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6:23-31 승리와 패배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게 하시는 이유도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서 믿음으로 사는 나라가 어떠함을 보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신자로서 받은 바 사명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신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야 하는 사명을 잊어버리고 세상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해버린다면 그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불신자와 같은 모습의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해야 한다는 사명을 따라 산다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 주어진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한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사명을 잘 아는 신자의 바른 생각이며 참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몸이 내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건강 역시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힘이 주어지든 그 힘 역시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나 재주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실려 있는 것들입니다.

신자로서 이러한 생각을 가지는 것이 극히 당연하지만, 사실 그런 생각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는 여러분 스스로 잘 아실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을 나를 위한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주어진 것으로 본다는 것은 결국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삶 자체를 포기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자로서 원하는 삶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것에 있다면 내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러한 삶에 자연히 힘쓰게 되겠지만, 우리들 마음 한구석에 내 삶, 내 인생이라는 것이 살아있고 숨을 쉬고 있는 이상, 내 수중에 있는 것들에게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많고 적음을 따지게 되고, 경쟁하게 되고, 불평하게 되고, 때로는 주어진 것을 힘으로 삼아 누군가를 무시하는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로서의 사명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보여지는 현상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는 신자이면서도 신자로 살아가는 것에 부담을 가집니다. 그리고 오히려 신자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삶에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극히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이것이 당연하다 할지 모르지만 삶의 의미가 하나님에게 있음을 고백하는 우리라면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삼손의 삶에 있어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나실인이란 하나님에게 선택된 사람입니다. 자기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살아가야 할 인생입니다.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줘야 할 사명이 삼손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나실인으로 살면서 나실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지를 못합니다.

지금까지 성경의 내용을 볼 때 삼손의 삶의 중심은 여자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삼손의 모든 문제는 여자로 인해서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여자를 선택하고 여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나실인까지 포기해 버린 삼손입니다. 결국 삼손의 인생의 행복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예쁜 여자를 만나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에 삶의 의미를 두었던 것입니다.

결국 삼손은 자신에게 주어진 힘 역시 여자 때문에 복수하고, 여자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무리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 사용을 한 것입니다. 삼손에게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 인생의 행복이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힘 역시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삼손이 결국 비참함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이 사랑하던 들릴라로 인해서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는 비참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삼손은 들릴라만 있으면 행복할 것으로 여겼지만 결국 삼손에게 행복의 조건이던 것이 오히려 삼손을 실패로 밀어 넣는 덫이 되버린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바로 삼손과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행복의 조건을 세상에서 찾습니다. 저것만 있으면 행복하겠다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행복의 조건이던 것이 나를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덫이었음을 깨닫게 될 때 인생의 헛됨을 발견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삼손에게서 떠났다는 것은 삼손이 자기 사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명을 잃어버린 삼손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삼손에게 함께 하시고 삼손을 힘주시고 도와주신다면 그것은 삼손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이 신자에게 함께 하신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연히 우리 개인의 삶을 도우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자로서 살아가야 할 사명을 도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신자와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신자라는 우리가 신자로서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내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 열심히 산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고 말합니다. 머리털이 다시 자란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체의 현상입니다. 머리털을 깎였다고 해서 다시 자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란다는 것을 언급을 하는 것입니까? 삼손은 자신의 머리털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가를 점차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머리털이 자라면 자랄수록 나실인으로 살지 못한 자기 인생의 실패를 가슴 깊이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삼손이 깨달은 것은 자신의 힘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머리를 깎이면서 힘이 사라진 것은 머리털에 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나실인의 언약을 포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떠난 결과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은 이제 힘을 위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힘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있던 집을 버티고 있던 두 기둥을 무너뜨림으로서 블레셋을 심판을 합니다.

삼손은 하나님에게 부르짖을 때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갚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마치 삼손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하나님에게 힘을 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삼손이 복수를 도우신 것처럼 보여집니다. 하지만 과연 하나님이 삼손의 복수를 도우시기 위해서 다시 힘을 주신 것일까요?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 역시 인간의 복수를 인정하시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눈을 뺀 원수를 갚게 해달라는 삼손의 말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머리털이 자라면서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 삼손이 끝까지 자신의 복수를 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삼손에게 있어서 원통함은 자신의 실수로 인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조롱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의 방백이 가로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붙였다 하고 다 모여 그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라고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을 자축하고 있습니다. 자기 동족들을 많이 죽이고 곡식을 불태우고 토지를 헌 원수 삼손을 붙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신이 도우셨기 때문에 원수인 삼손을 붙들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손을 불러내서 재주를 부리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삼손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함으로 인해서 나실인의 사명을 잊은 결과인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의 신을 찬양한다는 것은 결국 삼손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아무것도 아닌 신으로 조롱하는 것입니다. 삼손이 눈이 뽑히고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이 블레셋의 신이 강하고 삼손의 신은 힘도 없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고방식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삼손의 원수를 갚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를 갚으시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삼손을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의 승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힘을 스스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손이 붙들린 것은 블레셋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삼손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힘은 삼손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잊은 채 승리를 자신의 힘의 결과로 여기고 자신의 힘을 찬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원수된 모습입니다.

블레셋이 자기들의 힘으로 삼손을 이긴 것을 기뻐하면서 자신을 찬양하고 높이는 모습은 오늘 우리들이 경쟁 속에서 승리한 것을 기뻐하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도 누군가를 이기면 기뻐할 것입니다. 내 재주로, 내 능력으로, 내 노력으로 승리한 것을 기뻐하면서 스스로의 힘에 대해 뿌듯함을 가질 것입니다. 이긴자의 기쁨은 이긴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겼을 때 우리가 잊어버리는 것은 패배한 자의 고통과 비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내 승리에 도취되어서 내것을 기뻐하는 것에만 마음을 둡니다.

그러나 힘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에게 힘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승리를 맛보게 하셨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승리에 도취되어서 나로 하여금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서 뒤로 밀려나고 패배한 자의 고통이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의 모습이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승리와 패배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 자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더 주시고 덜 주시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세상은 승리와 패배로 구분을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승리와 패배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증거돼야 하는 것입니다.

30절에 보면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고 말합니다. 이제 삼손은 자신이 살아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블레셋과 함께 죽더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이 증거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죽더라고 하나님의 영광이 세워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삼손이 죽을 때 가졌던 그 마음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삼손의 죽을 때의 그 마음이 곧 나실인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죽는 것보다는 나로 인해서 무너진 하나님의 영광이 세워지는 것을 더욱 원하는 그 마음이 나실인의 마음입니다.

삼손은 죽으면서 하나님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삼손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삼손이 승리는 기둥을 무너뜨려서 블레셋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된 것에 있습니다. 삼손이 죽으면서 보여준 하나님의 승리가 곧 삼손이 승리입니다.

여러분, 블레셋과 같은 삶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세상에서 남을 이긴 것을 승리로 보지 마십시오. 세상의 승리로 인해서 자기에게 힘이 있음을 과시하고 찬양을 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원수된 모습일 뿐입니다. 그것은 나의 승리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자가 있음을 외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경쟁에서 이겼다고 해서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기게 하셨다고 한다면 결국 패배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이기든 지든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라고 하나님이 만드신 상황임을 잊지 않는다면 나의 승리의 기쁨보다는 패배한 누군가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승리도 패배도 없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기기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시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지만 예수님이 흘린 피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함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기기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겨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신자로서의 사명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보여야 하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삶이지 결코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승리에 도취되고 자신의 힘에 대해 기뻐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승리로 고통받는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수 갚음이 있을 것입니다. 삼손의 부르짖음은 힘에 의해 고통받는 자의 부르짖음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