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4:15-20 삼손과 그의 아내

지난 시간에 삼손의 수수께끼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배후에는 강한 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세상은 배후에 존재하는 강한 자의 실체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강한 존재에 대해서 믿지를 않으며 모든 문제를 단순히 인간들만의 문제로 여기고 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잘하면 세상은 살기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성경의 처음부터 사단이라는 강한 자가 등장을 합니다. 이 강한 자에 의해서 인간은 무너지며 결국 강한 자에 붙들린 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세상의 실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러한 세상의 실체에 대해서 배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강한 실체에 대해서 잊어버린 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붙들고 있는 강한 존재와의 싸움을 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항상 자신의 삶이 어디에 순종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즉 눈앞의 자신의 생활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모습에서 과연 보여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삶에서 강한 존재로서 세상의 배후에 있는 사단의 사고방식이 보여지는지 아니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고 자기 백성을 구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함이 보여지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사단이란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사단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 채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단을 생각하지 않은 채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필시 사단적인 것을 신앙으로 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오인하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단이란 존재가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고 무엇으로 시험하는지를 알아야 사단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오인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필히 사단이란 존재에 대해서 눈이 밝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이란 존재에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사단의 존재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단이 세상을 무엇으로 유혹하고 지배하는가에 대해서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무관심하지 않는 사단이라는 강한 실체에 대해서 정작 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무관심해 버린다면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잘못된 신앙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배후에서 세상을 다스리고 붙들고 있는 사단의 실체는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이점에 대해서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지난주의 말씀과 계속 이어집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걸고 수수께끼로 내기를 합니다. 결혼 잔치를 하는 칠일 내에 문제를 맞춰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수수께끼는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문제이기 때문에 누구도 맞출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블레셋 사람들이 수수께끼의 답을 알 수 없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삼손의 체험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현실이 무엇이며 세상의 현실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삼손에 의해서 수수께끼라는 형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수께끼를 알 수 있는 자는 삼손과 같은 이해를 가진 자에 한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다만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블레셋은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강한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온다는 것이 결국 강한 자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인 줄 그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진실로 강한 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결국 답을 알 수 없는 블레셋 사람들은 수수께끼에 질 것을 염려해서 답을 알아내기 위해 삼손의 아내를 이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15절에 보면 "제 칠 일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로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라고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기 위해서 삼손의 아내더러 삼손을 꾀어서 답을 알아내도록 지시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합니다. 협박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극히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불레셋은 삼손에게 자신들의 것(베옷 삼십 벌, 겉옷 삼십 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삼손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삼손의 아내를 이용하게 되고, 그를 자신들의 뜻대로 이용하기 위해서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겠다'는 협박을 동원을 한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협박에 삼손의 아내는 결국 삼손에게 답을 알아내기 위해서 힘을 쓰게 됩니다. 16,17절에 보면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가로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풀어 이르지 아니하도다 삼손이 그에게 대답하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풀어 고하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풀어 이르리요 하였으나 칠 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앞에서 울며 강박함을 인하여 제 칠 일에는 그가 그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 이르매 그 아내가 그것을 그 민족에게 고하였더라"고 합니다.

삼손의 아내는 삼손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면서 울며 삼손을 조릅니다. 결국 삼손은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서 알려주고 삼손의 아내는 그 답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려주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이 자기 아내에게 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부모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답을 아내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떤 시각에서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삼손이 자기 아내가 울고 조른다고 해서 답을 알려주는 실패를 범했으니까 신자된 자는 여자에게 약해지면 안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창세기에서 여자가 뱀의 꾐에 빠져서 선악과를 먹고 남자에게도 먹게 한 것처럼 여자가 블레셋 사람의 협박에 의해서 삼손에게 답을 알아내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에게 알려줬으니까 역시 언제나 여자가 큰 문제라는 문제점을 이끌어 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까? 그러나 제가 볼 때 그러한 문제들은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삼손의 아내의 배후에 누가 존재하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블레셋입니다. 블레셋이란 강한 존재가 힘으로 여자를 협박을 합니다. '너와 아비의 집을 불사르겠다'는 것이 여자로 하여금 삼손을 배신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즉 삼손의 아내는 남편인 삼손보다는 자기 혈족을 지키고자 한 열망이 더 강했던 것입니다. 결국 블레셋이 여자를 이용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이 혈족이었고, 삼손의 아내는 혈족을 지키기 위해서 남편을 배신했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현실입니까? 삼손의 아내를 신랑을 섬기는 신부라는 입장에서 볼 때 오늘날 신자를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섬기는 신부의 위치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삼손의 아내를 통해서 드러나는 우리의 현실적인 모습은 그리스도를 섬기기보다는 세상의 혈족을 지키기 위해서 오히려 그리스도를 섬기기를 멀리하고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삼손의 아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삼손이 자기 아내를 대하는 모습입니다.

삼손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울며 매달리는 아내에게 견디지를 못하고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려주게 됩니다. 결국 삼손 역시 자기 부모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답을 아내에게 알려준 것을 통해서 보여준 우리의 모습은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아내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얘기는 우리에게 '우리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살아가는가?'를 묻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여러분의 혈족조차 뛰어넘어서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아내보다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신랑보다, 하나님보다 자기 혈족과 아내를 사랑함으로 인해서 실패를 가져온 인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임을 볼 때 사단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이용하는 도구는 바로 우리 자신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핏줄이며 아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끊어버리기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혈족이며 처자식이라는 관계입니다. 나와 연관이 되어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끊어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그러한 인간관계를 끊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부모 사랑, 형제 사랑, 아내 사랑이 무엇을 바탕으로 한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37절에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말씀은 부모를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처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러한 사랑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선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에서 발산되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되 그 마음은 그리스도에게 치우쳐 있어야 하고, 처자식을 사랑하되 역시 그 마음은 그리스도에게 치우쳐 있어야 하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신자로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엇엔가 사랑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이 이미 다른 존재를 향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세상이며 세상 안에서 부모나 처자식이라는 혈족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혈족을 사랑하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혈족이 요구하는 것과 그리스께서 요구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혈족은 혈족을 위해서 살아줄 것을 원합니다. 즉 부모는 자식에게 부모를 위해서 살아줄 것을 원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자기를 위해 줄 것을 원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를 사랑해 줄 것을 원합니다. 어느쪽 하나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갈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라'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 때문이라 할지라도 조금이라도 자신에 대해서 소홀해진다면 투덜대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원망을 해댑니다. 이러한 혈족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필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외면해야 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혈족에 대한 사랑이 외면되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블레셋은 삼손의 아내에게 아비 집을 불사른다는 말로서 협박을 합니다. 즉 세상에 있는 자신과 연관된 핏줄에 대한 애착심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한 자가 인간을 어떻게 이용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단이 무엇으로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에 있는 것에 대한 애착심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혈족이든 처자식이든 아니면 돈이든 상관없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것에 대한 애착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누구든 자기 것에 대해 애착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자신의 상실이기 때문에 자기 것을 보호하고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애착심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보다는 애착심이 더 강하기 때문에 결국 신랑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외면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고 그리스도를 찾는 것은 결국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삼손의 아내처럼 말입니다.

삼손의 아내는 삼손에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답을 알아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이런 모습이 마치 어떤 신자가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과 원망을 쏟아내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 사랑이고 나를 기쁘게 해줘야 사랑인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 곧 그 배경에 강한 자, 사단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단이란 존재를 의식을 하고 살아간다면 사단이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지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단이 무엇을 위해서 일하겠습니까? 사단이 일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존재를 우리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것을 세움으로서 자연히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증거 됩니다. 그 무엇이 자신에게 득이 되고 편함을 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원하지 않는 것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자기의 유익과 편함을 위해서 그리고 세상 것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말씀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되어진다면 그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거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너무 강한 애착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세워진 것에 대해서 우리는 애착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강한 애착심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우선 내 혈족 처자식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들입니다. 자식이 대학을 들어가지 못했을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내 자식이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안타까움과 대학에 떨어진 자식에 대한 애착이 우선되어서 나타나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 것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이라는 말을 하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것이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는 우리들의 현재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현실에서 떠나지 못한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18절에 보면 "제 칠 일 해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삼손은 블레셋이 수수께끼의 해답을 알게 된 것은 자기 아내를 통해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수수께끼의 답은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고, 자신이 그 답을 말한 사람은 자기 아내 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아내를 이용해서 답을 알아낸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면'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아내의 배후에 블레셋이 있었음을 간파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답이 발설된 뒤입니다. 결국 삼손은 자신의 아내가 울면서 답을 알려달라고 조를 때 그 배후에 누가 있었는가를 발견하지 못한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신자로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사단의 일입니다. 사단은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가만 두고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십자가에 마음을 두려고 하게 될 때 사단은 신자로 하여금 세상에 애착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 앞에 혈족이나 처자식 그리고 세상의 많은 것들을 세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자는 가족들에게 함께 십자가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라고 가르칩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만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희망이고 멸망에서 벗어나 영생으로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사단과 싸우는 삶입니다.

누구를 사랑하려거든 여러분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하지말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사랑, 즉 인간의 사랑은 애착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것에 대한 사랑이며 애착입니다. 애착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삶에서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세상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여러분을 생명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세상의 배후에 있는 존재를 잊지 마시고 살아가십시오. 무엇이 사단에 붙들린 모습인가를 생각하시면서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붙들린 자로서의 증거를 보여주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