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죄를 추적해 보면 그 근원지는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에서 밝히 바와 같이 죄는 욕심에 의해서 잉태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여러 가지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근본은 자기 발전입니다.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꿈꾸며 살아온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하는 자기 발전은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모아들임으로서 나은 인간이 되보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돈보다는 지식을 쌓음으로서 나은 인간이 되려고 합니다. 심지어 종교에서 추구하는 '도' 역시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인간의 염원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각자가 꿈꾸는 이상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이룸으로서 자기 발전을 성취하고자 하는 이 모든 것을 자기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에 염두를 두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도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구원이 따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바 된 구원보다는 세상에서의 구원, 즉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룸으로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향상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이름을 굳건히 하는 자기 구원에 더 큰 염원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구원에 마음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종교를 만들게 된 이유도 자기 구원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원하는 구원, 사람이 스스로 목적하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종교를 만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종교가 말하는 구원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일치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욕망을 종교에 담아서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가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기독교가 한낱 인간의 종교 차원으로 전락을 했다면 그 원인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자기 욕망을 담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는 우리의 욕망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욕망과 믿음을 연결 지어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욕망을 이루어 주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욕망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 욕망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인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람의 욕망은 동일합니다. 자기 발전이며 자기 이름을 내는 것이며 자기 구원입니다. 이 욕망은 누구나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욕망을 가지고 만나는 관계에서는 항상 동일한 죄의 모습만 보여질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미가와 레위인과 단 지파에게서 보여진 것도 역시 모두가 자기 욕망을 가지고 만나는 관계에서 보여지는 죄의 모습이었습니다.
자기의 복을 위해서 신에게 복을 빌어줄 제사장이 필요한 미가나, 생계를 위해서 거할 곳이 필요했던 레위나, 약속의 땅을 얻지 못하고 다른 곳에 거할 곳을 찾아 헤매던 단 지파나 똑같은 사고방식에서 만난 관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를 보면서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서로 만나는 것은 어떤 사고방식과 욕망으로 만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자기 욕망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활동하는 단 지파의 구체적인 모습이 보여집니다. 12절에 보면 단 지파는 유다 기럇여아림에 진을 칩니다. 그리고 거기서 떠나서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 이르렀다는 구절을 보면 아마 잠시 휴식을 하기 위해서 기럇여아림에 진을 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미가의 집에 온 단 지파는 문 입구에 600명의 군사를 진치게 하고는 미가의 집에서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만든 신상을 취합니다. 즉 그것들을 강제로 강탈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제사장이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왜 그것들을 가져가느냐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말에 대해서 단 지파는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19절)고 합니다.
단 지파가 레위인에게 제의한 것은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 지파를 위해서 하나님에게 복을 빌어주는 제사장으로 일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말한 것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 되는 것과 한 지파의 제사장 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낫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라면 당연히 의리를 운운하면서 미가의 집의 제사장으로 있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당사자라면 과연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목사를 해도 50명 교인이 있는 교회의 목사를 하는 것과, 500명 교인이 있는 교회의 목사를 하는 것을 다르게 보는 것이 세상의 시각입니다. 사실 목사들이 염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인 수를 늘려서 현재보다 많은 수의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사들이 꿈꾸는 자기 구원입니다. 이 숫자는 상한선이 없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마음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100명만 되도 좋겠다는 마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0명이 되면 100명으로 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구원을 바라보게 됩니다. 즉 100명이 200명, 300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레위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할 곳이 없어서 떠돌아다닐 때 미가가 해마다 돈을 주고 옷을 줄테니까 우리 집의 제사장이 되달라고 했을 때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정된 생계를 찾자 더 이상 생계가 급한 상황에 머물지 않게 된 것입니다. 결국 단 지파가 좀 더 큰 곳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라고 했을 때 레위인은 그것을 기뻐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제사장이냐 아니면 한 지파의 제사장이냐의 문제는 자기 발전을 꾀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계가 보장이 된 상황에서는 더 이상 생계가 보장된 것으로 족하지 않고 자기 이름이 커지는 것을 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람이 자신의 커짐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생계가 위협을 받을 때는 자기 존재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지만, 생계가 보장된 현실에서 사람은 자신의 존재 가치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하나가 충족되면 또 다른 길을 찾아서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단 지파는 단 지파대로 자신들의 형통함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제사장까지 뺏습니다. 다른 사람이 복을 받든 못받는 관계없이 우리 일이 형통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속셈입니다. 즉 남의 복을 가로채서라도 형통한 삶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 지파는 제사장과 신장과 에봇과 드라빔을 가지고 길을 떠나게 됩니다.
24절에 보면 "미가가 가로되 나의 지은 신들과 제사장을 취하여 갔으니 내게 오히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 하느냐"고 말합니다. 미가는 단 지파에서 나의 지은 신들과 제사장을 취하여 간 연유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우린 미가가 나이 지은 신들과 제사장이라고 말한 것을 통해서 신에 대한 미가의 사고방식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미가는 단 지파에게 신과 제사장은 나의 소유라고 주장합니다. 내가 만든 신이고 내가 데려온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에 대한 미가의 사고방식입니다.
'나의 지은 신'이라는 말은 결국 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날 위해서 내가 만든 신이라는 것은 날 위하지 않는 신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은 스스로 얼마든지 신을 선택하고 또한 버릴 수도 있다는 사고방식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신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자기 필요에 의해서입니다. 미가 역시 자신에게 필요했기 때문에 신을 선택했고 신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제사장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신의 필요에 의해서 신의 계획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신이 선택한 인간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사는 것이 신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 지파나 레위인이나 미가에게서는 이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 필요에 의해서 신을 선택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신은 우상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될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흔들림이 없이 굳건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선택된 사람이다'는 이 사고방식이 여러분의 마음에 살아 있을 때 적어도 하나님은 내 필요에 의해서 내가 선택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쓰시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단 지파나 레위인, 미가는 모두가 동일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성공입니다. 내가 잘 되는 것, 이 욕망은 사람의 관계에 단절을 가져옵니다. 단 지파, 레위인, 미가, 이들 모두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 아래 있는 형제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보여진 것은 형제가 아닙니다. 서로 자신을 위해서 투쟁하고 싸우고 이득을 챙기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미가는 단 지파가 자신의 제사장과 신상을 가져간 것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그리고 이웃 사람을 모아서 그들을 쫓아갑니다. 그러나 단 지파는 힘으로 미가를 누릅니다.
25-26절에 보면 "단 자손이 그에게 이르되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 하고 단 자손이 자기 길을 행한지라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더라"고 말합니다. 결국 신은 힘있는 자의 소유가 되고 맙니다.
단 지파는 제사장을 돌려 달라는 미가를 위협을 합니다. 그리고 미가는 단 지파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끼고 제사장을 포기하고 돌아가고 맙니다. 미가가 처음에 이웃 사람을 모아서 단 지파를 추격을 한 것은 역시 힘으로서 제사장을 찾아오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단 지파의 힘에 눌리고 만 것입니다.
레위인은 힘이 없는 한 개인의 제사장이 되기보다는 힘이 많은 한 지파의 제사장을 원했습니다. 단 지파는 힘으로서 미가의 제사장을 뺏습니다. 미가 역시 힘을 모아서 자기 것을 찾으려 했지만 상대적으로 힘이 적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기의 것을 포기합니다. 결국 동일한 욕망에서 동일하게 보여지는 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왕이 없는 이스라엘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사건들입니다. 중심 되는 분이 없기 때문에 각자 자기가 중심 되어서 자기 생각대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존재할 뿐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선택한 신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자기 포기에서 출발합니다. 자기 포기가 없는 신앙은 신앙일 수 없습니다. 다만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집착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때문에 신앙은 결코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다만 외부에서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포기의 길을 가지 않는 한 우리는 신앙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과연 이들이 상실한 것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상실했기에 본문과 같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느냐 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에게도 본문과 같은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역시 뭔가를 상실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단 지파, 레위인, 미가 이들이 상실한 것은 사람의 존재 가치에 대한 바른 판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이나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존재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애굽에서 구출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은혜가 아니었다면 그들 역시 애굽과 같은 운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은혜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자기 포기이며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포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에게서만 보여지는 신앙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상실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래 마음일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에서 존재 가치를 찾고, 자신이 소유한 힘에서 삶의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기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것을 힘으로 삼고 약한 자들을 누르고 핍박하면서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서도 역시 본문과 같은 모습이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릴 때 단 지파와 레위인 미가와 같은 사고방식을 드러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에게서 본문과 같은 모습이 보인다면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한 채 하나님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은석교회 일수도 있고 바로 나와 여러분 자신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피흘림으로 인해서 산 자들입니다. 죽어 마땅한 우리들이지만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 아래 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성공이 삶의 이유와 목적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이 포기되어 있는 신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기보다는 세상의 복 아래 머물기를 원함으로 인해서 생명을 소유한 신자의 모습이 아니라 세상의 복을 원하고 세상 것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삶을 책망하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기 위한 역할로서 선택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과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원리 원칙을 포기하고 대신 자신의 원리원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인간의 원리원칙이란 모두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세상의 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 자신에게 참으로 복된 것인가를 발견하지 못하고 헛된 것을 쫓아 살아가는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보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합시다. 우린 과연 참된 복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지, 세상에서의 성공이 아닌 하늘나라에서의 성공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지, 과연 우리들이 생각하는 삶의 기준은 무엇인지 분명한 답을 내려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잘됨이 아닌 하늘나라에서의 잘됨을 염두에 둔다면 참된 삶의 기준이 세워질 것입니다. 그 기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