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9:1-9 말씀이 없는 삶

신자의 삶은 세상의 삶과는 달리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삶은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굳게 세우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굳게 세우는 것은 말씀을 세움으로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경우에도 말씀이 허물어지고 무시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신자는 특별한 자로 구별되어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삶은 참으로 특별한 삶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살아가는 것은 같아 보일지 몰라도 그 마음에 존재하고 있는 삶의 이유나 목적 등 모든 것은 어둠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것을 담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와 신자의 삶은 특별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된 우리의 삶이 말처럼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가를 묻는다면 참으로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스스로 특별함을 잃어버리고 어둠의 사람과 똑같은 보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뭔가 말씀을 굳게 세우고자 힘썼다는 느낌이 없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뭔가 양보하지 않고 어둠에 철저하게 맞섰다는 느낌이 없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특별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를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신자가 왜 특별한 존재인지, 그리고 특별한 존재에게서 보여져야 할 특별한 삶은 무엇인지, 그리고 특별한 삶을 잃어버렸을 때 보여지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봄으로서 특별히 구별된 자로서 특별한 삶을 회복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자다운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역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1절)라는 말로써 시작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살아갈 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17,18장과 마찬가지로 레위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레위인이 등장해서 그들의 잘못된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어떻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레위인은 이스라엘 안에서 특별히 구별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레위인이 부패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극도로 부패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등장하는 레위인의 잘못된 것은 무엇입니까? 1절에 보면 이 레위인은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레위인이 첩을 취한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사실 당시는 남자가 첩을 얻는 것은 하나의 풍습으로 여겨지던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위인이 첩을 취한 것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타락으로 말하기는 곤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첩에 대한 레위인의 행동입니다. 2절에 보면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 아비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의 날을 보내매"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첩이 행음을 하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행음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20:10절에 보면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레위인이 말씀을 중심으로 살았다면,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삶이었다면 분명 말씀에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말씀을 세우기 위해서 힘썼을 것입니다. 이렇게 레위인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었다면 레위인의 첩은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말씀대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레위인의 행동은 전혀 달랐습니다. 3절에 보면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하나와 나귀 두 필을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비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비가 그를 보고 환영하니라"고 말합니다. 레위인은 첩을 데려오기 위해서 첩의 아비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이러한 레위인의 행동이 곧 그 속에 왕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레위인이 첩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안에 말씀을 굳게 세우기 위해서는 첩을 죽이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이스라엘이었고, 특히 레위인은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존재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부가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레위인은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이스라엘을 경고하고 책망을 하고 그들을 옳은 진리의 길로 인도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인의 구별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 레위인조차도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쪽으로 행동합니다.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을 잃어버릴 수 없기 때문에 진리 문제는 팽개치고 어떻게든 여인을 데려오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말씀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은 이미 관심 밖입니다. 그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직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힘씁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레위인의 잘못된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레위인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이 우리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강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갑니까? 말씀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까? 사실 어쩌면 우리는 레위인처럼 말씀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없이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언제나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좇아 행하면서, 그것 때문에 말씀이 무너지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말씀에 관심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말씀에 어긋난 잘못된 것을 본다고 해도 그냥 넘어가 버리고 맙니다. 비록 잘못된 것이라고 해도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고 기쁨이 되는 것이면 묵인하고 넘어가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왕이 없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로써 구출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권면하고 가르치기 위한 존재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일을 위해서 따로 기업이 없었습니다. 그들 손으로 벌어들이는 소득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도움으로 먹고 살아감으로써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가르쳐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레위인은 자신을 위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보여주고, 증거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 일을 게을리 하고 자신의 삶에 치우친다면 결국 이스라엘이 잘못된 길을 간다고 해도 그들 안에서 그것을 경고하고 책망할 사람이 사라져 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것보다 더 큰 심각함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그것을 경고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잘못됨에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죄와 전혀 상관없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죄가운데 있을 때 그것을 발견하고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죄를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의 복된 모습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레위인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인은 어찌 보면 어두운 바다에서 빛을 비추는 등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길을 모르는 어둠에서 바른 길을 인도해주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등대가 무너지면 어둠에 있는 배는 길을 전혀 찾지 못하고 어둠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레위인마저 등대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다른 이스라엘과 함께 어둠에 몸을 두고 살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4절부터 보면 첩의 장인이 레위인을 환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인이 레위인을 붙들자 처음에는 삼일을 유숙합니다. 나흘만에 길을 떠나려고 하자 장인이 '떡을 조금 먹어 기력을 도운 후에 길을 떠나라'(5절)고 합니다. 그 말에 레위인이 다시 함께 먹고 마시면서 밤을 지내게 됩니다. 다음날 다시 길을 떠나고자 하나 장인이 간청함으로 다시 유숙하게 됩니다(7절). 그리고 다음날도 역시 떠나고자 한 마음대로 떠나지를 못하고 유숙하게 됩니다(8,9절).

레위인의 장인은 아마 행음을 한 자기 딸을 위해서 레위인을 극도로 대접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붙드는 장인보다는 붙들리는 레위인에게 있었습니다. 말씀보다는 첩을 사랑했기 때문에 첩의 장인이 붙드는 것을 뿌리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레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세우고자 했다면 장인이 붙든다고 해도 길을 떠났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할 때 인간적으로 보나 인정으로 보나 매몰차게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말씀은 결코 타협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세우는 삶을 산다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게 기쁨이 되는 모든 것이 포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굳게 세우는 것을 더욱 중요한 삶으로 받아들인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신자로서 제대로 살지 못한다면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마음에 세워두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에 대해서 듣기는 했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이 우리 자신의 것으로 남아 있지 못하기 때문에 들은 것으로 그쳐버릴 뿐이지 말씀이 삶에서 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삶을 통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이 나무라면 삶은 가지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이 곧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의 말씀대로 가지인 우리는 나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말라죽고 말뿐입니다.

우리의 삶이 말씀과 상관이 없이 존재한다면 그 삶은 이미 죽은 삶입니다. 말씀과 상관이 없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삶은 전혀 가치 없는 것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곧 주님의 평가입니다. 비록 우리는 착한 일을 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일을 하면 그 인생은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아닙니다. 세상이 칭찬하는 것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칭찬은 세상의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칭찬을 듣는 자인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과연 주님에게 붙어 있는가 아닌가를 보실 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의 이러한 주님의 평가에 대해서도 전혀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주님이 어떤 평가를 내린다고 해도 덤덤할 뿐입니다. 마치 마태복음 11:7절의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는 말씀과 같은 상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이 없고 사람들의 귀에서 맴돌 뿐 그 마음에서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는 심령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 이러한 상태가 아닙니까? 주님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주님과 함께 있다는 착각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까? 사실은 죽은 삶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세상의 재미와 기쁨이 있기 때문에 잘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신자로서 구별된 존재입니다. 그리고 구별된 존재답게 구별된 삶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보다 더 나은 윤리와 도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서 말씀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양보되고 타협한 삶이 아니라 말씀을 위해서 희생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레위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참된 레위인의 모습을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말씀으로 사는 삶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변의 상황과 여건 때문에 말씀을 뒤로하고 물러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적인 관계 때문에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세우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진정한 레위인은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잘못된 삶에 대해서 경고를 받고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으로 인해서 우리의 잘못됨을 발견하게 되고 애통함과 회개함으로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레위인을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답게 그에게서 레위인의 삶이 보여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산다면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여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말씀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으로, 여러분의 삶에서 말씀을 굳게 세우고 말씀에 대해서만큼은 그 무엇도 양보하지 않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흔적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인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여러분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으로 살아가지 않을 때 가차없이 책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된 여러분이 가정에서 할 수 있는 레위인의 바른 직무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직무를 잃어버릴 때 가정 전체가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는 부모의 기쁨을 위해서 자식에게 세상적인 출세나 성공을 요구하게 될 것이고, 자식은 자식대로 자신에게 기쁨이 되고 재미가 되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뒤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무너진 것과 같은 가정의 무너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에 대한 경고가 없고 책망이 없는 가정이 바로 말씀이 세워지지 않은 무너진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자녀가 부모의 원함대로 안된다고 할지라도 신자된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정에 자녀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뜻 또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집단인 교회를 세우려고 할 때 말씀은 자연히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교회의 부흥을 약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 저는 '말은 맞지만 교회의 현실에는 맞지 않다는 말을 듣습니다' 즉 그렇게 하면 교회가 부흥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교인들이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말은 맞다는 것은 말씀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은 말씀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교회를 굳게 세워야 한다는 자기 기쁨 때문이 아닙니까? 교회 때문에 말씀이 무시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둠의 세상에 말씀을 굳게 세우기 위한 존재로 부름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존재는 그 삶 또한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굳게 세우기 위한 삶이 아니라 말씀을 굳게 세우기 위한 삶입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지 않고 말씀을 굳게 세움으로서 세상의 어둠이 무엇인가를 경고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만약 신자가 이 삶에 게을리 하거나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아갈 때 그는 세상의 붙듦에 붙들리고 세상과 함께 어둠에 머무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부터 죄와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삶인데도 그런 자신에 대해서 전혀 책망함이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분명 여러분의 삶의 기준과 가치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에 대한 책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세상에 머물도록 붙들고 있습니다. 그것을 뿌리치고 날마다 말씀을 세우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참된 레위인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능력으로 존재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다스려지고 순종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원하십시오. 여러분이 진심으로 말씀을 굳게 세우는 삶이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신다면 주님은 여러분에게 능력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때로 여러분을 책망하시고, 경고도 하시면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참된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에 등불로서 존재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등불이 되시고 그 등불을 따라 인생의 길을 걸어간다면 결코 실패하지 않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하늘에서 실패하지 않는 인생으로 끝난다면 그가 바로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사는 것을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