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7:1-6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절대적인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복종 외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에게는 자신의 입장이라는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고 세상에 보냄 받은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반발을 하기 마련입니다. 신을 섬기는 문제는 인간편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을 절대적인 분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이 편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위해서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물론 현실의 상황과 환경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신의 의지를 꺾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런 경우 남는 것은 불만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게 하는 환경과 상황을 안겨준 신을 원망하면서 말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신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열망을 가지고 신을 찾는 사람에게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말하면서 하나님은 절대적이고 우린 그분 앞에서 우리의 요구를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한다면 순순히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부담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기뻐하고 바라는 것에 일치된다면 모르겠지만 원하지도 않는 곳으로 우리를 밀어 넣고 인도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하면서 인정하기란 참으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라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우리 입장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이 마음대로 만들어 내거나 인간들 방식으로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마치 늙은 부모를 자식들이 천대하면서 해주는 대로 받고 가만히 있으라는 식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기쁨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무엇이 기쁨이 되는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기쁨을 위해서 살고 자신의 꿈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팽개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인간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나서봐야 결국 모두가 자기 위신 세우기이고 자기 신앙 지키기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에게 기쁨인가는 하나님이 알려주실 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알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기본적 본성과 상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사느냐는 것은 그가 어떻게 행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 그가 행하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인가?'를 물으면서 행동한다면 그는 분명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사는 신자입니다. 항상 삶의 기준이 하나님에게 있다면 그의 삶은 하나님에게 다스려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자기 마음대로, 자신이 생각할 때 옳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것을 묻고 행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것이고 곧 그에게 있어서 왕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단지 인간이 생각하는 신이 아니라 절대적인 창조주로 섬기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삶이 없다면 분명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1,2절을 보면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은 일천일백이라는 많은 돈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돈을 잃어버린 어머니가 저주를 합니다. 우리도 누군가가 우리에게 큰 손해를 입히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을 한 사람이 있을 때 그에게 저주를 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가령 여러분이 미가의 어머니처럼 많은 돈을 도둑맞았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군지는 모르지만 돈을 훔쳐간 사람을 두고 '마른 하늘에 벼락이나 맞아라'든가 '내 돈 훔쳐가고 네가 잘되나 보자'라는 등등의 저주의 말을 퍼붓지 않겠습니까?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그 울분을 달리 쏟아낼 길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식으로 분을 푸는 것입니다. 속의 울분이 욕으로 저주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미가의 어머니도 아마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돈을 훔쳐간 범인을 두고 저주를 한 것입니다. 그 저주의 말을 미가가 듣고 어머니가 잃어버린 돈을 자신이 가져갔음을 고백합니다. 어머니의 저주가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돈을 잃고 괴로워하는 어머니가 보기 딱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돈을 가져간 미가가 그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미가의 말을 듣고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드는 말입니다. 아들이 돈을 가져갔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머니의 돈을 말없이 가져간 미가를 책망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미가의 어머니는 오히려 '내 아들이 복받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순순히 돈을 내놓는 아들이 고마워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요? 본문에서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으나 추측하건대 처음에는 범인이 누군지를 모르고 저주를 했는데 그 범인이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면 결국 자신의 저주가 아들에게로 돌아갈 것을 염려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저주건 아들에게로 저주가 미친다면 결국 아들에게는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저주 대신이 복이 임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내 놓은 잃어버린 은 일천 일백 중에 이백을 가지고 신상을 만들어 집에 둡니다. 그리고 신당이 있고 신앙이 있다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당을 책임지고 신에게 기원하는 역할을 하는 제사장이 필요함으로 제사장 복장인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운 것입니다. 즉 신을 섬기는 기능을 자기 집 안에 두고자 한 것입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 했습니다. 결국 미가의 어머니에게 있어서 여호와는 자신이 섬겨야 할 절대적인 분이 아니라 자기 아들의 복을 위해서 존재하는 신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를 두고 6절에서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한 가정이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이스라엘 전체로 표현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미가의 가정과 다를 바가 없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미가나 미가의 어머니나 이스라엘의 마음이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미가의 어머니의 문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하나님이 그의 왕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물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살았던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기쁨은 자식의 성공일 것입니다. 자식이 잘되는 것이 기쁨의 전부이고 자식이 잘못되었을 때 마치 세상 전부를 잃어버린 것처럼 낙심하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미가의 어머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식을 지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집안에 신당을 세운 것도 신상을 만든 것도 제사장을 세운 것도 모두가 자기 아들의 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 기쁨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의 기쁨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된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도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쁨을 자기 멋대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신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의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스스로 계시하신 성경을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판단은 성경을 의존해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왕이 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되버린 것입니다. 내 생각에 옳으면 옳은 것이고 내 생각에 맞지 않으면 틀린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분별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러나는 것은 각기 옳은 소견이 서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다툼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내 생각이 맞기 때문에 내가 양보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왕이 없는 그 마음은 자기에게 좋은 것은 옳은 것으로 좋지 않은 것은 틀린 것으로 분별합니다. 이것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입니다. 신상을 만들고 사적인 이유로 제사장을 세우는 미가 어머니의 그 마음이 오늘 우리들의 마음과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비록 신상은 만들지 않았다고 해도 하나님이 내 아들을 지켜주고 우리 가정에 액운이 떨어지지 않고 복이 주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목사가 내 가정과 내 자식을 위해서 기도해주기를 원하고 그것을 기뻐한다면 결국 집안에 신당을 세우고 제사장을 세우는 그 마음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피조물인 인간에게 있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절대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세상에 태어난 자가 아닙니다. 우연히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부모님의 의지로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게된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보냄 받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보내신 분이 따로 존재하십니다. 보내셨을 때는 보내신 분의 의도가 존재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식을 어딘가에 보낼 때, 즉 심부름을 시킬 때 아무런 이유도 없이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어딘가에 보냈다면 가야할 이유가 있을 것이고 가서 해야할 책임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려줄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심부름을 보냈다면 자식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의도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보냄 받은 자신이 해야할 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보냄 받은 사람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심부름을 간 자식이 자신을 보낸 아버지가 무엇을 지시하셨는지를 잊어버리고 보냄 받은 곳에서 놀아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바로 그런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살아있고 우리가 해야할 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에 취한 채 우리 자신의 기쁨과 편함을 위해서 힘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왕이 없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행하는지 아니면 여러분의 개인적인 소견이나 생각 감정에 의해서 행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거의 대부분이 나의 감정과 소견과 생각을 기준으로 해서 행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의 소견과 생각들이 서로 충돌되고 다툼으로 번지는 것을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면서 가장 많이 발견하는 것도 교회를 내 소견에 옳은 대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감정이 기준이 되어서 기분이 나쁘면 교회를 안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결국 내 기분과 감정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내 기분이 상한 것을 생각하기 전에 내가 형제의 기분을 상하게 했음을 생각할 것입니다. 나로 인해서 형제의 마음이 상처 입게 된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내 감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허물 많은 자이고 내가 문제임을 자각하고 형제와 화평을 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행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기분이 중요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기쁨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견이란 참으로 좁습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소견이고 나에게 기쁨이 되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소견입니다. 그러한 소견을 의지해서 행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이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행함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은석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모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석교회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은석교회라는 이름이 유명해지고 은석교회가 커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은석교회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자로 모이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이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모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증거되는 교회입니다.

물론 우리 소견에는 은석교회가 커지고 은석교회의 이름이 유명해지는 것이 옳은 것이고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다른 교회의 교인들도 같은 생각일까요? 다른 교회의 교인도 은석교회에 대해서 같은 마음을 가질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대로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커지기를 원하고 있고 그것을 옳다고 여깁니다. 심지어는 옆의 교회에서 분란이 나서 그것의 교인들이 내 교회로 오게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기뻐합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자신을 중심으로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소견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진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소견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 것인지 하나님에게 물으면서 성경을 통해서 점검하면서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길로는 가지 않으려고 힘써야 하고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에서 행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셔야 합니다.

목사에 대해서도 사적인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미가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의 복을 위해서 제사장을 세운 것처럼 목사를 여러분 가정과 자식의 복을 위한 도구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목사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있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고 여러분이 과연 말씀 앞에서 제대로 살아가는지를 드러내고 증거하라고 세움 받은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목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더욱 가까이 나아가고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이 제대로 되어 가는지를 점검하는데 도움을 얻는 자로 여기면 됩니다.

신앙에 대해서 염려도 하시고 고민도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일로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염려하면서 신앙에 대해서는 무덤덤하게 산다면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왕이 없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점검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내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자로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한 사명을 무너뜨리는 것은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