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2:11-23 사사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볼 때 '인간은 죄인이다'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증거물은 성경의 모든 내용을 자신과 결부시켜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신학을 이루어가고 하나님에 대한 시각을 정립시켜 가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잘못된 오류는 항상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계획, 언약 이러한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들로 이해를 해버립니다. 이로 인해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은 다 무너져 버리고 하나님의 의도와 전혀 맞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으로 둔갑을 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행세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성경을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를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이해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입장이나 주어질 결과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솔직하게 하나님의 계획과 그 뜻만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만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가가 드러나는 것으로만 만족하자는 것인데 이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사건들 여러 인물들을 대하면서 나의 소망도 이들의 소망과 같은가? 자신을 확인하고 그리고 그들이 하늘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세상을 갔을 때 나그네로 살았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해서 '예'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성경을 자기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해서 자기 것을 챙기려고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바라볼 때 룻에게 먼저 선택권을 맡겼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좋은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면 '나는 과연 아브라함처럼 보이는 세상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속하신 그 땅을 바라보고 사는가?'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자기 중심으로 이해한다면 '아브라함처럼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는가?' 이렇게 자신에게 어떤 혜택이 돌아오는 쪽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 중심이란 교회 중심이라는 말과 다릅니다. 흔히 교회를 가면 '성경중심,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이라는 표어가 붙어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표어를 붙여 놓음으로 인해서 '우리 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살려고 힘쓴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심으로 성경중심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필히 한가지가 버려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내 자신이 버려지지 않은 성경중심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 중심이라는 것도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성경적인 의미는 오직 교회가 새로운 가정이고 교회에서 만나는 형제들이 새로운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기존의 혈통으로 맺어진 가족이나 형제관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교회 중심으로 살겠습니까? 누가 성경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뭔가에 미친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미치지 않고서는 하나님 중심된 삶을 살아갈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가까울지 모릅니다. 아니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본문의 이스라엘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전의 우리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이스라엘의 모습이 현재 우리들에게서 조금이나마 보여진다면 결국 우리도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내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흔적이 될 것입니다.

11-13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한 다른 세대들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합니다. 그들의 악은 바알을 섬기고 가나안의 신을 쫓아 그들에게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린 이것을 간단히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과연 우상을 섬겨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까? 그들은 하나님보다 바알을 섬기는 것이, 가나안의 신을 섬기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득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자연히 자신에게 득이 되는 신을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큰상을 준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하늘에는 상의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단과도 같은 말로 들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을 많이 한 사람에게 더 많은 상을 준다는 신이 더 신답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득이 되는 신이기 때문에 그러한 신을 좇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상의 차이가 없다'는 말은 열심히 일해도 상의 차이가 없다면 누가 열심히 일하려고 하겠는가? 라는 반문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을 자기중심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입니다.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불교에서 부처를 찾아가 공양을 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부처에게 돈을 바치고 승려에게 자신들의 가족과 사업을 위해서 불공을 드려달라고 돈을 바치는 것도 모두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자신에게 득이 되고 도움이 되어주는 신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고 사방의 대적의 손에 붙여서 노략을 당하게 하시고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16절에 보면 사사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건져내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번거롭게 일하신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고 다시 사사를 세우셔서 그들을 건져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사사의 역할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사란 재판한다 구원한다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즉 사사는 이스라엘의 재판자로 구원자로 세움을 입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를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운 사람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단지 사사의 기능이 이스라엘이 괴로움을 당할 구원하는 기능이라면 애초부터 사사를 세우지 말고 이스라엘에게 괴로움을 안주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굳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고 사사 세워 그들을 건져내는 것은 사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뭔가 가르치시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사사를 세우심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과연 사사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모두가 다 같은 사고방식이라면 이스라엘은 누구를 통해서도 자신의 죄를 책망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스라엘 안에 여호와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이스라엘은 그 사람이 존재함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죄가 발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곧 사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사는 이스라엘을 재판하는 사람입니다.

사사는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주체로서 이스라엘 안에 세움을 입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사사를 뽑아서 세우심으로 이스라엘을 책망하신다면, 오늘 우리들에게도 우리를 책망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반대로 세상을 책망하고 심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처음 외침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책망의 주체자라는 것입니다.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의 책망을 받고 살아간다는 것이 세상 사람이 볼 때는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신자라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속에서 책망의 주체자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항상 말씀으로 인해서 책망을 받으며 자신의 삶의 길을 확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가고자 힘쓰는 삶을 살아가는 신자라면 그가 바로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사사도 청종치 않습니다. 17절에 보면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책망의 주체자가 없었던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책망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고 끝까지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는 길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열조와는 다른 세대입니다.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열조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여겼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말씀이 주어지면 말씀으로 인해서 책망을 받습니다. 자신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돌이키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열조의 행한 길을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말씀이 절대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위치에 있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말씀의 능력이 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린 기도할 때 '말씀이 능력이 되어서 우리를 붙들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의 의도는 말씀에 붙들려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말씀에 붙들릴 의도도 아예 없습니다. 처음부터 내 삶은 내가 책임진다는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말씀의 능력이 나를 붙들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런 자를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자신을 포기한 자에게만 능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오늘 이 시간도 설교를 하고 설교를 듣고 있지만, 누가 말씀에 붙들린 자가 되느냐는 것은 누가 자기를 포기하기 위해서 교회를 나왔느냐로 결정되어 질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말씀에 의해서 책망을 받을 신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말씀에 대해서 두려움이 있어야 하고 말씀이 우리를 책망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분명 예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사랑하는 삶에 대해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말씀을 믿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로움을 받아 부르짖을 때에 다시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시고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 열조보다 더 패괴하여 다른 신을 좇아 그들에게 절했다고 합니다. 과연 이러한 행동이 무엇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믿음이 없었다는 것은 당연하고 무엇이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살아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가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괴로움 속에서 부르짖는 것도 결국 괴로움에서 빨리 구원받고자 하는 의도에서입니다. 사사가 죽자 다시 패역한 길로 가는 것도 역시 자신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보기에 좋은 것을 찾아갑니다.

이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모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최고로 여기게 됩니다.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세계가 약속으로 주어져 있음에 대해서는 무시를 해버립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과연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생명의 나라가 약속으로 주어져 있음을 믿고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여기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는 신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자신에게 책망의 주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책망의 주체자가 없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면서도 책망을 받지 않습니다. 오로지 나에게 해가 되고 득이 되는 것이 뭐냐만 따집니다.

과연 여러분을 책망하는 주체자가 여러분 안에 자리하고 계십니까? 말씀을 대할 때마다 교회에 나올 때마다 여러분의 죄가 책망을 받고 여러분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이끌어 가는 힘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이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말씀이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의 하나하나를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망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새롭게 만드신 생명의 나라를 심어 놓으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세상을 벗어나는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