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8:1-10 동일한 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모든 행동을 자기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기준해서 옳으냐 그르냐를 물으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입장으로는 이렇게 해야 옳고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지기 위해서 내 유익이 포기되어져야 한다면 능히 자기 유익을 포기할 수 있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입장을 포기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입장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예수님에게는 고통이었으나 '아버지의 뜻이라면'이라는 말씀으로 오직 아버지의 말씀을 세우기 위해서 순종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분이 그리스도시라면, 그리고 우리가 이 분을 따른다면 우리 역시 이분이 가신 순종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 우리 자신의 입장을 지키려고 한다면,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입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입장을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지는 것을 무너뜨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지난주에도 우리는 자기 입장을 따라 살아가는 한 사람을 봤습니다. 그는 바로 미가입니다. 성전에서 일해야 할 사람이 성전을 떠났습니다. 거할 곳을 찾기 위해서 떠돌아다닙니다. 결국 자기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 미가 개인의 제사장이 되어서 그 집에 속하게 된 것을 정당하게 여겨버린 것입니다. 미가는 미가대로 제사장을 세워 놓으면 하나님이 자기 집에 복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자기 멋대로 생각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은 이미 하나님이 제시하셨습니다. 신 5:32-33절에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는 말씀이 그러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여호와께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집에 제사장을 둠으로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르치신 명령과 규례에 순종하는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는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세워 놓으면 여호와가 복주실 것이라고 믿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미가나 레위인과 같은 속성을 보인 단 지파가 등장합니다. 1절은 또 다시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행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지 않는 자들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단지파는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단 지파가 그때까지 자신들이 기업으로 얻은 땅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단 지파는 여호수아가 살아있을 때 기업을 분배받았습니다(수 19:40-46). 그러나 그들은 기업으로 받은 땅을 얻지를 못하고 오히려 그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에게 쫓겨나서 새로운 땅을 찾아서 떠돌아 다녔던 것입니다.

1:34절에 보면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단 지파가 자신들이 받은 기업을 얻지 못한 것은 요셉이나 유다 지파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단 지파가 다섯 사람을 뽑아서 자기들이 정착하기에 좋은 땅을 찾아 정탐을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단 지파는 자기들이 분배받은 땅을 얻지 못하자 다른 땅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 거할 곳을 찾아 다녔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거할 곳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레위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들의 물음에 레위인은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여차여차히 나를 대접하여 나를 고빙하여 나로 자기 제사장을 삼았느니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단 지파는 레위인에게 "청컨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에게 물어 보아서 우리의 행하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고 요청합니다.

정탐꾼들의 이러한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자들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이 행하는 길이 형통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즉 자기들이 행하는 길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오로지 내가 하는 일이 형통할 것인가 잘 안될 것인가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일만 형통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 지파였습니다.

우리는 단 지파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염두에 두면서 행합니까? 사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관심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떻냐는 것보다는 과연 형통할 것인가 안될 것인가에만 마음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곧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음으로서 보여지는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세움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내가 행하는 일이 형통할 것인가에만 쏠려 있는 것입니다.

단 지파는 자신들이 행하는 것, 즉 자기들이 분배받은 땅을 얻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자기들이 거할 땅을 찾고 있다는 것이 자신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결과임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땅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 없음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일이 잘되기만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단 지파의 정탐꾼들에게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6절)고 말합니다. 단 지파를 위해서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레위인이 단 지파의 잘못됨을 알았으면서 듣기 좋은 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잘못을 전혀 모르고 다만 듣기에 좋은 말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결론은 레위인은 사람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듣기에 좋은 말을 하고 사람이 기뻐할 말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편에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단 지파나 레위인 모두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지 않음으로서 나타나는 것은 자기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단 지파는 자기들의 일이 형통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두고 레위인은 단 지파에게 기분 좋은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정탐꾼들이 라이스란 곳에 이르러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살핍니다. 그 땅에는 권세 잡은 자가 없어서 괴롭게 하는 것이 없고 한가하고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보고 욕심을 가집니다. 당시 라이스는 시돈의 통치를 받았는데 그 시돈 마저 거리가 멀기 때문에 라이스를 제대로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여러 여건들로 인해서 정탐꾼들은 라이스야말로 자기들이 거할 땅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동족들에게 라이스를 치러 가자고 합니다. '하나님이 너희 손에 붙이셨다'는 말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들이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이 그 땅을 자기들에게 붙이셨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아마 그들은 레위인으로부터 하나님이 형통하게 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라이스라는 자기들에게 조건이 딱 맞는 땅을 대하게 되자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돕기 위해서 이렇게 자신들에게 맞는 땅을 준비해 놓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단 지파가 라이스 땅을 차지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거할 땅을 얻기 위해서 힘쓰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신자라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일이고, 기독교라는 종교적인 일이기 때문에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고 이것이 잘되면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행하는 일을 도와주시고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목사를 위시해서 온 교회가 합심해서 기도를 한다고 야단들이지 않습니까? 성경도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도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 영광 모든 것이 사라진 채 오직 인간의 뜻과 욕심만 난무하는 현장을 수시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단 지파는 자기들 앞에 자신들의 마음에 꼭 드는 땅이 보이자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얻어야 할 기업을 얻지 못하고 아모리 사람에게 쫓겨난 것 자체가 이미 그들이 하나님을 신앙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죄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허물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도우실 것이라고, 그래서 자기들이 행하는 것이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단 지파는 나중에 미가의 제사장에게 한 집안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낫느냐라는 말로 제사장을 유혹을 합니다. 결국 레위인은 한 가정의 제사장 되기보다는 한 지파의 제사장 되기를 원하고 단 지파를 따라가게 됩니다.

이처럼 단지파도 미가처럼 제사장만 세워 놓으면 자기들에게 복이 될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고 살았음을 보여주는 사건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단 지파나 레위인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그대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에는 내가 하는 일이 형통하기를 바라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과연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지금 내가 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 한 채 오직 내 일이 잘되기만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만 바라보고 자기를 위해서만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교회를 내세우면서 교회 일을 하나님을 위하는 일로 밀어붙이지만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면 그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된다는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요 11:40).

어떤 사람은 단 지파처럼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일이 잘되어갈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이 하는 일을 인정하셨다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하는 일이 있고 인정하지 않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는 일이 어떤 일이냐를 따져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떤 일을 해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일이 잘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일이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고,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으로 여긴다면 일이 잘 안된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도 아니라는 결론이 되버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시험이라든가 고난이라는 것은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힘드는 쪽으로 인도하실 수도 있습니다. 힘들게 하시고 하는 일이 안되게 하심으로서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신앙하게 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이 계획적으로 안되는 쪽으로 인도하시는 인도하심은 설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일이 잘되느냐 잘 안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 끝까지 그리스도만 믿는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왜냐하면 멸망 받은 죄인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생명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원하는 일을 형통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자르면서 까지라도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내 일이 잘되느냐 잘안되느냐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하는 것이 말씀을 세우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인가에만 마음을 둘 것입니다. 어떤 형편이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로 살기를 소원하게 될 것입니다.

미가나 레위인 단 지파 이들 모두는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들 멋대로 생각을 합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복받기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집안에 제사장을 세웠으니까 복받을 것이라고 믿어버립니다. 단 지파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져 있으면서도 자기들의 길이 형통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에게 복받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하는 일이 형통하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한가지 묻겠습니다. 과연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자리에서 살아가십니까? 성경대로 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에 복종하는 자리에 있을 때만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다면 여러분의 하는 일은 형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바로 여러분이 저주를 받을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복받을 자입니까 저주받을 자입니까? 우리 모두는 저주받을 자입니다. 복은 죄인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내 생각과 욕심대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거리가 먼 얘기입니다. 우리 자신이 행하는 것을 돌아본다면 감히 하나님 앞에서 복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저주 아래 있는 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저주에서 생명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가 보이는 것입니다. 저주 아래 있었기 때문에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든 생명이든 말씀이든 관심이 없는 사람은 오직 자기 복만 추구할 뿐입니다. 자기 형통만 생각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생명은 멀어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미가와 레위인 단 지파를 보면서 왕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살피십시오. 그리고 우리 자신은 어떻게 행하는지 살펴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