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2:6-10 다른 세대

세상은 사람을 세대로 구분을 합니다. 세대란 단순히 나이를 기준으로 해서 청년과 장년 등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통할 수 없는 단절된 관계를 말합니다. 생각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릅니다. 그래서 서로의 교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세대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각기 다른 세대 차이가 등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절에 보면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다른 세대라는 말이 나옵니다. 세대가 둘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을 모두 본 세대입니다. 이들은 여호수아와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입니다. 7절에 보면 이들을 가리켜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라고 말합니다. 결국 본문에서 말하는 세대의 구분은 나이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신 일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구분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행하신 일을 아는 자들과 알지 못하는 자들의 생각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대간에 단절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한 세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무엇이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고 필요가 되는가?'를 따질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세대의 시각입니다.

반면에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아는 세대는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이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하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호와를 아는 세대와 모르는 세대는 서로 교통할 수 없는 단절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고 바알들을 섬겼다는 것은 여호와를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버렸다는 것은 자신들의 종교를 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조상들이 알던 그 여호와를 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제 너희는 내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은 어린양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희생으로 살아난 사람들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제부터 너희는 내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아는 세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나는 여호와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기 때문에 자신들의 인생은 여호와의 손에 달렸음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아는 세대의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세대는 자신들이 가나안 땅을 밟고 살아가고 있는 그 근거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여호와가 조상에게 약속하신 그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잊어버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은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사건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구출하심으로서 오늘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어둠의 세상에서 구출하셨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고 건너게 하심으로서 세상에 대해 죽고 새롭게 태어난 자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땅으로 들여보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아는 신자라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모른다면 십자가가 귀하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차원에서 끝나버리고 실제 삶에서는 십자가보다는 세상에서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더 가치 있고 존귀하게 여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에게 믿을만한 조건이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게 믿을만한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구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죽으셨습니까? 인간들에게 붙들려서 가장 힘없는 모습으로 대항한번 하지 못하고 죽으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세상에서 선행을 많이 베푸셨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삶을 사셨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남을 위해 희생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랑이 많고 겸손하신 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예수님의 삶을 두고 본다면 세상으로부터 존경받고 섬김을 받을만한 일을 하신 적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나신 한경직 목사님이 온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예수님에게 세상이 존경하고 섬길만한 조건이 있었다면 그러한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누구로부터 존경을 받고 섬김을 받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아는 자들에게서 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이 주어진 사람들, 그들에게서 섬김을 받으십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고 경외하지도 섬기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모르는 사람들이 섬기고 경외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것들입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안되는 것은 철저히 거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희생이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된다면 십자가를 말하면서 믿는다고 하겠지만, 예수님의 희생을 말하고 십자가를 따라가는 것이 오히려 손해가 되는 것이라면 오직 예수님 홀로 십자가에서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십자가에서 멀리 떨어진 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에 대해서 박수만 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이 부활절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찬양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 역시 기독교이기 때문에, 교회이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차원에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기에 앞서서 '나는 과연 예수님을 아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아는가를 자신에게 되물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아는 신자라면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활을 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대는 여호와의 일이 성취됨으로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아는가 모르는가로 구분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안다면 그분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삶의 전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교회가 교회를 중요하게 여기고 교회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이해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까지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비해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임을 아는 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중요하게 여기고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한 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 생각에는 자신들도 철저하게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를 위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게 여깁니다.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교회 부흥을 위해서 전도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신앙생활한 사람에게 하늘에서 큰상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교회도 그리스도에 비하면 가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교회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하늘에서 상의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 이해가 되겠습니까?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절입니다. 생각과 사고방식의 단절입니다.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아느냐 모르느냐, 이것이 도저히 이어질 수 없는 단절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뭔가 해주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우리들에게 뭔가 해주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크게 되는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고 세상일이 잘되는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때문이고 대학에 합격하고 취직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과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자체가 우리의 성공으로 교회 부흥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그런 것이라면 성공하지 못하고 취직도 못하고 대학도 떨어진 사람들은 은혜와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은 날마다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너를 죄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와야 했고 너희들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했다. 이것에 내가 너희에게 준 은혜이고 사랑인데 너희는 이 은혜와 사랑을 아느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까울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부활은 죽어도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부활의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이 은혜와 사랑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그는 바로 여호수아와 같은 세대의 사람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알았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알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초월해서 같은 사고방식 아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리며 못박혀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좋다고 생각되십니까? 차라리 불교의 부처처럼 연꽃 위에서 인자한 미소를 띄고 있는 그 모습이 더 보기에 좋지 않습니까? 하지만 피흘리며 못박혀 있는 주님의 그 십자가에는 우리의 죽음과 생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신 자리이고,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담당하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인자한 미소를 띄고 있는 부처가 앉은 화려한 연꽃에 나의 죽음과 생명이 담겨 있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안다면 그 사람에게는 주님이 전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전부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이 전부라는 것을 삶을 통해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은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나에게는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주님이 인생의 전부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주님이 전부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행한 일을 아는 신자가 살아가는 부활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한 다른 세대의 삶은 자신의 삶에 유익 되고 필요한 것을 향해서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단절되어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세대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갑니까? 여호와를 섬겼던 여호수아 세대입니까 아니면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고 다른 신을 섬겼던 다른 세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