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5:9-13 유다의 두려움

여러분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기도할 때 말하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강하신 분이고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신자에게서 보여져야 할 당연한 모습은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자유자라는 것을 뜻합니다. 즉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자라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자로 산다면 그는 참으로 행복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자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유자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자유자란 하늘을 날아가는 풍선을 잡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자유자라고 말하면서도 자유자로 살아가지 못하고, 믿는 자라 말하면서도 믿는 자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곧 오늘 우리 자신들의 본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도하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의 믿음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고, 주일이면 만사 제쳐두고 꼬박꼬박 예배당을 찾아와서 예배드리는 자신을 보면서 자기 믿음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을 둘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고 싶어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로 신실하게 살고자 하는 소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을 원한다는 것으로 신자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으로 믿음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과연 자유자로 살아가는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는 자답게 세상의 힘에 매이지 않고 세상에 대해서는 자유자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힘과 힘은 상대적입니다. 강한 힘을 소유한 자는 상대적으로 약자에 대해서는 자유합니다. 반면에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는 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다면 그는 그 어떤 힘에도 매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분명 정상적인 믿음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때 과연 자유자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산다면 삶 역시 하나님 중심이며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는 삶이 되어지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신자된 자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가장 힘든 것은 마음과 삶의 일치입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삶은 항상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한두번이 아님을 다같이 경험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에게 매였다면 삶 역시 하나님에게 매여있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마음의 정직함입니다. 하지만 마음과 삶이 항상 일치되지 않고 그것이 결국 갈등으로 내면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볼 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마음에 따라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뭔가 다른 힘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과는 다른 행동과 삶이 수시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에 대해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고, 삶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 있어서 문제는 마음이 아니라 육신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소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마음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권세에 순종하는 것이 큰 문제인 것입니다.

로마서 7:25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마음과 육신이 섬기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원하는 바를 육신이 따라가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마음에는 하나님이 있으나 육신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마음과 육신이 서로 단절된 채 살아갑니다. 마음이 원하는 것과 육신이 따라가는 것이 서로 일치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 따로 몸 따로, 이것이 바로 사람의 실체이며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육신이 약하다'는 이 말을 앞세워서 육신의 약함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을 앞세워서 비록 육신은 약하지만 마음에는 하나님을 두고 있으니까 괜찮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단지 하나님을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고 은혜라면 그리고 그 마음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마음이라면 결코 마음이 육신에 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즉 육신이 마음이 추구하는 바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면 이미 그 마음은 육신에 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2-13)라는 말씀을 한 것입니다.

믿음은 싸움입니다. 육신에 지지 않기 위한 싸움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육신은 우리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뭔가의 힘에 붙들려서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에 진다는 것은 내 자신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권세에 지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복수의 열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봤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복수를 할 자격도 없고, 오히려 예수님에게로부터 복수를 받아야 할 우리가 누군가를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손해를 보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기회를 보다가 복수를 해줘야 직성이 풀립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으로 삼손 역시 블레셋에 대해서 마음껏 복수를 합니다. 장인이 자신의 아내를 블레셋 사람에게 줬다고 해서 블레셋 사람의 곡식과 감람원을 모조리 불살라 버립니다. 그리고 그 모든 원인을 블레셋 사람에게 돌립니다. 나는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린 이 말씀에서 우리가 곧 삼손처럼 살았던 것이 아닌가를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삼손의 복수로 인해서 삼손에게 위기가 닥친 내용입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자 이제는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잡기 위해서 유다에 진을 칩니다. 그러자 유다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자기들을 치고자 하는 이유를 묻게 되고 결국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들을 치려고 하는 것은 모두가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쳤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10절).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유다 사람들이 삼손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11절)고 삼손을 책망합니다.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에 위기가 닥친 이유를 삼손에게 돌립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만 건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다 사람은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삼손도 아니고 블레셋도 아니라 바로 유다 사람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동족이며 나실인으로 태어났고 사사인 삼손을 자신들의 손으로 결박해서 원수인 블레셋 사람에게 넘겨주는 모습에서 우리 자신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다 사람은 분명 삼손에게 원한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즉 삼손과 블레셋처럼 복수를 하기 위해서 삼손을 넘겨준 것이 아니라 목숨을 위협하는 화근거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삼손을 넘겨 준 것입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삼손으로 인해서 블레셋 사람들의 보복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육신이 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삼손을 책망하기를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고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데 왜 그들에게 복수한다고 설쳐서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에게는 삼손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느냐가 관심이 아닙니다. 다만 삼손의 행동 때문에 자신들에게 위험이 닥쳤다는 것으로만 분노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유다 사람들과 같은 처세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의 처세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옳으냐 그르냐가 관심이 아니라 결과가 우리들에게 득이 되었느냐 해가 되었느냐로 선과 악을 판단해 버립니다. 분명 마음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판단되어진 대로 옳음에 육신이 순종하는 것이 두려움이 없이 사는 자유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믿는 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마음에 판단되어진 옳음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에 득이 되는 쪽으로 순종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자신에게 득이 된다는 이유로 잘못된 것을 선택하고, 해가 된다는 것으로 거부해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볼 때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했을 때 그들은 수시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애굽에 의해서 지배를 받다가 해방되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향해 가던 그들이었습니다. 즉 희망이 없는 해방이 아니라 희망이 있는 해방이었습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으로 간다는 그 희망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홍해를 앞에 두고 뒤에 애굽 군대가 추격하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를 애굽에 그냥 두지 않고 왜 이끌어 내서 여기서 죽게 하느냐?'고 모세를 원망했던 것입니다. 마실 물이 없을 때에도 원망하고, 애굽에서 먹던 것을 생각하며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디로 인도하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육신에 해가 전혀 없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솔직한 마음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모든 것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인 것을 압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신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때때로 자기 백성을 고난으로 인도하신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막상 고난이 닥쳤을 때 우리가 보이는 반응은 무엇입니까? 원망입니다. 이것이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유다는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삼손을 결박합니다. 아마 삼손이 블레셋에 복수한 것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이었다고 해도 그들은 삼손을 결박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사는 길은 블레셋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실감하십니까? 세상은 우리가 자유자로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힘의 고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자는 그만한 대가를 받게 됩니다. 힘이 약자에게 원하는 것은 굴복입니다. 굴복했을 때 그를 보호하고 지켜줍니다. 그러나 대항하면 결국 힘으로서 위협을 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힘의 눈치를 보면서 힘에 대항하지 않고 굴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처세인 것입니다. 이것을 꼭 부정 부패를 용납하지 말라는 의미로만 해석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현장에서도 힘의 눈치를 보는 모습은 얼마든지 보여집니다.

가령 교회에 돈 많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 등록을 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반깁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타나는 현상은 그가 말씀에 잘못된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그냥 덮어주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가 그의 잘못됨을 지적을 하려고 하면 목사를 말립니다. 그러다가 괜히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말을 듣지 않고 잘못된 것을 지적을 하고 부자가 그것 때문에 교회를 나가버렸다고 할 때 과연 교인들은 누가 잘못했다고 하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모든 원망과 잘못됨을 목사에게로 집중 될 것입니다. 부자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교회를 나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 자신을 생각해 봐도 그럴만한 용기가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이러한 모습은 교회에서 수시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힘에 매어 살아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유다가 자신들의 손으로 삼손을 붙들어 블레셋에 넘기는 것을 보면서 과연 우리 자신들이 우리들의 손으로 무엇을 붙들어서 사단에게 넘겨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들어서 사단에게 넘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스도도 보다는 육신의 편안함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참으로 자유자로 사신 분은 그리스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에도 매이지 않으시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권력에도 정치에도 매이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셨습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예수님을 위협하거나 붙들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육신은 흙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둡시다. 힘에 굴복하고 적당히 눈치를 보면서 처세한다면 육신에 편안함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신을 스스로 사망에 밀어 넣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로마서 8:6-8절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한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미 육신에 굴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한 자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들의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육신의 편안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지는 것이 곧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육신을 위한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을 위한 생각으로 산다면 우리가 무엇에 굴복하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한 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이 약함을 아셨기 때문에 시험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육신에 약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안다면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가 영의 생각으로 살지 못하고 육의 생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아닌 육신에 굴복하며 살아가는 것에 두려워해야 합니다.

무엇이 생명인가를 잊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생명을 원한다면 생명의 길이 무엇인가를 항상 마음에 두십시오. 그리고 육신이 생명의 길에 복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고자 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생명의 길에 북종하지 못하는 것을 더욱 두려워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