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4:10-14 삼손의 수수께끼

세상의 인간 관계는 강자와 약자라는 구조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인간관계만 강자와 약자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관계도 강자와 약자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굳이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 먹이사슬이라는 관계가 아니라 해도 같은 집단에서도 강자와 약자는 뚜렷하게 존재합니다.

강자는 먹는 자, 약자는 먹히는 자입니다. 강자는 지배하는 자, 약자는 지배받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힘없는 약자는 항상 강자에 의해서 빼앗기는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약자가 강자에게서 뭔가를 얻어낸다면 그것은 이미 강자가 강자의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자 스스로 강자를 이길 수는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약자를 대신해서 강자를 패배시켰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러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삼손의 이야기 중의 하나인 수수께끼 사건입니다. 수수께끼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이렇습니다. 10절에 "삼손의 아비가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배설하였으니 소년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는 말씀을 보면 삼손의 아비와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서 결혼을 위한 잔치를 배설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풍속이었음을 언급한 것을 보면 아마 블레셋 사람들은 신랑이 신부집에 와서 결혼 잔치를 했던 것 같습니다.

결혼 잔치에 블레셋 사람들이 30명의 젊은 사람들을 청해서 삼손의 친구가 되게 합니다. 이런 가운데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게 된 것입니다.

12,13절에 보면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하리니 잔치하는 칠 일 동안에 너희가 능히 그것을 풀어서 내게 고하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그러나 그것을 능히 내게 고하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지니라 그들이 이르되 너는 수수께끼를 하여 우리로 듣게 하라"고 말합니다. 즉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걸고 내기를 합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은 주저 없이 삼손의 내기를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삼손의 수수께끼를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내용을 보면서 삼손의 수수께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 먼저 생각할 것은, 왜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삼손의 수수께끼를 말씀하고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과 수수께끼를 가지고 내기를 거는 것이 다만 잔치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겠습니까? 아니면 수수께끼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베옷 삼십과 겉옷 삼십을 벌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까요?

우리는 삼손이 누구인가를 잘압니다. 삼손은 자연스런 부부관계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식이 없는 집안에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삼손입니다.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삼손이라면 삼손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과 연관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던 삼손과 사자의 사건도 역시 같습니다. 삼손이 사자를 만난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켜진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삼손이 사자를 이긴 것도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라는 말씀이었음을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수께끼 사건도 역시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시는 계시의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란 시대와 환경과 문화와 문명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과 문화와 문명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나타나는 것이 계시인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어떤 문화와 문명에서도 동일하게 계시로서 적용됩니다. 비록 성경이 기록된 시대와 상황과 문명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성경에서 그때와 동일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비밀이요 신비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본문의 수수께끼를 단순히 삼손과 블레셋 사람들의 내기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그때 그 상황에 있는 블레셋 사람으로 생각해 봅시다. 지금 우리가 삼손에 의해서 그때의 수수께끼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 본문을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왜 삼손을 통해서 그러한 수수께끼를 내는 것입니까? 과연 삼손의 수수께끼에는 어떠한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겠습니까?

삼손의 수수께끼는 세상의 그 어떤 지혜를 동원해도 풀 수 없는 것입니다.

14절에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그들이 삼 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는 이것이 삼손이 낸 수수께끼입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 이것이 뭐냐는 것입니다. 사실 문제의 배경을 알고 보면 황당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삼손이 딤나의 포도원에서 사자를 죽이고 그 몸에서 꿀을 얻은 사건을 배경으로 한 문제입니다. 즉 삼손 자신의 체험을 문제로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수수께끼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손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모르는 블레셋 사람들로서는 삼손의 수수께끼를 푼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세상 그 어떤 지혜를 다 동원해도 풀 수가 없습니다. 세상 법칙에 따른 문제가 아니고 인간의 지식과 상식에서 나온 문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한 대로 사자를 죽인 삼손의 체험은 하나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손만이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삼손의 수수께끼는 삼손과 같은 체험을 하지 않고서는 풀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을 통해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삼손의 수수께끼에 대해서 어렵다는 생각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수수께끼는 문제의 답을 맞추라는 의미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만약 문제의 답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면, 본문은 계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성경을 보면 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답을 계시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블레셋 사람들도 결국 삼손의 아내를 이용해서 답을 알아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수수께끼의 답을 알았다고 해서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답은 알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수수께끼에 담겨 있는 의미는 알지 못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블레셋 사람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수수께끼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하는 것이 오늘의 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삼손의 수수께끼에서 '답은 사자와 꿀이다'는 것으로 끝난다면 우리 역시 답을 알았으나 하나님은 알지 못한 블레셋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수수께끼의 답이 사자와 꿀이라는 것이 오늘 우리 자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문제의 답은 사자와 꿀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현실이 어떤가가 수수께끼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이스라엘이 그 어떤 강한 존재에 붙들려 있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과연 수수께끼는 우리들의 어떤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지난 주일에 제가 여러분에게 "당시 이스라엘에게 사자와 같은 강한 존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붙들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강한 사자와 존재는 블레셋입니다. 그 강한 존재를 여호와의 신에 감동한 삼손이 죽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진심으로 강한 존재는 블레셋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는 블레셋이 강한 존재가 아니라 그 블레셋을 이기시는 하나님이 진심으로 강한 존재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강하심으로 인해서 꿀을 얻어먹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삼손과 사자 사건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손은 바로 이러한 사건의 의미를 아는 자로서 수수께끼를 내는 것입니다. 즉 너희가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다고 해서 너희가 강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강한 분이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너희가 망하고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산다는 것을 암시하는 수수께끼인 것입니다.

이것을 삼손의 수수께끼 문제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문제는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보면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온다는 것과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는 것으로 구분됩니다. 즉 동일한 의미의 구절이 반복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먹는 자와 강한 자가 같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고, 먹는 것과 단 것도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삼손의 체험에서 강한 자는 사자로 등장하지만 이스라엘의 상황에서는 블레셋입니다.

그런데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습니다. 즉 삼손이 사자에게서 꿀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이것이 가능하려면 사자가 죽어야 합니다. 죽은 몸에서 꿀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온다는 것은 강한 자가 패배한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는 것도 역시 강한 자가 패배했을 때의 결과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수수께끼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전해졌다는 것은 그들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고, 승리자는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의 현실을 담고 있는 수수께끼였습니다. 블레셋에게 붙들려 있는 이스라엘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현실에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진심으로 강한 자는 그들을 붙들고 있는 블레셋이 아니라 곧 하나님이심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자신들이 강한자인줄로 알고 살아갑니다. 자기 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삼손의 배후에 강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보고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자신들을 붙들고 있는 블레셋을 강한 존재로 보고 살아갑니다. 즉 이스라엘이나 블레셋이나 같은 수준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었는데 이스라엘은 다만 블레셋만을 보고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현실 역시 어떤 강한 존재에게 붙들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삼손의 수수께끼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던 강한 자가 누구인가를 물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자신을 붙들고 있는 강한 존재가 누구인가?'를 묻겠습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강한 자입니까? 여러분을 붙들고 있는 존재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은 여러분보다 더 강한 자가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회사의 상사입니까? 아니면 권력이 있는 자입니까? 여러분 자신이 누구에게 매어 있는가를 알려면 여러분의 행동에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고 움직여지는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람의 행동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움직입니다. 행동의 모든 기준이 자기 이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체면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것도 역시 자신에게 매어있기 때문입니다. 상사에게 굴복하는 것도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득이 되기 때문에 싫으면서도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매어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강한 자가 바로 자기 자신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강한 자란 바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도록 하는 사고방식의 주인입니다. 그가 바로 사단입니다. 수차에 말씀을 드렸지만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고자 한 마음이 든 것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하는 사단의 유혹 때문입니다. 하나님같이 된다는 것이 곧 자신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의 유혹에 빠진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곧 사단에게 붙들려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사단에게 붙들려 있고 사단이 강한 자인 것입니다.

수요일에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면서 세상의 현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를 위해서 살도록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피조물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라고 합니다. 결국 사단의 지배를 받은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우리를 붙드신 강한 분은 바로 하나님임을 말합니다. 이것을 이해한 자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진심으로 강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같습니다. 지금 이 시간 삼손의 수수께끼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강하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를 붙들고 있는 강한 자가 패배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보고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지 그 어떤 것도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삶은 진심으로 강하신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저 나보다 돈있고 권력있으면 강한자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에게 잘보여서 득을 보려고 합니다. 자신에게 득이 되는 길을 가려다 보니까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에 눈을 돌리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마치 블레셋 사람들과 같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새로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곧 마귀에게 승리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출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고방식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를 원하는 사고방식으로 바뀐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성령이 임한 자들이며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된 자는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에 대해서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이익과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곧 마귀의 사고방식임을 순간순간 깨닫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마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나를 건지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삼손의 수수께끼입니다.

우리의 구출은 그리스도로 이루어졌습니다. 가장 약하게 보이신 분이 가장 강하신 분으로 증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할 분은 죄악 가운데 있고 실패한 우리를 위해서 피흘리신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강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를 강하신 분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수수께끼가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이 나를 강하게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사는 사람은 삼손의 수수께끼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보이지 않는 나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살아가는 새로운 나라를 말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