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20:1-11 이스라엘의 분노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 개입하여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 신자된 사람들이 말하는 바지만 과연 말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그렇지 못하다'는 답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뜯어보면 하나님이 개입하신 일이고 삶이라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신자로서의 삶의 자세가 참으로 희미하다 못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 분명 우리들의 머리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신 삶이라는 것에 대해서 부정하고 싶지는 않으면서도 삶의 자세에서는 하나님이 개입하심을 믿는 믿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일상 생활에 하나님이 개입하여 일하고 계심을 믿을 수 있는 어떤 흔적이나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머리로는 믿으면서도 그 삶은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심을 망각하고 살아간다면 결국 사사기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삶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왕이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왕이 되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감각하고 느낄 수 있는 기준으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고, 또 우리가 확연하게 깨닫고 알 수 있는 어떤 표징과 기적을 도구로 하여 움직이는 경우도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알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분명한 기준으로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고 우리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가 느낄 때 마치 하나님이 없이 나의 힘으로 내가 일함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뿐이지 사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할 때 하나님은 왕성하게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일상 생활에 개입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은 결코 은밀한 것도 아니고 조그마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게 일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왕성하게 일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 거창한 구원이나 깜짝 놀랄만한 회심을 기대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이 일하시는 증거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술고래에다가 골초에다가 개망나니 같은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더니 하루아침에 술 담배를 끊고 사람도 아주 순하게 변화되었다고 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말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흔적을 아주 거창하고 깜짝 놀랄 만한 일에서 찾으려고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주 평범한 일, 미미하다고 생각되는 일에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창하고 깜짝 놀랄만한 일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큰 실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언제나 똑같은 일과와 날마다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범하는 잘못에 대해서도 전혀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혹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거창한 구원이나 깜짝 놀랄만한 회심 등 변화를 통해서 체험하고 발견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으시다면 속히 버리시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게 하는 원인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여러분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가게 만들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날마다 반복되는 삶에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잊고 살아갈 때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찾거나 하나님에게 물으며 살아가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살아가는지 조차도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나 자신의 문제점을 보지 못하고 살아갈 때 결국 타인의 문제점만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신자가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계시고 날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보지 못하고 살아갈 때, 그리고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 어떤 모습이 드러나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 사이에서 전쟁이 시작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지난 주일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던 것은 레위인의 첩이 기브아 성읍의 비류들에 의해서 죽게 되자 그 시체를 집으로 가져가서 토막을 내고 이스라엘 사방에 보낸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나그네였던 레위인의 일행을 영접하고 성읍이 비류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레위인을 위해서 자신의 깨끗한 딸까지 비류들에게 내어주는 노인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서 생각했었습니다.

오늘은 레위인의 행동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 그리고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자신이 당한 일을 고하는 레위인을 통해서 과연 우리는 이웃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왔는데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이었으며"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왜 모였는지, 그리고 사십만이라는 대군이 왜 칼을 빼어들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자기들에게 보내어진 토막난 시체에 대해서 그 연유를 알아보고 지금까지 없었던 악에 대해서 심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에게 토막난 시체를 보낸 레위인에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고하라고 합니다(3절). 이에 레위인이 자신이 기브아 성읍에서 당한 일을 고하게 되는데 그가 말한 것을 보면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내 첩으로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나의 우거한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한지라"(4-5절)는 것이었습니다.

레위인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기브아 성읍의 베냐민 사람이 행한 악에 대해서 분노하고 망령된 일을 행한 그들을 징계하자고 마음을 합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베냐민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게 된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처럼 전쟁이 시작되게 된 배경에서 과연 전쟁이 옳은 것이냐 틀린 것이냐를 생각하기보다는 기브아 성읍의 비류들에게 악한 일을 당한 레위인이 그 일에 대해서 복수하기 위해 벌인 일과, 그 일에 대해서 처리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보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자신이 당한 일을 고하는 레위인의 말과 레위인의 일을 처리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행동입니다.

먼저 레위인이 자신의 당한 일을 고하는 그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4-5절에 나오는 레위인의 말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베냐민 지파에 대해서 분노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레위인은 베냐민 자손들에게 악한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베냐민 사람 전체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성읍의 비류들 몇 명에 의해서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인은 성읍의 비류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라고 말함으로서 마치 자신이 당한 일이 베냐민 사람들 전체에 의해서 되어진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5절의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라는 말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기브아 사람들이 레위인을 치려고 했던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레위인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성읍의 비류들에서 성읍 사람의 전체로 확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인은 나를 죽이려고 내가 우거하는 집을 에워쌌다고 말하지만 성읍의 비류들은 죽이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상관하겠다고 했었으며, 레위인의 첩 역시 따져 보면 레위인이 자신이 살겠다고 첩을 대신 내어 보냄으로 인해서 죽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인은 기브아에 거하는 베냐민 사람들이 자신의 첩을 죽이고 자신마저 죽이려고 했다고 말함으로서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베냐민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하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당한 일을 극도로 부풀려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레위인의 말을 생각해 볼 때 레위인의 마음에는 오직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해서 복수하고자 하는 것 밖에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일상생활에 개입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모습만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기사 레위인이 행음한 첩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처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이미 그가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레위인의 말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자에게서 나오는 말이라고 생각해 볼 때, 우리 역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바로 그와 같은 모습의 말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레위인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기브아에서 당한 일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요? 첩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당연히 죽었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첩이 죽게 된 것에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 본다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인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남는 것은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한 악한 감정과 분노입니다. 그리고 그의 악한 감정은 성읍의 비류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브아 성읍의 베냐민 사람 전체로 확산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레위인은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당한 일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당한 일에도 하나님의 일이 개입되어 있음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복수하겠다는 마음만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갑니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먼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합니까 아니면 단지 우리들의 감정을 가지고 행동합니까? 아마 대개의 경우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생각하기보다는 우리의 감정이 앞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감정에 의해서 일을 부풀려 말하기도 하고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꾸미기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항상 말씀이 앞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의해서 행동되어져야 하고 말씀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문제와 허물이 보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서 하나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다스려지고 자기 허물이 발견되어질 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이나 입장이나 체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며 말씀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타인에 대해서 말할 때, 더군다나 누군가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 그에 대해 좋은 말을 하게 됩니까? 아마 대개의 경우 레위인처럼 부풀려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만 그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그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고 싫어해 주기를 바라면서 말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무엇을 잊고 있는 것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잊어버리고 다만 우리 자신의 기분과 감정만 소중히 여기면서 감정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레위인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8절에 보면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며 가로되 우리가 하나라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며 하나라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악한 행위를 한 베냐민 사람들을 심판하기 전까지는 결단코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은 마치 죄에 대해서는 참지를 못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처럼 보여집니다. 하지만 과연 이스라엘의 이러한 행동이 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까?

10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망령된 일을 행한대로 베냐민 사람을 징계하겠다고 나섭니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이스라엘 내에서 죄악을 제하고 신앙을 보존하고자 하는 열심으로 높이 평가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일 수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행동을 신앙을 지키기 위한 행동으로 높이 평가해야 한다면 우리는 죄를 범하는 자들을 찾아서 징계하는 일에 부지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5절에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를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은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보고 그것을 빼낸 사람이어야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죄를 볼 수 있고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며 자신의 죄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서 회개하는 자들이 형제에게 있는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형제를 키를 가지고 말하고 그것을 문제삼고 심판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 있는 큰 문제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는 전혀 보지 못합니다. 다만 레위인의 말을 듣고 베냐민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할 뿐입니다. 즉 남의 말만 듣고 속단하면서 그들을 징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그들이 죄에 대한 심판자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죄에 대한 심판자가 누구십니까? 오직 하나님 밖에 안계십니다. 하나님만이 죄에 대해 심판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죄없는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마지 자신들은 정당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마치 죄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는 의로운 자처럼 행동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오직 의를 수호하는 듯한 모습이지 자신들의 문제와 죄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모습은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악에 대해서 자신들은 정당하고 깨끗하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이상 심판자로 존재할 뿐이지 악행을 범한 자와 같은 악한 자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악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들고 하나님을 찾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의를 구하고 악에 대해서 미워하는 자들이었다면 그들은 먼저 자기 자신들부터 심판해야 했습니다. 자신들의 죄와 악을 먼저 깨닫고 형제의 문제를 대할 때 본문과 같은 죄에 대한 심판자와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문제나 죄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합니다. 죄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분을 가지고 행동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죄를 보일 때 그것을 그냥 넘어가지를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과연 우리가 우리 자신의 들보를 보고 행동하느냐는 것입니다. 혹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보는데 우리 자신에게 있는 들보는 전혀 보지 못한 채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허물과 죄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허물을 허물로 여기지 않고, 설사 허물이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행동에 비하면 허물도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문제로 예수님을 찾고 회개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 전혀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죄에 대해서 심판하는 일을 위임을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죄를 심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심판을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는 모든 성도들, 우리의 형제들은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총 아래 거하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아는 성도라면 형제의 죄에 대해서 심판하려고 하기보다는 형제가 잊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총이 어떤 것인가를 일깨워주기 위해서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개입하여 일하시고 활동하시는 증거입니다. 비록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미미한 것으로 생각되어지지만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고,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해 보는 변화가 일어나고, 형제의 허물과 죄를 보기보다는 나 자신의 허물과 죄를 먼저 보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고, 그래서 형제에 대해서 말을 할 때는 나의 감정과 미움의 마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말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 모든 것은 성령을 보내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여러분 가까이에서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생활에 개입하여 일하고 계심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거창한 것을 기대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게 되고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악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들고 그리스도를 찾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혜라는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지혜라는 선물은 우리의 나약함과 죄많음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발견하고 볼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신자는 마땅히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당한 일만 생각하고 감정을 먼저 앞세웁니다. 미움을 간직 한 채 서로에게 목의 가시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를 보게 하십니다. 애매하게 죽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활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