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5:14-20 엔학고레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비록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살려주시는 은혜가 있기에 살아가는 것이지 사람이 스스로 존재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몸에서 피가 돌고, 심장이 뛰고 호흡을 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들의 의지로 되어지는 것입니까? 우리들이 원하면 심장이 뛰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있고 온 몸을 도는 피를 멈출 수가 있는 것입니까? 심장은 스스로 뛰고 있는 것이지 우리의 의지로 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우리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자기 몸 안에 있는 작은 심장 하나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자랑합니다. 살려주시는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항상 스스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라면 가장 먼저 '하나님의 살려주시는 은혜'에 깊이 묵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살려주시는 은혜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소홀히 하면서도 감히 신자라고 말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살려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거부합니다. 살려주시는 은혜라는 말 자체가 인간의 힘과 능력을 너무 무시하는 것은 아니냐라고 반발합니다. 살려주시는 은혜란 하나님이 죽이시면 할 수 없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생과 사를 하나님에게 맡기고 산다는 것 자체를 인간으로서 너무 무능력한 삶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얻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그런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감사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수시로 인간의 힘으로 살아 보려고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내면에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악한 속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거부하는 마음이 없습니까?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한다면 지금 여러분이 처해 있는 어떤 형편과 환경에서도 하나님에게 감사함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형편과 처지 역시 살려주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여러분의 마음에는 내키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이 만드신 형편이라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고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살려주신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살려주시는 은혜에 거부하는 마음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참된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악한 속성은 항상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반발하게 만듭니다. 주어진 형편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더 나은 형편을 위해서 노력하고 애쓰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소망하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인간에게 세상을 소망하지 말라는 것은 참으로 힘든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희망을 끊어 버리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면서도 그리스도만을 소망하고 살라는 말이 들려지면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소망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반발하고 싶어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라는 말에 왜 반발이 되는 것입니까? 신자라면, 살려주시는 은혜로 살고 그리스도만을 소망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긴다면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을 소망하는 자신에 대해서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반발로서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라는 말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결국 세상에 대한 소망을 끊기 싫다는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지시니 자기 스스로 자신을 책임지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삶의 부분은 하나님에게 맡기고 인간은 하나님에게 영광돌리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제대로된 사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저 역시도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데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대로 된 삶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면서 하나님의 기쁨과 상관없이 우리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가가 발각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그처럼 악한 우리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변함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의 의나 행함을 자랑하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지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기를 힘쓰지 않겠습니까? 오늘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에 진을 치자 그 이유가 삼손 때문인 것을 안 유다 사람들이 삼손을 원망하고 결국 삼손을 붙들어서 블레셋 사람에게 넘기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이 말씀에는 블레셋이라는 힘에 굴복한 유다의 모습을 봤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살려주시는 은혜가 아니라 스스로 살아야겠다는 의지에 의해서 결국 자신들을 붙들고 있는 블레셋이라는 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힘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나실인으로 태어난 삼손까지 자기들의 손으로 붙들어서 블레셋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혹시 우리가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신 그리스도를 붙들어서 세상에 넘기는 것은 아닌가를 확인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만을 고집한다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라는 인간을 미워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새로운 삶의 사고방식, 그것을 거부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보이셨던 새로운 삶의 방식은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누구나 성공을 원하는데 예수님의 사고방식은 성공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으시고 오직 하늘 나라만 추구하셨던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볼 때는 전혀 비현실적인 모습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삼손을 붙들어 블레셋에게 넘겨줍니다. 그들은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는 자기들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안위에 위험을 주는 삼손을 자기들의 손으로 붙들어서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유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삼손으로 인한 블레셋 사람들의 심판입니다. 14절에 보면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고 말합니다. 삼손이 결박을 당한 채 끌려오는 모습을 본 블레셋 사람들이 기뻐서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함으로 삼손을 묶었던 줄이 불에 탄 삼처럼 끊어지고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죽입니다(15-16절).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임하여 삼손을 묶었던 단단한 줄이 불에 탄 삼처럼 끊어져 버립니다. 삼손이 힘이 세다는 것을 안 유다 사람들이 오죽 단단하게 묶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줄도 삼손을 묶어 두지를 못한 것입니다.

삼손은 단지 줄에 묶인 것이 아닙니다. 줄은 다만 삼손을 묶고 있는 눈에 보이는 실체일 뿐, 정작 삼손을 묶은 줄은 세상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힘을 두려워하는 유다 사람들이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 힘으로 삼손을 묶은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나 힘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들은 오래 세월 동안 블레셋의 압제를 받아 오면서 하나님의 살려주신 은혜나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믿음을 포기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상황이 하나님의 힘으로 산다는 것을 말하기가 곤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극도의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면 과연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살려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나 힘에 대해서 기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쉽게 보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만약 유다가 블레셋이란 강대국을 이기고 그들을 다스리는 삶을 살았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힘을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증거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압제를 받는 상황에서 유다에게는 하나님의 힘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블레셋의 힘만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에 대한 굴복이 삼손을 묶어서 블레셋에게 넘기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줄이 여호와의 신의 권능으로 인해서 끊어집니다. 이것은 어떤 힘도 삼손을 구속할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삼손이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죽이게 함으로서 블레셋에 대한 심판을 유다 사람에게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유다 사람을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부터 지키지 못하신 것입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힘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틈만 나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가르치시고 심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에 붙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을 일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단지 힘센 블레셋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의 대상도 블레셋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 역시 현실에서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삶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어려울 때 어려움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평안할 때 평안함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보지 못합니다. 다만 어려운 상황만 바라봄으로서 원망이 나오고 평안함만 바라봄으로서 평안함을 자신의 힘으로 착각하고 평안에 취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권능은 신자로 하여금 세상의 힘으로부터 해방되게 합니다. 삼손의 묶은 줄이 끊어지듯 우리를 묶고 있는 세상의 힘을 끊어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힘에 굴복한 자로 살아가지 않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권능이 임한 신자입니다.

줄이 끊어지고 자유의 몸이 된 삼손은 블레셋을 심판합니다. 나귀의 새 턱뼈를 가지고 일천 명을 죽이게 됩니다. 블레셋의 힘을 두려워하던 유다 사람들은 이제 여호와의 권능을 목격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자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힘도 여호와 앞에서는 심판의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결코 힘을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힘으로서 약한 자를 괴롭힐 때 나쁘다고 말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과연 힘이 나쁜 것입니까? 힘도 역시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과연 하나님이 세상에 힘을 주셨을까요? 하나님이 과연 여러분에게 힘을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세상에 힘을 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힘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이 힘으로 삼는 것은 돈이며 지식이며 지위입니다. 그 외에도 다른 사람보다 나아 보이는 것을 소유했을 때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삼아서 상대적으로 못한 자를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도구로서 돈은 주셨을지언정 힘으로서 돈은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할 도구로서 직장과 지위를 주셨을지언정 힘으로서 지위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힘으로 여긴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자기 것으로 삼는 악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모습임을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는 것을 통해서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블레셋 역시 살려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피조물입니다. 다만 그들은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힘으로 삼고 힘으로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이 있어야 일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직장이 있어야 돈을 벌기 때문에 직장을 원하게 되고 지위가 힘이기 때문에 높은 지위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의 내면에는 하나님이 나라는 존재를 살려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시는 이유를 누가 생각하며 살아가겠습니까? 불신자들입니까? 바로 신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신자라고 일컫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이 살려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생각지 않고 살아간다면 과연 어디에서 신자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신자라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에 기대가 되고 세상 것이 없을 때 낙심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하늘에 있음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에 의해서 하늘의 생명이 가려지고 희미해져 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18-19절을 보면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 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고 말합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는 도중에 목이 마르게 되고 그것 때문에 블레셋 사람에게 죽게 되었다고 부르짖습니다. 물론 죽을 정도로 목이 말랐다는 것보다는 몸이 지치고 피곤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삼손도 사람이기 때문에 일천 명을 죽이는 가운데 자신의 육체 역시 지치고 목이 마른 상태가 된 것입니다. 물을 마시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는데 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부르짖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삼손에게 물을 주지 않으시면 삼손도 블레셋 사람에게 죽어야 할 형편입니다.

블레셋을 심판하는 삼손도 하나님이 살려주셔야 살 수 있습니다. 삼손이 블레셋을 심판했다고 해서 삼손을 옳은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삼손의 생명도 하나님에게 있음을 보이시기 위해서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쳐서 물이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삼손은 그 물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로 인해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샘을 '엔학고레'라고 이름 붙여 부르게 된 것입니다.

엔학고레란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부르짖음으로서 생명을 얻게 된 샘이라는 뜻입니다. 삼손의 부르짖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손으로 블레셋에게 심판을 행하셨지만 자신 역시 하나님이 물을 주지 않으시면 죽어야 한다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엔학고레입니다.

삼손이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한들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그 어떤 힘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힘을 자랑하고 힘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을 것처럼 여기지만 물 없는 들판에서 물이 나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힘을 바라보고 삽니다. 그것은 죽음에 처한 자신의 형편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삼손이라고 해서 사망의 위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삼손 역시 하나님이 아니면 죽을 자입니다. 이것을 삼손이 알았기에 하나님에게 부르짖은 것입니다. 목말라 죽게 된 상황에서만큼은 자신의 힘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신자라면 필히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라본다면 돈이 힘이고 직장이 희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아래 사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생각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힘들이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힘을 버리고 하나님에게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엔학고레를 경험한 신자입니다.

사망에 처한 인간에게 생명 되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이 삼손에게 생수가 된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생수는 바로 하나님이 친히 내어주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와 살이 우리의 생수가 되어서 저와 여러분을 살리는 것입니다.

세상을 힘을 가진 자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피와 살 따위는 관심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려주지 않으면 죽는다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심판과 멸망에 처할 자신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친히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곧 생수임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그리스도에게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처한 나의 형편보다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처지인가를 생각하십시오. 무엇을 부르짖어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여러분이 삶 깊숙이 개입됨을 경험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