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4:1-4 삼손과 부모의 갈등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즉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신자가 도움이 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하는 일 중에 과연 하나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구제하고 전도하는 것까지, 소위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단 생각해 볼 것은 도움이라는 말에 대해서입니다. 도움이 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유익이 된다든가 보탬이 된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하나님에게 보탬이 된다든가 유익이 된다는 의미가 있게 됩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사람이 하는 일들이 하나님에게 보탬이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것을 철저히 부정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간의 역사를 보면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순종했다면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징계와 가르침에 의해서 일순간 하나님께로 마음이 돌려졌을 때 나타난 현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한번 순종했다고 해서 다음부터 스스로 순종하며 살게 된 것이 아니라 또 다시 불순종으로 나아간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그것은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일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죄의 출발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죄인된 인간으로서 타고난 습성은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말도 생각도 행동도 자신이 중심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유익과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위해서 힘쓰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일을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처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하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이 본성을 다스리는 외부의 힘이 개입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이점에 대해서 생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평소 하나님을 믿으며 산다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결국 자기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삼손의 결혼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장성한 아들의 결혼 문제로 인해서 부모와 자식간에 갈등이 발생한 사건입니다. 1,2절을 보면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도로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 중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취하여 내 아내를 삼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삼손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딤나라고 하는 곳으로 간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블레셋 사람인 한 여인을 만나게 되고 삼손은 그 여인이 마음에 들어서 자기 부모에게 그 여인을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속국이었지만 블레셋 사람의 지역을 자유롭게 왕래 할 수 있었고 블레셋 사람과의 혼인도 가능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삼손이 자기 마음에 드는 여인을 발견하고 자기 부모에게 그 여인을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대개 부모로부터 두 종류의 반응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허락하는 것이고 하나는 반대하는 것입니다. 허락을 하는 것은 자식이 원하는 결혼 상대자가 부모의 마음에 들었거나,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허락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하는 것은 당연히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삼손의 부모는 삼손이 원하는 여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3절을 보면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 하니"라고 말합니다. 부모가 삼손이 원하는 여인을 반대한 것은 그 여인이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의 딸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반대에 대해서 삼손은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니까 날 위해서 그 여자를 데려와 달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삼손의 부모는 가문을 의식한 것 같습니다.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의 딸이기에 안된다는 것은 결국 그들의 가문과 우리의 가문은 질이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어떻게 보면 삼손의 부모가 모세의 율법을 순종하기 위해서 거절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금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삼손의 부모는 삼손이 이방인과 혼인을 함으로서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것을 염려해서 결혼을 허락하지 않은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만약 삼손의 부모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면, '할례 받지 아니한'이라는 말을 하기보다는 블레셋 사람과의 혼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남을 가르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손의 부모는 삼손에게 가문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할례 받은 것에 대한 우월감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과 혼인한다는 것을 가문의 위신과 체면의 문제로 생각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삼손은 부모의 거절에 대해서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여인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단순히 좋아한다는 이유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4절에 보면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 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딸을 아내로 삼고자 한 것은 그 여인을 이용해서 블레셋 사람을 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블레셋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나서 기회를 봐서 그들을 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딸과 결혼하고자 한 것은 선한 의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분명 신 7:3,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4절의 말씀을 보면 삼손의 부모는 그 일들이 여호와께서 나온 것 인줄을 몰랐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딸을 아내로 삼고자 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부모는 그러한 사실을 몰랐기에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만약 이것이 맞다면 삼손은 옳고 그 부모는 틀린 것이 됩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지한 하나님이 삼손을 이방인과 혼인하도록 해서 블레셋을 치도록 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사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목적은 가지고 계셨지만 그 방법이 굳이 삼손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는 이방여인과의 혼인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삼손은 결국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으로 인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16:21,30). 따라서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고자 한 의도가 분명 옳지 못한데도 불구하고 그의 의도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이유로 옳지 못한 것을 옳은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모순이라 말할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흔히 이런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믿는 집안의 자식이 불신자와 결혼하려고 할 때 부모가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를 합니다. 그럴 경우 자식은 '내가 그 집안에 장가가는 것이, 혹은 시집가는 것이 그 집안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인 줄을 누가 압니까?'라는 항변을 함으로서 결혼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불신자와의 결혼을 금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진심으로 자기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자가 없음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로서 나온 일이라고 해서 여호와가 삼손에게 블레셋 여인과 혼인할 것을 지시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지시를 하신다면 사람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핑계 대고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삼손에게 이방인과의 혼인을 지시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잘못됨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러한 상황을 만드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로 나온 것이라는 말은 삼손의 결혼이 여호와가 의도하고 지시한 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삼손이 이방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삼손의 부모와 삼손의 잘못됨이 드러난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서 블레셋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 그 누구도 개입되지 않은 우연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삼손에게 블레셋 여인을 만나게 함으로서 이것이 결혼의 문제로 번지게 되고, 그로 인해서 삼손과 삼손이 부모의 갈등이 드러나는 것을 통해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음이 증거된 것입니다.

만약 삼손의 부모가 평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이라면 삼손의 결혼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문제를 언급하기보다는 삼손이 어떤 사람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타당합니다. 즉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에게 바치운 사람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하며 이방인과 혼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임을 앞세우는 것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부모로서 옳은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앙인의 부모로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식을 대할 때, 그리고 여러 상황과 문제들을 대할 때 내 입장과 내 가문과 내 생각을 중심으로 행동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행동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은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식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우긴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상황 역시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자식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우연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을 통해서 과연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살아가는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의 부모 역시 삼손의 결혼 문제로 인해서 결국 가문을 생각하고, 할례를 받았나 안받았나하는 외적인 문제만을 중시하고 살아가고 있었음이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삼손을 가르칠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삼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삼손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자로 살았다면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이방인과 혼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술수와 방법을 이용해서 블레셋을 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삼손이 자신의 힘을 믿고 있었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만난 조그만 일이 결국 삼손이나 삼손의 부모 모두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결국 삼손이나 삼손의 부모는 이 모든 일이 여호와께로 나온 것임을 모르고 오직 자신들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처음의 문제를 언급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삼손과 삼손의 부모를 통해서 드러난 것처럼, 사람은 항상 자기 생각과 자기 입장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모든 상황과 문제를 바라보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은 우리의 불신앙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불신앙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돌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일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지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일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항상 생각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앞에 일어난 상황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 앞에 일어난 상황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입장과 생각에 의한 행동과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하고 말을 해야 하는지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 중심으로는 행동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해도, 부모의 입장과 생각만 고집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자식과의 갈등뿐입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이 이런 상황을 만드셨는가를 생각한다면 결국 그런 상황을 통해서 부모인 내 자신이 평소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자식 역시 부모 앞에서 자신의 입장과 욕구만 주장할 때 그것이 곧 그 중심이 하나님이 없는 모습임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모든 일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풀어 나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신자로서 극히 타당한 모습입니다.

무슨 일에든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 할지라도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앞에 만들어 놓으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반응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통해서 여러분이 과연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가가 증명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이 누군가와 다투게 된다면 분명 다툼의 원인이 있습니다. 우린 대개 그 원인만을 생각하면서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가만 따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툼으로 번지게 됩니다. 평소 우리 속에 담고 살아가던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면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인가?'를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부부싸움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에서 서로 자기 입장만 생각한다면 싸움은 그치지 않고 계속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 편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모든 것은 서로 사랑하는 도구요 수단이 될지언정 싸움의 원인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은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입니다. 즉 삶에 믿음이 속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삶이 속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삶의 일부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과 삶이 구분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으로 산다면 생각하는 것도 믿음에서 나온 것이어야 하고, 행동하는 것도 믿음에서 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과 행동 모두가 자신의 욕심에서 나오는데도 믿음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이든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말씀이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날마다 여호와를 바라고 살아가는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평소에는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살아가면서 믿음을 말하지는 맙시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뻔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일에서 여호와를 바라보는 것, 이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안목입니다. 눈이 뜨인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경이면서 자신의 소경 됨을 모르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눈이 뜨여야 한다는 필요성조차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왔음을 아는 자, 그가 바로 여호와를 보고 사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