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5:1-8 삼손의 복수

"A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집안이 매우 가난해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어릴 적부터 남의 집일을 도와주면서 받은 돈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A라는 사람은 평소 B라는 같은 또래의 이웃집 아이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A는 장차 돈을 많이 벌어서 B에게 복수를 하기로 다짐합니다. 그리고 결국 A는 성공을 하게 되고 힘있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A는 그 힘으로서 B를 몰락을 시킵니다."

위의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드라마와 같은 내용을 간단하게 적어 본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복수극'이라는 것은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고의로 피해를 입히고 또는 자신이 힘이 없을 때 무시하고 천대를 했다거나 한 자에 대한 복수는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상황설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만약 그런 내용의 드라마를 봤다고 할 때 분명 A아니면 B의 편을 들게 될 것입니다. 아주머니들이 서로 모였을 때도 인기 있는 드라마의 내용으로 얘기꽃을 피우면서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다는 자기 판단을 서로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위의 내용으로 전개되는 드라마를 봤다고 할 때 과연 어떤 판단을 하겠습니까? 성공을 해서 B에게 복수를 하는 A가 잘못했다고 여겨집니까 아니면 애초 B가 A를 무시하고 멸시했으니 A의 행동 은 당연하다고 여겨집니까?

하긴 드라마에서 A에 대한 무시와 멸시가 극에 달한 내용을 봤을 때 자연히 A에 대한 동정심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그 동정심은 A의 행동에 대한 정당함을 이끌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대로 된 판단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동정심이라는 것이 인간의 판단을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단지 'A라는 사람이 무시를 당했고 결국 복수를 했다'는 글을 통해서 과연 A가 잘못했는가를 물을 때 여러분은 어떤 판단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판단은 참으로 애매합니다. 물론 복수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당초 A에게 복수의 마음을 심어준 것은 B입니다. 결국 B는 인과응보를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A로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판단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때로 어떤 일에 있어서 잘잘못을 판단해야 할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가를 판단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 말을 들어보면 그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어 보면 또 그것이 옳은 것 같을 때 과연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 대개 누가 잘했다는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둘 다 이해가 된다는 말을 함으로서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화해를 하도록 종용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연루된 일이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이미 마음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그의 편을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이 있는 사람이 연루된 경우에도 자연히 힘있는 자의 편을 들어서 그가 옳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처럼 제삼자의 입장에서 잘잘못을 판단해야 할 상황에 처할 수가 있고, 아니면 우리 자신이 누군가와 감정의 대립이 생기고 마음 속으로 복수를 다짐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아는 것이 참으로 필요할 것입니다.

앞서 얘기한 A의 경우에도 우리가 만약 그 일에 대한 판단자라면 우리의 생각이나 도덕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는가를 묻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렇게 보신다"는 것이 문제의 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에 비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판할 만큼 정당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판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문제에서든 우리의 생각으로 판단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이 일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묻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A라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판단을 하실까요? 그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삼손이 블레셋을 친 사건의 내용입니다. 수수께끼의 사건이 있은 후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다시 여인의 집을 찾아가서 아내를 보고자 합니다.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간 것은 삼손이 아내와 화해하고 다시 동거하기를 원하는 마음의 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삼손은 아내와 함께 살기를 원해서 찾아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인이 삼손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그리고 "가로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로 내가 생각한 고로 그를 네 동무에게 주었노라 그 동생이 그보다 더욱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의 대신에 이를 취하라"(2절)고 말합니다.

즉 삼손의 장인은 삼손이 아내를 미워하는 줄을 알고 그 아내를 삼손의 동무, 다시 말해서 결혼 잔치에 동무로 소개받았던 30명의 블레셋인 중 한명에게 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의 동생이 더욱 아름다우니 그를 아내 대신 삼손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블레셋 사람들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자 그들은 삼손의 아내를 이용합니다. 삼손의 아내는 울면서 애원을 하게 되고 결국 삼손은 답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답을 알게 되고 삼손은 내기에 져서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죽이고 옷을 노략해서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해서 아비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삼손이 장인은 삼손은 노해서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다시는 아내를 찾으러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과의 친분을 위해서 삼손의 아내, 즉 자기 딸을 30명 중 하나에게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삼손이 다시 아내를 찾아왔을 때는 이미 그 아내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장인은 대신 아내의 동생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장인에 대해서 화가 난 삼손은 블레셋 사람을 치게 된 것입니다.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와 홰를 이용해서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감람원을 모두 불살라 버립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러한 삼손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보십니까? '삼손이 블레셋을 치게 된 것은 삼손의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줘버렸기 때문이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서 삼손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여겨집니까? 만약 삼손의 행동이 정당하다면 그것은 결국 인간의 복수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에게 손해를 입힌 자에 대해서 복수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으로 답이 내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삼손이 블레셋을 친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곡식과 감람원을 태워버리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와 그의 아비, 즉 삼손의 장인을 불살라 버립니다.

"블레셋 사람이 가로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혹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취하여 그 동무 되었던 자에게 준 연고니라 블레셋 사람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비를 불사르니라"(6절) 이것이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한 복수극입니다. 그렇다면 삼손에게 복수한 블레셋 사람들의 행동은 정당한 것입니까 잘못된 것입니까?

삼손이 블레셋을 친 것이 정당하다면 결국 블레셋이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죽인 복수 역시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애당초 블레셋이 삼손의 아내를 이용해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당초 일은 수수께끼를 낸 삼손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수수께끼는 하나님이 강하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코 삼손의 자존심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수수께끼를 결국 자기 자존심의 문제로 연결짓습니다. 내기에 졌다는 것, 더구나 그들이 자기 아내를 이용해서 답을 알아냈다는 것에 진노한 것입니다. 그 진노를 아스글론의 사람을 쳐서 그 옷을 블레셋인에게 줌으로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문제는 삼손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블레셋의 복수가 정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삼손인가 블레셋인가? 를 물을 때 누구의 잘못으로 답을 내려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답을 제대로 아는 것이 우리가 신자로서 제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삼손이나 블레셋사람들처럼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고 나에게 해를 끼친 자에 대해서는 복수를 마음먹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손이나 블레셋의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삼손과 블레셋 사람들의 대립이 바로 오늘 우리가 서로 대립하고 살아가는 인간관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수는 그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우린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7,8절을 보면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은 후에야 말리라 하고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거하니라"고 말합니다. 삼손은 자신의 아내와 장인을 죽인 블레셋 사람에게 또 다시 복수를 합니다. 그리고 9절부터의 말씀에서도 또 다시 삼손에 대해서 복수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복수는 그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성을 가지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이 단순히 '복수하지 말라'는 도덕적인 교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나실인으로 태어난 삼손이 과연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택받아 태어난 삼손이 무엇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었기에 본문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삼손은 블레셋을 치기에 앞서서 '내가 블레셋을 쳐도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삼손이 블레셋을 치게 된 이유는 모두 블레셋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이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에 삼손이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니까 모든 책임은 블레셋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함으로서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린 흔히 '나를 더 이상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다시 말해서 원래는 나쁜 사람이 아닌데 너로 인해서 나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악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에게 전가시킴으로서 자신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의 심리는 어떻게든 자기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자신의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그 모든 원인을 제 삼자에게 전가시킴으로서 행동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는 결국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지로밖에 볼 수 없고 자신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인간의 악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악함은 창세기에 잘 나타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먹지 말라고 명한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담은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실과를 먹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실과를 먹은 것은 잘못이지만 먹게 된 이유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하게 한 여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자만 아니었으면 먹지 않았을 것이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와 역시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이 하와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고 물으시자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답합니다. 하와 역시 실과를 먹은 것은 잘못이지만 전적으로 내탓이 아니라 뱀 때문에 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자기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제 삼자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아마 하나님이 삼손에게 '왜 블레셋을 쳤느냐?'고 물으신다면 삼손은 블레셋을 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내세울지도 모릅니다. 블레셋이 자신으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하나님에게 이러한 변명을 일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잘못을 범했을 때 자신의 행동을 회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생각함으로서 스스로의 변명 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입장을 우선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삼손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입장과 자존심을 생각하는 가운데 블레셋을 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블레셋을 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삼손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볼 때 어쨌든 삼손이 블레셋을 친 것은 옳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블레셋을 쳤다는 것보다는 블레셋을 치고 있는 삼손의 마음인 것입니다.

삼손의 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힘입니다. 삼손이 포도원에서 만난 사자를 죽일 때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삼손의 힘이 삼손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힘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삼손은 그 힘으로 블레셋을 치기는 했지만 그 본래의 목적은 블레셋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이며 화풀이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삼손의 힘은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삼손을 선택하신 것이고 부르신 것이고 힘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손은 자신의 힘을 개인적인 분풀이에 허비할 수는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내기 위해서 힘을 쓰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을 내려본다면 삼손이 잘못인가 블레셋이 잘못인가라는 물음에서 잘못의 기준을 누구의 행동이 더 심했느냐로 따질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사실 삼손과 블레셋을 비교하면서 누가 잘못인가를 물을 수는 없습니다. 블레셋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으로서 그 자체가 이미 저주받을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멸망이라는 운명에 있는 블레셋을 두고 그들이 잘못했는가 잘했는가를 물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서 일어난 어떤 일을 두고 '누가 잘못했는가?'를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불신자는 이미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우리가 보기에 옳은 일을 했다고 해도 그들을 두고 '옳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려는 의도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물어야 합니까? 블레셋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삼손이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삼손은 분명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을 오직 자기 분풀이를 위해서,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 쓰고 있습니다. 결국 삼손 역시 블레셋과 같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삼손도 불신자다는 것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과연 삼손에게 블레셋을 칠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삼손 역시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삼손의 잘못은 하나님 앞에서 현재 자신이 어떻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블레셋을 칠 자격이 없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삼손은 현재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우리 소유로 여기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돈이든 권력이든 무엇이든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즉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내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힘으로 과시합니다. 우리의 사사로운 분풀이나 자존심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힘을 허비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것으로 여기기에 복수가 나오고 화풀이가 나옵니다. 만약 우리가 주어진 것에 대해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일과 뜻을 위해서 주신 것임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타인을 괴롭히고 복수하는 도구로 사용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린 지금껏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삼손처럼 말입니다. 이런 우리가 누구를 칠 자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불신자를 칠 자격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어떤 자인가는 주님이 잘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그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정직한 모습입니다. 누구를 칠 자격이 없이 오히려 저주 아래 죽어 마땅한 자가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가 뭔가 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 재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잘한 것을 내세워서 남을 무시하고 자기를 과시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아는 자가 바로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말씀 드렸던 A와 B의 경우에 A를 신자라고 한다면 그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가 복수를 했다는 것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복수를 위해서 스스로 얻은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없는 불신자들의 생각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신자로서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이점을 항상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 어떤 것도 우리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린 우리의 소유가 하나님을 보여주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도구로 쓰여지기를 소망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산다면 분명 그는 자기의 힘을 가지고 개인적인 복수나 화풀이,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허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도 분명 힘이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께서는 힘을 내세워서 자신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희생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하셨습니다.

우린 우리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삽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정당하고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정당하시고 옳으신 분임을 증거 하라고 세워진 것이 우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