 관계였던 것입니다. 장로들은 입다로 인해서 암몬에게 패하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고, 입다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워줌으로서 그들의 머리가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입다는 이스라엘을 치려고 하는 암몬에게 사자를 보내서 그들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의도가 잘못된 것임을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에게 땅을 돌려달라고 하는 암몬에 대해서 돌려 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입다의 말이 옳게만 보여집니다. 즉 암몬 자손의 주장이 옳지 않음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제가 볼 때는 자기 들보를 보지 못하는 입다가 다른 사람의 티에 대해서만 책망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13절의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사자에게 대답하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취한 연고니 이제 그것을 화평히 다시 돌리라"는 말씀을 보면 암몬 자손은 자기의 땅을 이스라엘이 빼앗았으니까 이제 그 땅을 돌려달라는 주장을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입다는 그러한 암몬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에 대해서 책망을 합니다. 15절에 보면 입다는 이스라엘이 모압과 암몬 자손의 땅을 취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민수기 21:24절에 "이스라엘이 칼날로 그들을 쳐서 파하고 그 땅을 아르논부터 얍복까지 점령하여 암몬 자손에게까지 미치니 암몬 자손의 경계는 견고하더라"는 말씀을 보면 입다의 이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암몬 자손의 땅을 취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19절부터 22절에 보면 입다는 이스라엘이 아르논에서 얍복과 요단까지의 땅을 차지하게 된 경위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스라엘이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우리를 용납하여 당신의 땅으로 지나 우리 곳에 이르게 하라 하였으나 시혼이 이스라엘을 믿지 아니하여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 모든 백성을 모아 야하스에 진치고 이스라엘을 치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시혼과 그 모든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매 이스라엘이 쳐서 그 땅 거민 아모리 사람의 온 땅을 취하되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까지와 광야에서부터 요단까지 아모리 사람의 온 지경을 취하였었느니라"

즉 아모리 왕이 이스라엘을 선대하지 않음으로서 하나님이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이신 하나님이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는데 그 땅을 달라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 입다의 주장입니다.

입다의 말대로 분명 그 땅은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으로부터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암몬 자손은 그 땅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모리 사람들에게 그 땅을 빼앗겼었기 때문입니다. 즉 아모리 사람들이 암몬 자손에게 빼앗은 땅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붙이신 것입니다. 결국 암몬 자손은 예전에 우리 땅이었으니까 이제 돌려달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암몬 자손 역시 억지 주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암몬 자손은 원래 우리 땅이었으니까 달라고 하고 입다는 하나님이 주신 땅이니까 달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이 본문을 보면서 과연 누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암몬입니까 아니면 입다입니까? 저는 둘 다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암몬 자손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전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땅에 대해서 미련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돌려달라는 요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요구가 정당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들로서 땅에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태도입니다.

이스라엘이 입다에게 도움을 구한 것은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땅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생존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국가란 땅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땅이 없이는 국가도 없습니다. 땅이 클수록 국가의 힘도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조그만 땅덩이인 독도를 가지고 오랜 세월동안 서로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며 싸우는 것도 독도가 누구의 땅이냐에 따라서 국가의 영역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입니다. 즉 영역을 위한 싸움이지 독도라는 땅덩이가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입다를 부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땅에 대한 시각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그 의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단지 자신들이 살아가기 위한 터전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을 통해서 하나님이 진심으로 주시고자 하는 땅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했는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입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12절에 보면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라고 합니다. 입다는 지금 내 땅이라고 말합니다. 내 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자신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머리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머리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땅이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다의 마음이나 암몬의 마음이나 이스라엘의 마음이나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땅에 대해서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자기 삶의 기반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동일하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이나 입다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암몬 자손이 땅을 뺏으려고 하는 것은 단지 땅을 기반으로 해서 먹고사는 일에 풍성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땅은 인간에게 소득을 줍니다. 곡식과 목축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땅을 빼앗긴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에게는 생존에 위협이 되는 일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없는 민족이 땅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 때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신 것은 단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땅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땅에서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바르게 사는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살던 민족을 다 쫓아내신 것도 그들이 땅에서 살아가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입다는 하나님을 단지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신 신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에 남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소유권 주장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입다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들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우리에게는 그러한 들보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를 책망하고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 나가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누군가를 무시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기독교인이라면 누군가를 무시하기 이전에 내 자신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지를 점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들은 무시의 대상이 아니라 복음을 전할 대상입니다. 우리는 때로 심판을 거론하면서 불신자에 대해서 '심판 받을 자'라고 하면서 공격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주님의 은혜를 알게 하신 것은 불신앙에 대해서 공격하고 심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신자는 다만 자신이 알게 된 그리스도를 전하며 살아갈 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세상의 악이 어떤 것인가가 드러날 것이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심판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믿음을 가진 자로서 합당하게 살아가는지 자신을 살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암몬 자손이 우리 조상이 살았던 땅이니까 돌려달라고 하면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이니까 돌려줄 수 없다고 하면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땅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생존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입다는 하나님에게 심판을 부탁합니다.

27절에 보면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컨대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의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나"라고 큰소리칩니다. 심판하시는 여호와에게 판결을 부탁하는 것은, 하나님을 내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이스라엘 자손의 편이고,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 땅을 지키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나 입다가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면 심판하시는 여호와를 내세우면서 판결을 부탁하겠습니까? 여호와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안다면 암몬 자손과 이스라엘 중 누가 옳으냐라는 판결을 묻기 전에 스스로 자신들 역시 땅에 애착을 가지고 있음으로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회개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죄를 아는 신자에게서만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진실된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에게서 보여지는 많은 모습들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돌아보기보다는 항상 타인의 잘못을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잘못이 보여진다면 나에게도 그러한 잘못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무조건 자신은 옳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신학이 옳고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옳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편이고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비록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은 옳을 수가 있고 성경 해석 또한 바르게 할 수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옳고 하나님 역시 내편일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옳으니까 내가 옳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 보지 못하게 만드는 크나큰 장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입다는 암몬 자손의 왕에게 "이제 네가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보다 나은 것이 있느냐 그가 이스라엘로 더불어 다툰 일이 있었느냐 싸운 일이 있었느냐"(25절)라고 말합니다. 모압 왕 발락도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운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압이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즉 모압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스라엘을 두려워함으로서 싸움을 걸지 못했는데 발락보다도 미약한 암몬이 감히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입다의 또 하나의 착각은 모압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 한 것이지 이스라엘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모압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면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입다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내세워서 자신의 강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입다의 착각입니다.

결국 입다는 하나님은 이방민족이 두려워 할 분이지 하나님을 믿는 자신들은 두려워 할 분이 아니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입다의 말은 하나하나가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들의 입장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하나님 백성으로서 누리는 것만 생각을 합니다. 23-24절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아모리 사람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거늘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가하냐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얻게 한 땅을 네가 얻지 않겠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 땅을 우리가 얻으리라"고 말하는 것을 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방인을 쫓아내신 분으로만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나타내지 못할 때 쫓겨날 수밖에 없음을 이방인의 쫓겨남을 통해서 가르치고 있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즉 자신은 전혀 쫓겨날 자로 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과연 입다와 다릅니까? 입다와 같은 오류 속에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타인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는지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기 바랍니다. 나 자신은 옳다고 생각하고 나 자신은 하나님에 대해서 안전지대에 있다고 여기고 자신에 대해서는 심사숙고하지 않은 채 단지 타인의 부당함과 잘못에 대해서 외치는 일에 부지런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는 자신을 결코 의에 자리에 두고 타인을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생존을 위해서 땅에 집착을 하듯, 우리 역시 생존을 위한 땅의 일에 집착을 벗어버리지 못한 채 살아가지 않습니까? 다만 다른점이라면 세상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고, 신자는 생존을 위한 땅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하지 않음을 알고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두고 살기를 소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함으로서 내 힘으로 삼으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소유당한자로서 살아가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