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1:34-40 입다의 괴로움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이 성경이 선포하는 말씀이고 교회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에 대해서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하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현재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여러 상황들을 볼 때 도저히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소말리아 등의 여러 나라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에 수만 명이 굶어 죽는 상황을 말하면서 '만약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이런 상황을 왜 일어나게 했으며 또 왜 그냥 방치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믿지 않는 자들은 구원의 문제는 도외시하고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환경이나 상황을 내세워서 신의 사랑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떻습니까? 신자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는 하지만 과연 세상의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즉 하나님의 사랑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나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니까 아예 생각조차 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멀리 생각하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의 문제에서 사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과연 여러분 자신의 현재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현재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의 삶이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사랑을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진심으로 삶에 있어서 자기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을 가장 최선의 복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쩌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삶을 두고 생각할 때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말만 할 뿐 사랑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현재의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고 꼬이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사랑을 말하면서 삶에 대해서는 사랑이 나오지 않고 한탄만 나온다면 그것은 사랑을 이용하고 있는 수준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셨다면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면 신세한탄보다는 감사와 기쁨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인생은 괴롭다는 말을 합니다. 인생이 괴롭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푸념일 것입니다. 사실 삶이 우리의 마음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삶이 인간의 의미와 소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말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각자가 원하는 바가 다르고, 또 한편이 원하는 것이 다른 편에는 막대한 손해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일 수있기 때문에 인간의 소망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큰 다행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볼지언정 내가 이익을 누리는 것이 급선무인 것이 인간의 본심이기 때문에 자기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누구나 낙심하게 되고 인생 자체에 대해서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배후에는 분명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우리들의 뜻대로 일을 이루어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왜 내가 원하는 대로 안되는 괴로움을 우리에게 안겨주십니까? 이것을 본문에 등장하는 입다의 괴로움을 통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입다는 암몬 자손과 전쟁을 하기 전에 하나님에게 서원을 합니다. 암몬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다면 집에 돌아갔을 때 가장 먼저 자신을 영접하는 그를 하나님에게 제물로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지에 돌아갔을 때 일어나는 상황은 입다로서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입다는 자신을 영접할 그가 자신의 무남독녀 외딸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35절에서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하여금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대로 자신의 딸이 나온 것에 대해서 옷을 찢을 정도로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상황에 대한 반응입니다.

입다에게는 괴로움 이전에는 분명 기쁨이 있었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일순간에 괴로움으로 바뀌어 버리는 상황이 일어난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입다에게 기쁨인 것은 자신이 원하고 계획한대로 일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기쁨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입다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시는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얼마든지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서 자신이 계획하고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일어난 순간 기쁨은 사라지고 괴로움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입다가 제물을 바치겠다고 서원한 것은 분명 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입다의 서원은 순전히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입다가 원하는 기쁨입니다. 즉 입다는 하나님이 나를 기쁘게 해주면 자신도 그 보답으로 내 정성을 바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입다의 의도대로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우리로서는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입다가 원하는 대로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입다가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입다의 딸로 하여금 입다를 영접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입다가 원하는 대로 기쁨을 주시고는 다시 입다를 괴롭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심으로서 입다가 무엇으로 즐거워하고 무엇으로 괴로워하는지를 보이시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입다를 통해서 우리가 무엇으로 기뻐하고 괴로워하는지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사랑으로 인해서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삶의 즐거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다가도 일이 마음대로 안될 때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지 않고 뭐하는가?'라는 불평과 괴로움이 나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자신의 일이 잘되는 것을 삶의 즐거움으로 삼고 살아가는 증거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입다가 제물을 바치겠다고 서원을 한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입다의 딸이 나왔을 때 괴로워 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입다가 하나님에게 바치겠다고 한 것은 자신에게 없어도 될만한 것을 바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있어서 귀한 것이 사라질 때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런 수준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면 우리 자신의 일이 잘되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이 잘되는 기쁨으로 살아간다면 결국 일이 잘 안될 때는 괴로워하고 신세한탄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계획하고 이루고자 하는 일이 마음대로 안될 때 누구든 괴로운 마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괴로움보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괴로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의 괴로움이 있습니다. 입다의 괴로움과 입다의 딸의 괴로움입니다. 입다의 괴로움이 자신이 예상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괴로움이라면, 입다의 딸의 괴로움은 아버지인 입다의 죄로 인한 괴로움인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고 말합니다. 입다의 딸이 자신이 처녀로 죽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 두 달 동안이 산에서 애곡하겠다는 것은 입다의 딸의 괴로움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못한 채 죽어야 하는 것에 대한 원통함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입다의 딸의 괴로움은 깨끗한 자신이 아버지의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하는 괴로움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본문에서 드러나는 입다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고, 입다의 딸은 곧 우리들의 허물로 인해서 죽어야 하셨던 깨끗하신 예수님의 괴로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괴로움만 생각하고 살아가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허물로 인해서 죽으셔야 했던 예수님의 괴로움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이 괴로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일이 잘 안되는 것으로 인해서 괴로워 할 때 하늘에서는 예수님이 우리로 인해서 괴로워하시고 탄식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을 말하면서도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는 우리들 때문에 주님이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고 무덤이 있은지 사흘만에 예수님이 마르다의 집을 찾아오십니다. 그때 마르다가 말하기를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라고 합니다. 마르다의 이 말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이 예수님을 필요로 했을 때 함께 계시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만이 아니라 마리아도 예수님 앞에서 울면서 주님이 여기 계셨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사로가 죽는 슬픈 일을 겪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푸념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해주기만 했다면' '예수님이 도와주기만 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라는 생각이 우리들 머리에서 떠나지 않을 때가 한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주님은 내가 어려울 때 함께 하시고 도와주는 주님만이 진짜 주님다운 주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가와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만약 나에게 도움이 되고 나와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면 그 믿음은 자신의 일이 잘 되는 것과 잘되지 않는 상황에 의해서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셨을 때 마르다는 마지막날에는 다시 살 것을 나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나사로가 죽었다고 해서 슬퍼하고 울면서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이 우셨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울음과 마르다와 마리아의 울음이 서로 대비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울음은 다만 자신들에게 일어난 상황에 대해서입니다.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에 대한 괴로움과 슬픔입니다. 그들은 분명 부활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사로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슬퍼하고 운다는 것은 결국 부활을 알지만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보시기에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괴로움은 우리의 믿음 없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입다 때문에 두달을 애곡하고 죽은 입다의 딸처럼 우리의 허물 때문에 고통을 받으시고 죽은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일이 잘 될 것인데'라는 기대는 하나님의 기쁨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괴로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이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쁨이 되어주시기 위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의 일은 우리들의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설사 내 생각대로 되어졌다고 해도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고 잘 안되었다고 해도 역시 하나님이 계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 기쁨이 있게도 하시고 괴로움이 있게도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기쁨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예수님이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셨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일이 잘된 것으로 인해서 즐거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삶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기쁨만을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할 일에만 감사하게 되고, 항상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할 일에 대해서만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괴롭게 하는 우리의 허물임을 깊이 생각하시고 우리의 허물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새롭게 깨달으시고 사랑과 은혜로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