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3:15-25 기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은총을 받을만한 존재입니까? 비록 우리 스스로는 우리들의 행함을 근거로 삼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서 보시는 인간은 소멸되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마땅히 심판 받고 소멸되어야 할 대상이 그 심판으로부터 건짐을 받았다는 것에서 드러나는 것이지 심판이 없는데서 아무리 사랑을 말한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만들어낸 사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은 마땅히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랑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신 4:24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과연 이 말씀 앞에서 해당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실 것이고, 소멸하시는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린 오직 악을 행하는 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을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서 태에서부터 하나님에게 바치운 나실인이 된 자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서 마노아의 아내에게 잉태된 아이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이 하나님에 의해 잉태된 아이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구원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되어지는 것이며 이스라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자를 보내달라고 애원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들의 악을 두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 속에 구원자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우리는 마땅히 죽을 자들입니다'를 아는 것으로 출발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마땅히 죽을 자임을 아는 것과 그것을 간과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마땅히 죽을 자라는 의식이 있을 때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나를 살리는 자'입니다. 마땅히 죽을 자가 죽지 않는 자로 남을 때 그는 그것을 은혜로 여기게 되고, 누구 때문에 죽지 않을 자로 남게 되었는지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자임을 간과해 버린 다면 그는 자신을 마땅히 살 자로 여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서 살려주기 위해서 오신 분에 대한 감사함과 그분에게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있겠습니까? 오직 자신에게만 모든 관심을 둘 것입니다.

21,22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마노아는 자신 앞에 나타난 자가 여호와의 사자임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17절에서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그 이름을 묻고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여호와의 사자의 신분을 알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마노아는 자기 앞에 있는 자는 앞일을 예언하는 선지자 정도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한 예언이 이루어질 때 그를 찾아서 그 이름이 존경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이름을 물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노아의 물음에 여호와의 사자는 '내 이름은 기묘니라'고 답합니다.

기묘란 분명 이름이 아닙니다. 기묘라는 것은 이해를 초월한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라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즉 인간이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치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에게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 즉 아이가 없는 그의 가정에 아이를 주시는 것은 기묘하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의 말대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립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가 이적을 일으켜서 불꽃이 단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가고 여호와의 사자도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갑니다. 이것을 본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19,20절). 그리고 마노아가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비로소 자기 앞에서 자신과 대화를 나눈 자가 누구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마노아는 자기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 이상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마노아의 아내는 달랐습니다. 23절에 보면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다면 자기들의 손으로 드린 번제와 소제를 받으셨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서 그 모든 일을 보이지도 말씀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마노아의 아내는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은 것은 자신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 즉 하나님이 주신다는 아이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란 인간이 하나님에게 다가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심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왜 이점을 잊어서는 안되는가 하면,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에게 다가갈 수도 없고 또 인간이 하나님에게 다가감으로 되어지는 것도 아님을 안다면 인간 쪽에서 하나님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시도하는 모든 것들이 헛된 것임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많은 교인들이 이점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자신 스스로 하나님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애를 쓰는 모습들을 많이 발견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뭔가 바치고 행함으로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기 힘으로 자신을 하나님에게 붙들어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심과, 죄인들 속에 뛰어 들어오신 것에 대해서 간과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즉 죄인들 가운데 오신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하나님을 봤으니 죽어야 한다는 마노아의 말에 대해서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진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려 하셨다면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것이고 자기들에게 오셔서 말씀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아이를 주시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노아의 아내는 자신들이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은 이유를 하나님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마노아의 아내에게 아이를 나실인으로 키울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하셨지만 삼손이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지를 못합니다. 이것을 볼 때 삼손의 존재 이유는 삼손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출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삼손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출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삼손을 왜 이스라엘에 보내신 것입니까? 그리고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에게 압제를 받고 살아가는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악은 여호와를 바라보고 살아가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나실인으로 부름 받은 삼손을 이스라엘 안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아이로 인해서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가르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노아의 번제를 받으시는 것은 마노아 때문이 아니라 마노아의 가정에 보내시는 아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마노아의 가정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시기에 마노아의 번제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근거를 우리 쪽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이러이러하니까 나는 믿음이 있는 자고 그러니까 나는 구원을 얻을 자다'는 생각을 추호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보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영광돌리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모르는 무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자신들이 여호와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제사를 잘 드렸다'든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다'라는 쪽으로 의미를 두지 않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서 가진 확신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번제를 받으시고 말씀하시고 아이를 주신 이 모든 것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려 하신 분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행한 행함에 의해서 확신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우리에게는 확신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예수님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게 하시는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님을 아는 확신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는 자신의 행함이나 실천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에 의해서 독생자 그리스도가 세상에 보내졌다는 것이 곧 구원의 확신으로 자리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이제 마노아의 가정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이가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무작정 하나님을 상상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이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노아가 자신이 만난 사람이 여호와의 사자인 것을 알지 못했을 때는 자신의 가정에 아이를 주겠다는 것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아이 없는 가정에 아이를 주겠다는 선지자의 예언 정도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실제 그 일이 이루어지면, 당신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당신의 능력을 높이고 존경하겠다는 의미로 이름을 물어본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가 '내 이름은 기묘니라'고 말씀하면서 아이가 태어나는 모든 일이 곧 하나님이 하시는 신비롭고 놀라운 일임을 드러냄으로서 마노아로 하여금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이 개입된 일임을 알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노아의 아내는 하나님이 자기들의 삶에 개입하신 것 자체가 하나님이 자기들을 죽이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고자 하기 위함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이를 대할 때에 다만 자신들의 아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보냄 받은 아이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자기들에게 머물러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염소 새끼를 잡으려고 했을 때만 해도 이들의 관심은 여호와가 아니라 자기들에게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들의 관심을 하나님에게 두게 하기 위해서 '내 이름은 기묘니라'고 말합니다. 마노아가 하나님을 알았을 때는 자신은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노아의 아내는 하나님을 알았을 때 자신은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린 이러한 말씀을 대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는 자는 모든 관심이 자기에게 있습니다. 마노아가 자신이 집안에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예언한 여호와의 사자를 환대한 것처럼 자신에게 좋은 일을 일으키는 신을 환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의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신자는 죄인된 자신들이 마땅히 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죽지 않는 자로 살아가는가를 아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로 인해서 산 자가 되었음을 감사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아들을 영화롭게 함으로서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마노아가 아이를 대할 때 우리 가정을 살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대하는 것처럼 신자는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마다 그리스도인해서 내가 살고 내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산다는 생각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산다는 것, 이것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지 않을 때 우리의 관심은 자연히 우리에게 주어지는 좋은 일에만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다면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고 살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