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20:17-28 이스라엘의 기도

기독교인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기도일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도로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기도에 걸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는 것은 오직 기도하는 것밖에 없다'라든가 '기도로 승부를 걸자'라는 말들이 심심찮게 교인들에게 외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은석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기도와는 거리가 먼 교회처럼 보여집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자 남몰래 많은 기도를 하고 계시리라 믿고 싶지만 만에 하나라도 기도 없이 살아가는 삶이 곧 여러분의 삶의 실제라면 그거야말로 은석교회의 크나큰 위기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수많은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비신앙적인 기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로 인해서 아예 기도하는 것 자체를 백안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로 기도를 의미 없는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볼 때, 또 선지자들과 사도들도 기도한 것을 볼 때 기도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들이 하고 있는 비신앙적인 기도에 대한 비판보다는 우리 자신들이 기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기도가 없는 사람이나 비신앙적인 기도에 열심인 사람이나 다를 바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을 결코 정당화하지도 인정하지도 마시고 과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설사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지말고 '내 기도는 정당한가'를 먼저 물으시기 바랍니다. 정당하지 않는 기도는 단지 우리의 종교적인 열심과 노력일 뿐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기도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분위기입니다. '무엇을 기도하는가?'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가?'에 대해서는 살피지 않고 '기도를 하는가 안하는가'에만 치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떤 기도를 해도 기도하면 그것으로 신앙인으로 취급받는 분위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도 우리와 같은 마음일까요? 어떤 기도를 한다고 해도 단지 기도했다고 해서 들어주시는 하나님일까요?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신자가 아니라고 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급한 일이 생기면 신을 부르면서 자신의 일을 잘 봐달라고 애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참된 기도는 하나님을 모르고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앎으로 하게되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시간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는 태도로 구분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구분되어질 뿐입니다.

물론 누구나 '나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종교행위에 대해서 전혀 의심을 하지 않고 오히려 확신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행위에 대해서 확신을 가진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확신으로 인해서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모든 것을 거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확신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설사 성경이라 할지라도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상식으로 알고 있는 기도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기도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베냐민을 치기 위해서 모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세 번의 기도를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18절과 23절, 28절의 말씀인데 이 세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도의 내용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먼저일지니라"고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은 베냐민을 치기 전에 기도를 합니다. 그 내용은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우리가 지금 못된 베냐민 사람을 심판하려고 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갈까요?'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생각에는 '이스라엘이 비록 신앙이 엉망이었다고 해도 역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흔적은 남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신앙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그들이 전쟁을 하기 전에 하나님에게 묻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즉 기도한다는 것 자체를 신앙으로 여기기 때문에 기도한 것을 신앙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기도하는 것에 관심을 둘 뿐 무엇을 기도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라는 이스라엘의 기도가 정당한 것입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이 베냐민 지파를 징계하기 위해서 군사를 모집한 것은 자신들은 베냐민 자손과는 다르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베냐민 자손과 같은 악한 일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베냐민에 비해서 의롭고 그렇기 때문에 베냐민을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보시기에는 베냐민이든 이스라엘이든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악을 행했다면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심판할 자격은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베냐민을 이스라엘에게 붙일 때에만 심판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의의 존재로 보고 악을 행한 베냐민을 심판하려고 하는 그 모습이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라는 기도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기도를 보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베냐민을 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가 먼저 칠 것인가를 하나님에게 묻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전혀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악한 일을 행한 베냐민을 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하나의 형식으로 '누가 먼저 올라가느냐?'는 것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칠 것을 결정하고 하나님에게는 누가 먼저 칠 것인가만 결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우리가 과연 베냐민을 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은 인간이 미리 결정하고 하나님에게는 자신들이 미리 결정한 행동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기도였고 바로 오늘 우리들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누가 먼저 칠까요'는 치는 것을 이미 정해 놓은 기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역시 자신들이 베냐민을 치는 것은 옳게 여기신다고 미리 결론을 내린 기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이러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 쪽에서 미리 자기 일을 결정하고 결정한 일을 들고 나와서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와 이스라엘의 기도가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이처럼 기도에서 크게 잘못된 것은 할 일을 인간이 미리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일을 도우시면 되는 것으로 인식을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창조주와 피조물이 뒤바뀐 것이 아니겠습니까?

피조물은 창조주가 계획하시고 결정하신 일에 순종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지 계획하고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또한 인간이 계획하고 결정한 일을 도와주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뜻대로 일하실 뿐 인간의 뜻에 의해서 행동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기도는 분명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기도가 잘못됐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고 '유다가 올라가라'고 말씀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처럼 보여집니다. '누가 올라갈까요'라는 물음에 '유다가 올라가라'고 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21절에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는 말씀을 보면 결과는 이스라엘의 패배로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군사는 40만 명이었고(17절) 모두가 용맹한 전사들이었습니다. 거기에 비해 베냐민 군사는 이만 육천 칠백에 불과했습니다(15절). 분명 숫적으로 볼 때 베냐민은 이스라엘의 상대가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이스라엘 군사 이만 이천이 죽은 것입니다. 40만의 이스라엘 군사가 나약한 어린이나 노인이었다면 이해가 되지만 분명 그들은 전사라고 말합니다. 즉 싸움에 있어서는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 40만이 이만 육천 칠백을 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이스라엘의 기도 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기도에 대해서 '유다가 올라가라'는 응답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패배했다는 것은 응답 자체가 이스라엘의 승리를 보장한다거나 이스라엘의 기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올라갈까요' '유다가 올라가라' 누가 봐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라면 '너희들이 베냐민을 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식의 말씀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응답에는 우리를 치기 위한 응답도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잘못됨을 가르치기 위해서 '올라가라'는 응답을 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베냐민에 의해서 패배한 후 다시 하나님에게 기도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서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23절)는 기도를 보면 기도가 조금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우리이까'에서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나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로 바뀐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기도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베냐민 자손에서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으로, 누가 먼저 싸우리이까에서 다시 나아가서 싸우리이까로 바뀐 것입니다. 즉 싸움을 당연하게 여겼던 이스라엘이 싸워야 하는가를 묻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패배로 인해서 자신들이 싸우는 것이 정당한가를 하나님에게 묻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기도에 하나님은 다시 '올라가 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베냐민을 치게 되고 또 다시 베냐민에 의해서 일만 팔천 명이 죽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이 이스라엘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대로 했는데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던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울면서 하나님에게 나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기도를 하게 됩니다. 세 번째 기도는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셨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묻자오되 내가 다시 나가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28절)고 말합니다.

이렇게 세 번째 기도까지 보면 이스라엘의 기도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에서는 '누가 먼저 싸우리이까'라던 이스라엘이 두 번째 기도에서는 '다시 나가 싸우리이까'라고 묻게 되고 세 번째 기도에서는 '다시 나가 싸우리이까 말리이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보면서 이스라엘의 기도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발견하셨습니까? 처음에는 자신들이 베냐민을 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칠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에게 나왔던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쳐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이 베냐민을 치겠다고 한 것 자체를 포기한 것입니다. 자기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에게 묻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참된 기도의 모습입니다. 싸워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는 우리에게는 베냐민을 칠 정당성이 없음을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싸우라하면 싸우고 말아라 하면 말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징계할 자격이 없기에 하나님에게 묻고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달라진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달라짐은 무엇으로 되어진 것입니까? 계속되어진 패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올라가라'는 것은 이스라엘을 인정하신다거나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을 가르치기 위해서 고의로 패배로 인도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패배케 하셨던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깊이 인식한 자들만이 참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싸우리이까 말리이까'라는 기도를 하게 된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이스라엘이 스스로 깨달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패배로 이끄신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들의 일이 정당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했는데도 결과는 실패로 끝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기도가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정성이 부족했다던가 믿음이 적어서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과연 이스라엘이 기도에 대한 믿음이 없고 정성이 부족하다는 문제 때문에 싸움에서 두 번이나 패배했습니까? '올라가라' '싸우라'고 말씀하신 것은 분명히 허락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을 가르치기 위한 허락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스스로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자신들의 계획을 들고 나왔고 베냐민에 비교해서 자신들은 의롭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이 계속되는 패배로 인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계획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묻습니다.

기도는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일으키시는 상황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기도하는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기도가 아니라, 즉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포기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즉 싸우고 말고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기도입니다. 이스라엘은 계속된 패배에서 그것을 배운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들 생각으로는 베냐민은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올라간 이스라엘은 패배를 하고 맙니다.

이같은 상황은 보면 마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치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삿 1:1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의 첫 번째 기도와 같은 내용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가나안을 정복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나안을 이스라엘에 붙였기 때문에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마치 자신들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베냐민을 칠 수 있다고 여깁니다. 단지 누가 먼저 올라가느냐가 남았을 뿐 베냐민이 패배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패배함으로서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세상을 우리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들의 계획과 노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 직장을 다니고 내 실력으로 성공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대기하셨다가 내가 부르면 달려와주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기도가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자신감에 가득찬 기도이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지 않는 형식적인 기도일 뿐입니다.

기도하셨습니까? 그러면 그 기도는 과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여러분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자로서의 기도였습니까?

잠언 30:7-9절에 보면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는 기도가 나옵니다.

이 기도를 보면 우리와 똑같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무엇을 달라고 합니까? 먼저는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해달라고 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허탄함을 좇는 것과 거짓말을 하는 것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배부르다면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 자라는 것을 능히 알기에 부하게 하지 말아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고, 가난할 때 능히 도적질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있는 자이기에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기도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로 살아가는 것에 있는 것이지 자신의 부함이나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실패하게 하셔서 우리의 무능을 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의와 불의 사이에서 갈등하게 하심으로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자신을 실감하게 하십니다.

이처럼 나약은 자신의 거짓과 불의를 발견한 사람이라면 잠언서의 기도처럼 '나로 하여금 거짓과 불의에서 멀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신자라면 우리의 성공이 급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세상의 허탄함과 불의함에서 거짓에서 우리의 탐욕에서 멀어지게 해달라는 기도가 간절함으로 나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거짓과 불의함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면서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증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마음을 두지 않고 있는 것이고, 거짓과 불의 등 악에 대해서도 미워함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을 그러한 상황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 계획을 위한 기도에서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기도를 하는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기도에 관심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에게 벌어지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신자는 항상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기도하게 될 것이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능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