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20:29-35 패배의 의미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은 분명히 인간 스스로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믿음'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다 아는 말이지만 이것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대개 믿음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단순히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이 마치 자신의 열심과 노력에 달린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해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믿고 있다'는 것 때문에 믿음의 여부가 결국 자신에게 달린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고 스스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스스럼없이 말하기를 '믿음을 가져라'고 하기도 하고 '열심을 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들이 교인들로 하여금 믿음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인식을 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선물이라면 믿음은 외부로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즉 사람에 의해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한다면 구원의 능력은 믿음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열심이나 의로움, 또는 세상이 말하는 바른 양심이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은 곧 믿음이 우리를 붙들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서 우리를 소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고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마음에 두고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짐으로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에게 믿음이 주어진 것으로 인해서 그가 완벽한 인간이 되고 죄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옛 본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자의 중요한 것은 옛 본성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심으로 인해서 주어진 새로운 본성, 즉 새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신자로서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날마다 자신이 살아가는 것이 옛 본성을 따라가는 것인지 아니면 새사람으로서 성령을 따라가는 것인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려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이제 자기 구원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받았다면 그것은 이미 구원의 축복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자라면 자기 구원에 대해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생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남은 인생을 하나님이 기뻐하기고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삶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명이요 책임이라고 여기면서 말입니다.

다시 앞서 얘기했던 '믿음은 선물이다'는 얘기로 돌아가십니다. 여러분이 다 알고 계시는 '믿음은 선물'이라는 말을 거듭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선물이라는 말 자체로 그치지 말고 믿음이 선물이라는 말을 깊이 이해하고 살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일단 주어진 믿음이 다시 회수되거나 취소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한번 주신 선물을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다시 회수해 버리는 것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당초 믿음을 선물로 주실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 되는데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믿음을 주셨을까요? 믿음도 없었는데 하나님에 마음에 들었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분명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자비의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믿음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옛것을 찾아서 믿음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믿음에 붙들기 위해서 책망하시고 심판하시면서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곧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사기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과연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게서 바라시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를 보고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사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고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공격을 해서 베냐민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같은 동족끼리도 서로 원수처럼 죽고 죽이는 일에 대한 기록이 많습니다. 우린 그러한 내용을 보면서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에 말씀드린 대로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치는 과정에서 패배를 하고 결국 그들의 기도가 바뀌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치기로 결정을 하고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누가 먼저 올라가서 칠까요?'라는 기도를 맨처음 하게 됩니다. 이 기도에는 이스라엘의 정의감이 실려있다고 말했습니다. 악은 결코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정의감에 불타는 전쟁이고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자신들의 행동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의 기도에 하나님은 '유다가 올라가라'고 하셨고 이스라엘은 결국 적은 수인 베냐민에게 패배를 하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비록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여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거룩한 일이라고 여겼던 일이지만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착각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수준이었고 오늘 우리들의 수준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은 주어졌다가 다시 회수되었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주어지면 믿음이 우리를 붙들어서 하나님에게 인도해갑니다. 교회에 오면 믿음이 생겼다가, 교회 밖에 나가면 믿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삶이 되도록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 자와 믿음이 없는 자의 삶이 같을 수 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자라면 오직 믿음으로만 되어지는 삶의 모습이 보여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으로만 되어지는 것, 이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나쁜 짓을 한 베냐민을 치는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나쁜 짓을 한 사람에 대해서 분노를 하고 그들을 혼내주고 싶은 마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즉 정의감, 악에 대한 분노, 이런 마음이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있느냐는 것입니다. 불행한 일을 당한 자를 보고 동정하고 도와주는 것은 믿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음의 일을 말하려면 '이것은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되어지지 않는 일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봤을 때 정의감이나 악에 대한 분노 남을 도와주는 것 등등의 일들을 믿음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은 믿음이 없는 자에게서도 얼마든지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봤을 때 단지 악에 대해서 분노하고 악을 행한자를 심판하려는 이스라엘의 행동을 믿음으로 하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행동이 분명 세상적인 시각에서 볼 때는 옳은 것일지 몰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잘못된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패배하게 하신 것입니다.

패배한 이스라엘이 두 번째 기도할 때 '우리가 베냐민을 쳐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패배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기도에서는 '우리가 쳐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서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의 변화는 처음에는 자신들의 계획과 일이 옳다는 결정을 내리고 하나님을 찾았던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베냐민에 대한 일을 하나님에게 묻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자신들은 베냐민을 심판할 자격이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베냐민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모습은 자신의 부족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한순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잊지 않는 것이 곧 믿음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임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없이는 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행동에서 의를 찾고 자기 의를 기준으로 해서 타인을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가 더 크다는 생각이 들 때 타인을 스스럼없이 책망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베냐민이 옳은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베냐민 사람으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셨다고 해서 베냐민을 인정하신 것이고 베냐민 편을 든 것입니까? 베냐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악을 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베냐민을 승리하게 하신 것은, 악을 행한 베냐민을 치는 것 자체가 의가 아님을 먼저 가르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베냐민이 처참한 패배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베냐민 모두를 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양쪽 모두 심판을 받아야 할 자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린 한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은 악은 베냐민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베냐민을 이스라엘이 징벌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양쪽 모두를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양쪽 모두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할 악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악이 곧 교만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은 베냐민을 징벌할 자격이 있다고 여겼던 것이 교만입니다. 베냐민을 징벌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베냐민에 비해서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잊어버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베냐민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라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 승리하자 그들은 기고만장하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들 편을 들고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에 대해서 승리를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과연 자신들 편을 들만큼 자신들이 의로운가를 생각해본다면 결코 승리에 도취되어 전쟁에 자신감을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스스로 이르기를 이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패한다 하나 이스라엘 자손은 이르기를 우리가 도망하여 그들을 성읍에서 큰 길로 꾀어내자 하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베냐민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시겠다고 말씀하신 다음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칠 때 작전을 세웁니다. 거짓으로 패배하는 척하고 베냐민 사람을 성읍에서 나오게 하고 그 틈을 노려서 성읍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베냐민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의해서 유인되는 줄을 모르고 기브아 성읍을 떠나서 이스라엘 군사들을 추격을 했습니다. 그리고 도망을 치던 이스라엘은 미리 매복해 있던 군사와 함께 베냐민 사람을 쳤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 일백이 죽게 됩니다.

이러한 전쟁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십만이 되는 군사를 겨우 몇만의 수를 가지고도 승리했던 베냐민 사람들이 한순간에 참담한 패배를 하게 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힘으로 삼고 그 힘으로서 승리의 여부를 따지는 우리의 상식 가지고는 이해가 안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대로 전쟁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것이고 패배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승리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 편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금물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의 편을 들어서 승리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패배하게 하셔서 그들의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승리를 주신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승리했다고 해서 교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베냐민 사람을 칠 정도로 의롭지 못합니다. 베냐민 사람은 악하고 이스라엘은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치는 것이 정당하지 못하며 이스라엘이나 베냐민이나 똑같은 자임을 가르치기 위해서 패배하게 하신 것입니다.

베냐민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승리했다고 해서 자신들의 힘을 믿거나 하나님이 자기편이라는 착각에 빠지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스라엘에 승리하고 하나님이 우리편이 될 만큼 의로운가에 대해서 심사숙고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이고 믿음이 있음으로 인해서 보여지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베냐민 사람들도 이런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자기 잘난 맛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자기 착각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양쪽을 치심으로서 인간의 악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한 답을 미리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쁜 일을 한 사람은 못살고 벌받는 것이 당연하고 착한 일을 한 사람은 복을 받고 잘살아야 한다는 답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답을 주셨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상식과 생각으로 미리 답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위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우리가 가진 답과는 반대의 현상이 많이 일어납니다. 착한 사람이 망하고 무너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반면에 악하다고 여겼던 사람이 오히려 성공하고 잘사는 것을 봅니다. 그럴 때 대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하나님, 왜 착한 사람이 못살고 나쁜 사람이 잘사는 것입니까?'라는 불평을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답과는 다르게 나타난 현실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기도를 해도 자신이 미리 답을 가지고 기도를 합니다. 이스라엘이 '누가 먼저 올라가리이까'라고 묻는 기도는 이미 베냐민 사람을 치는 것이 정당하고 하나님 역시 그것을 인정하신다는 답을 가지고 하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나쁜 사람을 치는 것인데 하나님이 반대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스라엘도 베냐민과 같은 인간입니다. 똑같이 악합니다. 베냐민을 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악이었던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나쁜 사람보다 잘살아야 한다는 것이나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잘살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생각이고 바램이고 당연한 이치라고 여기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 자신 역시 우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우리가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점을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교만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잘난 것에 도취되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베냐민 사람이 승리에 도취되어서 한번 승리했는데 저까짓 이스라엘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나아간 교만이 바로 오늘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승리에 도취되면 자기 힘을 과시하고 믿게 됩니다. 즉 스스로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감을 심판하셨던 하나님의 일이 여호수아 7장에서도 등장합니다.

수7:3절을 보면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 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 하므로"라고 말합니다. 아이 성보다 큰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이스라엘은 아이 성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여리고를 그들 손에 붙이셨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승리를 자기 힘으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 힘이라면 아이 성은 삼천 명만 가도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결국 그들은 패배하고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또 아이 성이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두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복병을 감추어 두고 거짓으로 패한 척 도망하자 아이 사람들이 쫓아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베냐민 사람들이 패한 모습과 비슷합니다. 자신들의 승리와 힘을 과신한 나머지 상대방을 무시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이 성을 들어서 이스라엘의 교만을 치시고, 나중에는 이스라엘을 들어서 아이 성의 교만을 치신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전쟁사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승리와 패배는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었으며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을 믿고 나온 사람은 패배했고,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겸손히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고 나올 때 하나님은 그들을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 앞에서 악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시는 악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과 손으로 모든 것을 이뤄보려는 것은 인간의 야심일 뿐 결코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로 이것은 정당한 일이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이 되는 것이라는 답을 내려놓고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정당한 일이니까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교만으로 보신다는 것을 다시금 마음에 새겨두셔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성공을 위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성공을 위해서 기도하기보다는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나의 성공을 도와줘야 할 만큼 나는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사람인가를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이며 믿음입니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벗어나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일생에 있어서 단 몇 분 몇 초라도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사랑이 필요 없는 의에 거하는 적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신자의 의는 이처럼 자신이 악한 존재임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앞에 나오는 것이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이 의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 없이 안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의감입니까? 아닙니다. 악에 대한 분노입니까? 역시 아닙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믿음이 없는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훌륭하게 보여지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마치 믿음의 모습인양 떠들어봐야 세상 사람들에게는 '내가 비록 교회는 안다니지만 예수 믿는 마음으로 산다'는 말만하게 할 뿐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 존재임을 마음 깊이 자각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내가 잘되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옵니다. 이런 믿음이 있는 신자들만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순종할 것입니다. 패배하게 하시면 패배한 속에서 자신을 볼 것이고, 승리하게 하시면 승리한 속에서 자기 잘남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할 자격이 없는 자에게 승리가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생각하고 결코 교만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하는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잘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에게 나의 성공과 잘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만큼 정당한 인간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우리들 속에 그러한 마음을 유지시켜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즉 신자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잊지 않는 마음으로 산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능력 아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이 없고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항상 행위를 보면서 남과 자신을 구분하고 나는 의롭고 착하고 너는 나쁘다는 인식을 버리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스라엘과 베냐민 사람의 전쟁을 생각하시면서 진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이 도우심이 없이는 신자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깊이 자각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신자의 겸손이고 믿음이며 믿음이 없이는 결코 보여질 수 없는 신자들의 독특한 행위임을 마음에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