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2:7-15 사사들의 삶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 아니라 삶의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서 힘쓰고 살아가는가를 보면 온통 삶의 질을 위해서 동분서주하지 삶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의 내용은 단지 삶의 질이 충족된 사람들, 즉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큰 부담이 없는 사람들이 누리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가끔 생각해 볼 문제 정도로 여겨버립니다.

우리는 삶의 질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도 배부를 때 찾는 것이지 배가 고픈데 무슨 하나님이냐'는 푸념을 하기도 합니다. 배가 불러야 봉사도 하고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볼 마음을 여유를 가지는 것이지 배가 고픈데 그런데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말도 합니다. 이것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 편해야 하나님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사고입니다.

이것은 결국 신앙생활을 마음의 여유가 있는 자들이 누리는 취미생활 정도로 여긴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종교에 대한 시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찾는 분이 아닙니다. 배가 고프든 배가 부르든 항상 변함없이 찾고 불러야 할 분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배부름을 위해서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배부름이나 배고픔과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삶의 질을 하나님과 연관지어 생각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좋게 해줘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주고 있으니까 당연히 그에 대한 대가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질을 좋게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는 것에 걱정만 없으면 제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 힘드니까 기도도 안되고 성경 보는 것도 안되고 봉사도 못한다는 푸념들을 많이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 환경이 그것을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환경이라는 것이 누구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환경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환경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이 됩니다. 즉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에게 방해가 되는 것을 자기 백성에게 주셨다는 말도 안되는 결론이 내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어떤 환경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삶의 환경과 삶의 질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과 삶의 질이라고 해도 믿음은 불변입니다. 즉 세상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배고플 때는 배고픈 대로 믿음은 드러나게 되어 있고, 배부르면 배부른 대로 믿음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신자의 삶의 내용이 삶의 질 때문에 사라져 버리고 희미해진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었다는 증거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삶의 질만 좋으면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크나큰 오해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몰라도 너무나 모른 것이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전혀 알지 못한 무지에서 발생한 사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삶의 질을 생각하는 믿음이라면, 그는 배고프든 배부르든 상관없이 이미 자기 삶에 치우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사는 문제가 최우선이지 하나님이 최우선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배부르다고 해서 과연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배부르면 배부른 대로 자신의 여유를 누리려고 할 것입니다. 배부름에 취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곧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 것인데 이미 처음부터 삶의 질을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배고플 때 하나님을 믿지 못한 사람은 배부름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배고픔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한 사람은 배부름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 아니라 삶의 내용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먹어도 배부름은 같습니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배부름은 같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서 살아도 잠자는 것은 같습니다. 어떤 옷을 입어도 그 몸은 같은 몸입니다. 옷이 사람의 몸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질이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삶의 내용은 단지 태어났다가 살고 죽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그릇으로 본다면 그 그릇에 무엇이 담고 살아가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에 무엇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삶에 닮길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밖에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살아가는 삶의 흔적이 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보면 단지 먹고 살아가는 것밖에 없는 것은 아닌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문을 볼 때 본문의 내용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본문은 입다 이후에 일어났던 사사들의 이름이 몇 명 기록되어 있습니다. 7절에서 "입다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 한 성읍에 장사되었더라"는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입다가 죽은 후에 입산이란 사람이 사사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입산이 죽고 11절에 엘론이란 사람이 사사로 등장하고 엘론이 죽은 후 압돈이란 사람이 사사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사사들은 무엇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보면서 입다 이후에 이스라엘에게 태평성대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사사들이 특별히 이스라엘을 위해서 할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태평성대라고 해서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할 일이 없는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목사가 태평성대라고 해서 성도들을 위해서 할 일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 위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증거하기에 힘쓰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목사가 아닙니까? 그 일이 태평성대라고 해서 사라진 것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사라는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힘쓰는 자로 세움을 입는 것인데 태평성대이기 때문에 사사가 되었다가 죽었다는 것만 남긴다면 사사로서의 삶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은 없이 단지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삶만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삶에 담길 내용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8-9절을 보면 "그의 뒤에는 베들레헴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이었더라 그가 아들 삼십과 딸 삼십을 두었더니 딸들은 타국으로 시집보내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타국에서 여자 삼십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 지 칠 년이라"고 말합니다. 입산에게는 아들이 30명이고 딸이 30명이라는 것을 보면 입산의 부인이 여럿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입산은 아들을 위해서 타국에서 여자 30명을 데려왔고 딸은 타국으로 시집을 보냈다고 합니다. 타국에서 여자를 데려오고 타국으로 시집보냈다는 것이 이방인과 교류하였다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다른 가문, 즉 다른 지파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어쨌든 입산이 자신의 자식을 모두 타국의 사람과 결혼을 시켰다는 것은 오늘날 자식을 무조건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부모의 허영심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내 나라에서는 만족을 못하기 때문에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면 그만큼 가치가 높아진다는 생각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13-14절을 보면 "그의 뒤에는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이었더라 그에게 아들 사십과 손자 삼십이 있어서 어린 나귀 칠십 필을 탔었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고 말합니다. 10:4절에 보면 야일이란 사사에게도 아들 삼십이 있어서 나귀 삼십을 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도 말씀을 드렸지만 나귀를 탔다는 것은 부요함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압돈에게 아들 사십과 손자 삼십이 있어서 나귀 칠십 필을 탔다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부요함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요함을 누렸다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오직 그것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사사로서의 삶이 단지 사사가 되었고 죽었다는 것, 아들을 위해서 외국에서 여자를 데려오고 딸을 외국으로 시집보냈다는 것, 아들과 손자가 나귀를 탔다는 것, 이러한 기록만 있는 사사라는 것은 결국 그들이 사사로서 살았지만 사사로서의 삶의 내용은 없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사가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사로서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사가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사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장로가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로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담을 그릇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의 삶에 담겨지고 있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담겨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담겨지고 있습니까? 신자는 단지 살아가는 문제보다는 삶의 내용이 중요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지만 삶의 내용은 우리들의 위대한 업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좋은 일을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삶의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담긴 삶,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담긴 삶을 산다면 자연히 그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은혜와 사랑 때문에 사랑하게 되고 희생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배고픔은 물론 고생입니다. 우리가 일부러 고생을 추구해야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질은 우리가 추구한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배부름이든 배고픔이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며 어떤 환경이 주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배고픔에는 사랑이 없고 배부름에 사랑이 있다면 배부름은 중요한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지만 어디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하다면 삶의 질은 우리에게 결코 중대한 문제로 남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삶의 질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몫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신자는 어떤 삶에서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바라보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삶에서도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의지하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로서 중요한 삶의 내용입니다. 많은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에 감사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삶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삶의 내용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살았다는 증거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물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영접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에게 진심으로 중요한 것은 삶의 내용이지 삶의 질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났다가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세상에서 무엇이 되었다는 것에 마음을 두기보다는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마음을 크게 두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지만 목사가 되었다 장로가 되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천국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정받게 하는 증거물이 아닙니다. 무엇이 되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안다면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안다면 그 희생으로 살아가는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 흔적이 여러분에 삶에 담겨져야 합니다.

오후예배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218 장

기도 / 한옥순 집사

성경봉독 / 롬 16:17-20

설교 / 121강

성도의 미혹

기도 / 설교자

찬송 / 545 장

폐회 / 주기도문

다시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담겨지고 있는 것들은 무엇의 흔적들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의 희생을 아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흔적들입니까 아니면 단지 멸망 받을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흔적입니까?

본문의 사사들에게서 발견되어지는 삶의 흔적은 사사로 산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산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사들과 동일한 삶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이름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물론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은 그 이름과 업적이 역사 속에 남게 되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책에도 기록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는 다만 그 이름만이 기록되었을 뿐입니다. 인간에게 업적이란 없습니다. 있다면 인간을 부르셔서 일하신 주님의 일만 있을 뿐입니다. 즉 주님의 업적만 있을 뿐이고 그 업적에 감사하며 살아간 그리스도인만 영원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위대한 업적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위대한 일은 이미 주님이 하신 일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일 앞에서 또 별개의 위대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일에 대해서 감사하고 살아가면 됩니다. 희생이라는 주님의 위대한 업적 앞에서 우린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면서 주님의 희생 때문에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은 주님의 이름 안에서 영광되고 위대해지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로 위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는 주님의 희생만 담겨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희생으로 살아갈 때 여러분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희생이 아니겠습니까? 이 희생이 여러분의 삶에 담겨지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삶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삶에 담겨진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냥 먹고 산 얘기입니까? 예수님의 삶에는 하나님에게 순종하신 그것만 담겨 있을 뿐입니다. 남들처럼 그냥 살아가지 마시고, 삶의 질에 관심을 두려고 하지 마시고, 삶의 내용을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들어있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희생과 은혜의 흔적인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