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9:22-30 기브아의 악행

수많은 세대가 흘러오면서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받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건대 과연 그 예수의 뜻과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예수를 받든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것은 오늘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를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받든다고 하고 예수님을 높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 자신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그것을 우리 마음에 두고서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고 기쁨이지만 만약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도 않고 뜻도 모르면서 예수를 남발하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을 이용하는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생각하며 사십니까? 과연 예수님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단순히 머리에서 예수님을 생각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지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지난 부활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2000년이란 기나긴 시간의 간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한들 과연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본 것이 있어야 생각을 하지요.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봤다면 그 모습을 생각할 수 있겠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 말씀을 기억해 볼 수 있겠지만 예수님과 함께 산적이 없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생각이라 해봐야 상상에 지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상상해 본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예수님을 높이고 믿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예수님을 상상하고 예수님의 모습을 어떻게 상상하든 그것은 우리들의 머리의 기능에 맡겨진 자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뇌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예수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자기 취미대로 예수님 상을 상상할 수 있는 자유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에 의해서 그려진 예수는 예수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부활주일에 말씀드리기를 예수님은 오늘날 신자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에 다시 사신다고 했습니다. 신자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이 다시 사신다면 그것은 신자가 곧 교회가 세상에 살아 계셔서 말씀하셨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기 때문이며, 말씀에 드러나 있는 예수님의 뜻과 그 마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가 예수님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예수님을 상상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일에 우리가 얼마나 힘쓰며 살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에 품고 살아가야 할 예수님의 마음과 그 뜻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행음했던 첩을 데리러 간 레위인이 장인의 권유에 의해서 몇 번씩 떠날 길을 멈추고 장인의 집에 유하다가 겨우 길을 떠난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길을 떠나서 타지에서 겪은 일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레위인이 첩을 데리고 집으로 가던 도중에 타지에서 겪은 일이라는 것이 오늘날 생각해도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레위인 일행은 집으로 가던 도중에 길에서 유숙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레위인 일행을 한 노인이 집으로 데려갑니다. 그런데 22절에 보면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비류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가로대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고 말합니다.

성읍의 비류들이란 힘으로서 남을 괴롭히는 불량배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노인의 집으로 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와 상관하겠다는 것입니다. 성읍의 비류들이란 남자들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그'란 곧 레위인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비류들의 외침을 듣고 노인이레위인 대신 자신의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 주겠다고 했을 때 그것을 마다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성읍의 비류들은 남색, 즉 동성연애를 원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부터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신앙적으로 타락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레위인이 거한 기브아 땅은 비록 이방인이 거하던 땅이지만 그때는 이미 베냐민 사람들이 그 땅을 기업으로 얻어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읍의 비류들이란 곧 베냐민 사람이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이 자신과 같은 동족인 레위인에게 남색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전체가 신앙적으로 타락해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남색은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 따위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딸을 대신해 주겠다는 노인의 말을 거절하자 레위인은 자신의 첩을 대신 내줍니다. 그리고 비류들은 그 첩을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놓아주고 첩은 레위인이 거하고 있는 집 문에 이르러 죽게 됩니다. 아침에 그것을 발견한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집으로 가져와서 열 두 토막을 내어 이스라엘 사방에, 즉 열 두 지파에게로 두루 보내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끔찍한 사건이 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까? 어찌 보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에서 삭제해도 좋을 것 같은 내용이 적나라하게 하나도 감추인 것이 없이 기록되어 있다는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이 거룩하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 그리고 문장들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사실 거룩한 내용, 거룩한 문장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거룩한 문체, 이런 것이 있는 것입니까? 거룩은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뜻 그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할 때 아무리 추하고 악한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건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면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추하고 악한 행위를 가지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악한 이 사건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이 본문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악한 이 사건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우리의 지식으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성령님의 지혜로서 보여지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오늘의 사건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악함입니다. 왕이 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던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이스라엘 내에서 어떤 악함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입니다.

11,12절에 보면 "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왔을 때에 해가 지려 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이르되 청컨대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사이다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외인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레위인은 이방인의 성읍에서 유숙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인 같은 이스라엘 자손이 거하는 곳에서 거하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18절의 "그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 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신 10:19절에 보면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나그네를 사랑하고 대접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레위인은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거하는 곳에서 유숙을 하면 나그네로서 환대를 받을 수 있을 것을 기대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기브아에 거하고 있던 베냐민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기준도 아니고 원칙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말씀은 무너진지 이미 오래이며 그들은 다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살았을 뿐입니다.

그 증거가 15절에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이켜 들어가서 성읍 거리에 앉았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었더라"는 구절입니다. 레위인이 나그네로서 성읍 거리에 앉아있었지만 그들을 집으로 영접해서 유숙케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비류들만이 아니라 그 성에 거하는 베냐민 사람들 전체가 말씀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이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가던 베냐민 사람들에 의해서 레위인이 유숙할 곳을 얻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비류들에 의해서 처참한 일을 겪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해주고 있는 이스라엘의 악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스라엘의 악함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디를 봐도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합니다. 남자와 상관하겠다는 추한 모습은 적어도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남자와 상관하겠다는 그들의 행동을 보지말고 힘으로서 레위인을 괴롭히고 그의 첩을 죽게 한 그들의 속성을 봐야 합니다.

그들은 힘을 가지고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행동을 멈추게 하지를 못합니다. 마치 우리가 비록 동성연애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삶에서 잘못된 것들이 말씀에 의해서 멈추어지지 않은 채 거침없이 행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말씀의 지시를 받아 행동하는 삶이라면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잘못됨을 경고 받을 것이고 그리고 멈추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있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대해서 귀를 막아 버리고 오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멸망 받을 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행하고 있었고 우리 역시 그러한 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악함은 우리와 상관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악함 속에서 예외의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바로 레위인을 영접했던 노인입니다. 기브아에 살고 있었던 노인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베냐민 사람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기브아에 거하던 베냐민 사람이 모두 외면하던 나그네 레위인을 영접한 것입니다.

19,20절을 보면 "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보리가 있고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 우리들과 함께한 소년의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나이다 노인이 가로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모든 쓸 것은 나의 담책이니 거리에서는 자지 말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레위인이 자기들의 쓸 것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말한 것은 혹 노인이 자신에게 피해가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레위인의 말에 대해서 노인은 레위인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담책'이라고 합니다. 담책이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노인은 레위인이 가지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나그네를 영접하고 그의 쓸 것을 공급하고 대접하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노인은 레위인을 내어달라고 하는 비류들에게 레위인 대신 자신의 딸과 첩을 내어주겠다고 합니다. 레위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인 자기 딸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이것이 과연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우리는 노인의 이 마음에서 우리를 심판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치를 놓고 볼 때 레위인이 아무리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설사 귀하고 높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딸보다는 못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기 자식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노인은 사랑하는 자신의 딸을 버리고 대신 자신과 상관없이 다만 나그네로서 자기 집에 영접해 들인 레위인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을 포기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노인의 이 마음은 이스라엘의 악함과 완전히 대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힘으로서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이스라엘의 모습과는 반대로 말씀에 의해서 나그네를 대접하되 자신에게 피해가 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지키는 그 모습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노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악함이 더욱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앎은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증거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말씀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면 아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자의 삶과 모르는 자의 삶이 같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는 약자에 대해서 어떠한 모습을 보이느냐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본문에서는 나그네를 힘으로 괴롭히는 무리들과 나그네를 영접하고 자신의 딸을 희생하기까지 지키고자 하는 노인 한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마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속에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사셨던 모습은 무엇입니까? 약자로 오신 예수님은 약자를 가까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세상이 무시하고 천대했던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가까이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힘으로서 약자를 무시했던 세상을 정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과 그 뜻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면 신자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은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생각하며 사십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강자로 오신 분입니까 약자로 오신 분입니까? 그리고 그분이 약자들에게 어떤 마음을 보이셨습니까? 신자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삶을 산다면 그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은 약자와 함께 하는 것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한다는 사람이 약자에 대해서 세상처럼 무시하고 천대한다면 그를 과연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예수님을 생각하신다면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사셨는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곧 여러분의 마음이 되어서 세상을 살아갈 때 예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세상에 살아 계시며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레위인이 시체를 열 두 토막을 낸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단순히 자신의 첩이 죽은 것에 대한 분노의 표시로만 봐야 할까요?

레위인은 시체를 열 두 토막을 내서 이스라엘 사방으로 보냅니다. 레위인의 이러한 행동은 베냐민 지파의 악한 행동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시체를 토막내는 악한 행동을 함으로서, 그리고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보내서 기브아에서 당한 일이 이처럼 악한 일이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30절에 보면 "그것을 보는 자가 다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일은 행치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토막난 시체를 봄으로서 비로소 이스라엘이 어떤 악에 빠져 있는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껏 자신들의 악에 대해서는 잊고 살았습니다. 자신들 안에서 어떤 악이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서도 그것을 악으로 여기지 않았고 악에 대해서 분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레위인이 보낸 악에 의해서 되어진 일을 보면서 분노합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 그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로 인해서 나타난 어떤 악한 일이 없다는 것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두려운 것은 악을 악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악이 악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악을 옳은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자를 무시하고 나보다 못한 자로 업신여기면서도 그것이 악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마음에서 이미 예수님의 마음이 사라진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내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이 인간의 악의 실체인 십자가를 봄으로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악을 대신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곧 신자의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브아에서 자행된 악함에서 한 노인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마음, 나그네를 베냐민 사람들처럼 무시하지 않고 영접해들이고 그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딸까지 희생시키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 마음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그 자비로우심으로 인해서 산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가 살았다는 것을 말하고 끝날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 배후에 계시는 주님의 피흘리심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마음이 생명을 얻은 신자의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나그네를 영접하는 그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약자로서 약자를 가까이하는 것이 예수님이 세상에서 보이신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신자로서 바로 그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보이고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약자로 살아가야 할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너무나 고맙고 귀하기에 약자의 자리에서 약자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즐거운 자가 바로 신자입니다. 이러한 삶을 소원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우리의 삶의 책임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보내신 약자는 약자로 살아가는 여러분으로 인해서 마음에 즐거움을 얻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