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4:5-9 삼손과 사자

현대는 능력 위주의 사회입니다. 인간도 능력으로 그 가치가 평가되는 사회이기에 능력에 따라 사람의 값이 달라집니다. 어차피 세상이 사람의 능력을 사고 파는 현장이니 만큼 이왕이면 능력있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자신을 비싸게 파는 것이 곧 출세요 성공입니다. 때문에 사회적인 지위가 상승되기를 열망하는 사람이라면 그 열망에 비례해서 자기 능력의 향상에 대한 열망도 역시 같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망에 비해 정작 자신의 능력은 너무 무력하다고 느껴질 때 상대적으로 절망감에 빠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절망감으로 인해서 '나는 할 수 없다'는 자신에 대한 포기로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에 유행하는 말 가운데 '나도 할 수 있다'는 적극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할 수 없다'는 포기보다는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삶이 필요하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는 이 말처럼 현대인에게 힘을 주고 희망을 가지게 하는 말도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능력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복음과도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능력을 원하고 자신이 뭐든지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슈퍼맨 같은 자가 되기를 꿈꾸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성경에 등장하는 힘있고 능력있는 인물들은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이나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구절들 역시 신앙인에게 있어서 인기 있는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의 풍조가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삶의 지표로 삼고 살아가는 신앙인이라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능력은 무엇이며 믿음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이며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이점에 대해서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힘있는 남자되기를 열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흠모의 대상인 삼손이 맨 처음 힘을 발휘하는 내용입니다. 삼손이란 이름을 대할 때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와 같은 힘센 영웅을 상상할 것입니다. 삼손의 체격 역시 골리앗처럼 건장한 체격에 근육질의 사나이로 인식되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힘없는 나약한 체격의 남자에게 삼손은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삼손에 대한 이러한 선입견은 본문의 내용을 크게 오해하게 만들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삼손은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가서 딤나의 포도원에 이르게 됩니다. 삼손이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간 이유가 삼손의 결혼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1절에서 삼손은 딤나에서 한 여인을 만났고 그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부모에게 요청을 했었고 삼손의 부모는 반대를 합니다. 그러나 결국 삼손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한 삼손이 부모가 삼손과 함께 딤나의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내려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삼손은 딤나의 포도원에서 어린 사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6절에서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은 것처럼 찢어 버립니다. 5절에서 삼손이 만난 사자가 어린 사자라고 해서 태어난지 몇 개월 되지 않은 먹이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새끼 사자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즉 고양이처럼 귀여운 새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린 사자라는 것은 그만큼 젊다는 것이고, 젊다는 것은 힘이 왕성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삼손이 만난 사자는 힘센 젊은 사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자를 마치 염소 새끼를 찢은 것처럼 찢어 버렸다는 것은 백수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자가 삼손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삼손의 힘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이 의미하는 것이 이것이 전부라면, 즉 삼손이 얼마나 힘이 센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무용담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본문에서 성경의 가치를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삼손이 힘이 세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삼손이 힘이 세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힘센 삼손이 우리를 구원하기라도 한다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삼손이라도 믿으라는 것입니까? 분명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가 의지할 분입니다. 그러므로 삼손의 힘과 우리의 구원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삼손의 엄청난 힘이 그들의 희망일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이스라엘로서는 사자조차도 염소새끼를 찢는 것처럼 찢어버린 힘있는 삼손이 유일한 희망으로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과 오늘 우리는 분명 다른 상황에 살아갑니다. 우리를 압제하는 민족도 없습니다. 삼손처럼 강한 힘을 가진 영웅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센 삼손은 오늘 우리들과는 상관관계가 없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본문은 삼손의 엄청난 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가 오늘 우리들의 숙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삼손이 사자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감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상식과는 다른 행동입니다. 우리들의 상식대로라면 사자를 죽인 사실을 부모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것입니다. 부모로 하여금 자식이 사자를 죽일 만큼 힘이 있음을 알게 함으로서 기쁨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우리들의 상식과는 달리 사자를 죽인 사실을 감춥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또 하나는 8절에서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가더니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삼손이 사자의 몸에서 꿀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삼손은 힘이 세다'는 선입견을 버린 채 오늘 본문을 대하시기 바랍니다.

'삼손은 힘이 세다'는 선입견을 버리라고 말씀을 드린 것은 6절에서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삼손이 사자를 죽인 것은 여호와와 연관이 있습니다. 즉 날 때부터 힘이 센 삼손이 사자를 죽였다는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삼손을 내세워서 사자를 죽인 사건을 일으키신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는 것은 곧 여호와가 개입된 사건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사자를 만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사자와 같은 존재는 누구입니까? 당연히 블레셋입니다. 블레셋은 힘이 센 강대국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의해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삼손이 사자를 죽인 사건은 하나님께서 삼손을 내세워서 블레셋을 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사자를 죽인 삼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삼손의 배후에서 사건을 일으키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삼손의 힘은 하나님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삼손에게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삼손의 힘의 근원은 하나님이지 삼손의 육체가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즉 삼손의 육체는 믿음의 대상이 전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힘있는 삼손을 믿을 것이 아니라 삼손에게 힘을 주시고 삼손을 쓰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면 '다 안다'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당연한 말을 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당연한 것에 순종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태반입니다. 보이는 것을 믿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하면 '당연한 말이다'고 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것을 더 의지하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인간이기에 삼손이 부모에게 사자를 죽인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은 현명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삼손이 사자를 죽인 것은 부모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자랑스럽고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입을 다문 것은 삼손의 부모가 삼손이 사자를 죽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삼손 자신을 바라보고 의지할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힘있는 삼손을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영웅으로 여기고 그를 높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아람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이 자신의 문둥병을 고쳐준 엘리사에게 예물을 줄려고 하자 엘리사가 그것을 결코 받지 않은 의도와도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나아만으로부터 예물을 받지 않은 것은, 만약 자신이 예물을 받게 되면 문둥병을 고침 받은 것은 오직 여호와의 사랑과 긍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엘리사 자신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이라는 오해를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아만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만 감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물을 받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만을 높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 예로 바울이 나면서 앉은뱅이된 사람을 고쳤을 때 무리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며 무리 가운데로 뛰어 들어서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행 14:15)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사도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높이고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도를 세우신 것은 사도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바라보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인데 사람들은 정작 복음을 드러내고 전하는 사람을 의지하는 어리석음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문을 생각한다면 삼손 역시 부모가 하나님이 아닌 자식의 힘을 의지할 것을 염려해서 사자를 죽인 사건을 말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8,9절을 보면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가더니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행하며 먹고 그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취하였다고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삼손이 사자를 죽인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여자를 취하기 위해서 딤나로 내려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딤나로 가는 길에 자신이 죽인 사자의 주검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죽은 사자의 몸에서 벌 떼와 꿀을 발견합니다. 죽은 사자의 몸에 벌이 집을 지은 것으로 볼 때 아마 죽은 사자의 몸이 바싹 마른 상태가 아니었는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썩고 있는 시체에 벌이 집을 짓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사실 여부를 판단하고 밝히는 것이 성경을 대하는 목적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죽은 사자의 몸에 벌이 집을 지을 수가 있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삼손이 죽은 사자의 몸에서 꿀을 얻고 그것을 부모에게 갖다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삼손은 죽은 사자의 몸에서 꿀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 덕분에 주어진 것입니까? 만약 삼손이 자신의 힘으로 사자를 죽인 것이라면 꿀은 삼손의 힘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한 대로 삼손의 힘이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꿀은 여호와로 인해서 얻은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하나님께서 강한 블레셋을 물리치시고 그 대가로 이스라엘에 꿀이 주어진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삼손을 통해서 미리 드러내신 사건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삼손의 부모가 꿀을 먹게 된 것은 하나님이 삼손을 그 가정에 보내셨기 때문에 되어진 일입니다. 즉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꿀을 먹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셨기 때문에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이란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 자체를 두고 한 말이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힘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블레셋에 의해서 고통을 받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자신들을 구원하는 능력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이지 삼손의 힘이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삼손의 능력을 말하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곧 능력인 것입니다.

삼손이 사자를 만나고 그 사자를 죽이게 되고 사자의 몸에서 꿀을 얻게 된 본문의 얘기는 삼손의 능력을 보여주는 내용이 아니라 장차 이스라엘에 나타날 하나님의 능력을 삼손을 통해서 미리 암시하는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등의 말씀들은 결국 우리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을 말하기보다는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증거물로서 주어진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힘을 의미하는 차원에서의 능력은 믿지 않는 자들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오히려 믿지 않는 자들이 그런 능력에 있어서는 믿는 자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많은 교회가 능력을 가르칠 때 자기의 일을 이룰 수 있는 차원에서의 물리적인 힘을 능력으로 말하면서, 그 능력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성경과는 상관이 없는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의 능력은 자기의 뜻과 자기의 일을 이루기 위한 힘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의 능력은 자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실 것이고, 따라서 능력은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인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믿음을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서 마음만 먹으면 삼손처럼 사자도 죽일 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대해서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삼손의 부모가 꿀을 먹게 된 것은 자기의 덕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삼손의 덕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자기의 힘으로 일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일을 이루기 위해서 힘을 달라고 하나님에게 애원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보내신 제삼자가 모든 일을 이루고 우리는 그 덕분으로 은총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인해서 주어진 은총에 감사하고 그분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그분을 믿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제삼자의 공로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을 우리의 공로로 여긴다거나 능력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의지한다면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일은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뜻이 있기에 되어지는 것입니다. 삼손이 마노아의 집에 보내어진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에 되어진 일이고, 삼손이 사자를 만나고 사자를 죽이게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에 되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자라면, 그것도 역시 여러분 한 개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세워서 뭔가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성령에 붙들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성령에 붙들렸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하고자 하시는 뜻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신자는 삼손이 부모에게 사자를 죽 인 일을 얘기하지 않는 것처럼,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바라보게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 삼갈 것은 삼가고 감출 것은 감추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삼손의 부모의 입장에 있습니다. 세상은 자기들의 힘으로 꿀을 얻어 살려고 하지만, 그리고 꿀을 얻을 수 있는 힘을 스스로 만들려고 애를 쓰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스스로 꿀을 얻어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제삼자에 의해서 얻어진 꿀을 먹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사자를 죽여서 꿀을 얻을 수 있는 힘을 원하지 마시고, 제삼자가 사자를 죽임으로 인해서 주어진 꿀을 먹고 살아가게 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에게서만 보여지는 믿음이며, 그 믿음에서 보여지는 것은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이 뜻에 복종하고 살아가는 능력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