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3:1-7 삼손을 잉태한 여인

오늘은 성탄절을 하루 앞두고 있는 주일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올 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성탄에 대한 즐거움은 가득한데 그리스도로 인해서 즐거워하는 모습들은 희박한 현실을 보면서 마음이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오늘 나의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해서 나 자신에 대한 책망을 해보기도 합니다.

성탄절은 분명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자고 만들어 놓은 날입니다. 따라서 12월 25일이 예수님이 오신 날이 맞느냐에 대해서 따진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오신 정확한 날을 찾아서 그 날을 지킨다는 것이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에 성탄의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성탄은 하루가 아니라 매일 계속되어져야 할 날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날마다 계속되어져야할 것이지 일년중 하루로 끝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진심으로 성탄절을 기뻐한다면, 과연 우리의 삶의 매일은 그리스도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까? 만약 매일의 삶에서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전혀 없었는데 성탄절이라고 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면 그 기쁨을 진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매일 그리스도로 기뻐한다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누리는 감정적인 기쁨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고 그리스도로 인해서 구원받은 자가 되었다는 그 복음으로 인해서 세상에서 주어지는 여러 가지 근심 걱정들로부터 해방되는 삶을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기쁨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큰 기쁨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일이 신자에게는 불안과 염려로 자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된 것을 말합니다. 즉 '임마누엘'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가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것이 싫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해서 여러분이 세상에서 누리는 즐거움들이 빼앗기게 되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어쩌면 오늘 우리는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탄절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자들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기뻐하지만, 진정한 성탄의 기쁨은 세상에서의 기쁨과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인 것을 생각하시고 과연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이 어떤 것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암몬자손과의 전쟁에서 승리케 하심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전쟁이 없는 평화의 날을 지냅니다. 그러다가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행한 악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지만 그동안 이스라엘이 행한 악을 보면 아마 우상을 섬긴 것이 아니었는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평안할 때 하나님이 주신 평안으로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평안 속에서 자신들의 안락에 깊이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평안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필요성도 느끼지를 못하게 되고 하나님이 없어도 괜찮다는 착각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구원을 위한 신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고 쾌락에 도움을 주는 신에게 마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이고 여호와 앞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힘들 때는 열심히 하나님을 부르다가도 평안할 때는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는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 급한 문제가 있어야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수준의 신앙이라면 평안할 때는 당연히 하나님을 부를 필요성을 느끼지를 못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평안할 때, 이 평안이 여호와로 말미암았음을 알고 여호와께 감사하는 신앙이라면 힘들 때도 역시 여호와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여호와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평안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에 치우쳤습니다. 지난주에 사사들의 삶은 자기 자식을 위한 것밖에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식을 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한 것이 삶의 목적이었고 전부였던 것이 당시 사사들이었습니다. 결국 사사의 삶이 그랬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의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악을 행했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악에 대해서 그들을 40년 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심으로 징계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 구원하시기 위해서 단지파의 마노아라는 사람의 아내를 통해서 삼손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생각할 것은, 이왕 구원하실거면 왜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여서 40년을 고생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입을만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악을 본다면 40년이 아니라 영원토록 압제를 당해도 마땅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방인의 압제에서 가장 크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 고통이 무엇 때문인가를 깊이 인식할 때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포기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능히 포기할 수 있는 신자로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대다수의 신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인생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세상을 풍족하게 살아가는데는 보탬이 안된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삶에 있어서 번거로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4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고 말합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나실인이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나면서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된 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구별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면 안되고, 머리에 삭도를 대서는 안되고 죽은 시체를 가까이 해서도 안됩니다. 이것이 나실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지켜야 할 규례인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한가지 특이한 것은 나실인이 아닌 마노아의 아내, 즉 삼손을 잉태한 여인에게까지 포도주와 독주 그리고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나실인이 아닌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나실인으로 택함을 받은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유로 나실인의 삶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 뭐 그리 힘든 일이겠는가라고 여기겠지만, 당시 이스라엘에 있어서 포도주는 일상 주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치 우리들에게 쌀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안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이것은 큰 번거로움을 안겨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싫어한 것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아무런 불평 없이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겠지만 늘 대하는 것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그 번거로움은 참으로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실인의 규례는 일상 생활 속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것들을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구별된 자라는 증거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노아의 아내는 하나님에게 자신의 몸에 구원자를 보내달라고 요청을 한 적이 없고, 또한 자신이 나실인으로 살겠다는 서원을 한 적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일이었습니다.

5절에 보면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에게 바치운 나실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더군다나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의 몸을 통해서 낳은 아이라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일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이것과 비슷한 사건을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와 그 남편 요셉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것은 그가 원한 것이 아닙니다. 처녀이기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마리아에게 예수를 잉태하게 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마리아와 요셉 본인은 말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처녀가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를 가졌다는 것은 처녀로서는 크나큰 불명예이고 요셉에게도 마리아에 대해서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나타나서 잉태한 아기가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이며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실 자라는 것을 말했을 때 마리아는 자기 뱃속의 아이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46-55절을 보면 마리아의 찬양이 나옵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는 찬양을 보면 마리아는 자신의 몸에 예수를 잉태케 하신 것이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노래합니다.

결국 마리아가 자신의 몸에 잉태하신 구주를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비천에 처한 자임을 알았기 때문이고, 예수가 곧 자신을 비천에서 건져낼 구주로 오신 분임을 알았기에 기뻐하는 노래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처녀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고통을 돌아보지 않게 할 만큼 큰 기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말한 비천에 처했다는 것은 가난하다거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상태를 의미한 말입니다. 즉 죄악가운데서 구원받지 못할 자로 살아가는 인간 자체가 참으로 비천에 처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실태를 마리아가 알았기에 비천에서 건져낼 구주의 오심에 대해서 기뻐할 수 있었으며 구주가 자신과 함께 한 것이 곧 복이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마노아의 아내 역시 아이를 잉태케 하심으로서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 하라는 규례를 지킨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일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 아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는 하나님의 사자의 말을 들었을 때 이제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규례에 대한 번거로움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태어나는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 것인가에 있게 된 것입니다. 즉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태어나는 아이는 한 개인의 번거로움 따위는 돌아보지 않게 할 만큼 의미가 있는 탄생이었던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또 12절에서도 "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제 그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군다나 성탄절을 하루 앞두고 있는 오늘 그리스가 오셨다는 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나 삼손을 잉태한 마노아의 아내에게 동일한 것은 아이를 잉태한 것이 자기 개인에게는 희생을 요구하는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처녀로서의 희생, 그리고 평소 살아가던 삶에서의 구별, 이 모두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유로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과 구별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잉태된 아이를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아이가 현재 자신들의 비천한 처지를 구원할 자로 오셨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40년 간 압제를 받고 있는 비천한 처지에서 구원할 자로 잉태된 아이였기 때문에 자신에게 요구되는 구별된 삶에 기꺼이 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로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처지가 어떠함을 알았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이 처지란 세상의 소유나 지위 환경으로 인한 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을 의미한 처지라면 소유가 많고 지위가 높은 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따라서 성탄 역시 의미 없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주어진 환경에서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환경이 좋을 때는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환경이 좋지 못할 때 자신들이 처한 처지가 비참하다거나 좋지 않다고 불평들을 합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처지에서 구원할 자는 환경을 좋게 해주는 메시야일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삶에 풍족함이 주어질 때는 예수로 기뻐한다고 하면서도 풍족하지 못할 때는 기뻐하지 않게 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이 잉태된 것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은 비천에 처한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자신의 처지가 어떠함을 아는 자들에게만 그리스도의 오심이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서 자신들에게 어떤 희생이 요구되고 번거로움이 요구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로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진정한 성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손은 날 때부터 하나님에게 바쳐진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날 때부터 모든 삶이 오직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살아갈 자로 택함을 입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실인을 잉태한 마노아의 아내에게까지 나실인의 삶이 요구되는 것은 구별된 자를 잉태한 사람답게 구별한 삶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면 나실인으로 태어날 아이가 나실인이 안된다든지 무슨 영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이 나실인으로 살아감으로 인해서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아이가 어떤 아이인가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옛사람으로 살아가던 삶을 계속 살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대로 세상에 오심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하늘로 가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과 우리들의 삶이 서로 구분된 채 계속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예수님의 삶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즉 옛사람의 삶에서 새사람의 삶으로 살아가야 할 새로운 삶이 부여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함께 한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이 있으며 그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별된 자의 구별된 삶입니다.

세상과 구분된 삶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노아의 관심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가에 있게 된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가에 관심을 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신자입니다.

분명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삶이란 생각한 것처럼 편안하고 많은 혜택과 도움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피하고 싶은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비천함, 즉 죄인된 인간으로서의 자기 처지를 가슴깊이 인식한 신자라면 그리스도의 오심은 무엇보다 반갑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세상에서 어떤 희생과 손해가 요구된다고 해도 기쁨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의 오심의 기쁨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자에게 성탄이란 진정으로 기쁜 날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