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21:1-12 가나안 땅이더라

사사기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는 말로서 끝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곧 사사기의 결론으로서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었는가를 잘 말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세우신 규례와 법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삶의 기준과 원칙으로 세우신 규례와 법칙이 있었다면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하는가는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이스라엘로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규례와 법도에 의해서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이 수정되어지고 결정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신앙하고 있음이 증거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에 의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된 이스라엘이며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마지막이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로 끝나는 것을 보면 결국 당시 이스라엘의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성품으로부터 보여지는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가 있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규례와 법도를 단지 구약의 의미를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바치고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고 말하는 당시 이스라엘에서도 의식적인 것은 지켜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26절에 보면 베냐민 사람과의 전투에서 거듭 패한 이스라엘이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하나님에게 기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또 오늘 본문 4절에도 "이튿날에 백성이 일찌기 일어나서 거기 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는 구절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의 타락이 다만 하나님 앞에 행해져야 할 의식에 대한 소홀함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생각한다면 사사기의 말씀이 의식의 회복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볼 때 이스라엘의 문제는 의식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규례와 법도란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규례와 법도가 의식을 말하고 있고 그 의식에 소홀히 하지 말것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고는 있지만 이것이 단지 의식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 제정하신 의식이나 절기들 이 모든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이나 절기는 모두가 무엇을 가르치고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서 세워진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이나 표적의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이나 표적은 이적과 표적 그 자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적과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의도하는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규례와 법도를 단지 우리가 행하고 지켜야 할 의식이나 절기 등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규례와 법도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맥추절 추수절을 지키라고 명하셨다면, 정한 날이 되어서 맥추절과 추수절이란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이 아니라 맥추절과 추수절을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깨닫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날을 대하는 것이 바른 절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따라 산다는 것은 어떤 절기나 의식 등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 5:17절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율법 폐지 운동을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반대로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율법이 완전해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율법의 완전은 율법이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율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의미가 명확히 드러남으로서 율법은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율법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그 정신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곧 율법을 이룬 자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사고방식에 따라 행동한다면 우리가 곧 이스라엘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고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또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신자로서 마당한 삶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서 어떤 문제에 대한 인간적 해결방법이 어떠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에 순종하지 않는 인간이 문제를 해결할 때 어떤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20장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을 패배하게 하셔서 베냐민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은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즉 자신들 역시 베냐민을 심판할 자격이 있을 정도로 의로운 자가 아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세 번째 기도에서 베냐민을 치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였음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이제 베냐민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냐민 사람은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이만 오천 일백명이 죽게 됩니다(20:35). 그리고 겨우 육백명만 살아남습니다(20:47). 그런데 이로 인해서 이스라엘 안에 근심거리가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베냐민 지파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0:48절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마다 다 불살랐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베냐민 사람들이 거하던 성읍을 공격을 해서 그곳의 베냐민 사람들과 가축까지 모두 죽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서 베냐민 자손이 이스라엘 안에서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전쟁에서 죽지 않고 도망친 육백 명의 군사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의 아내가 될 여자까지 모두 이스라엘 사람의 손에 죽어버린 상황에서 이들의 아내가 되어줄 여자가 없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고민거리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여자를 골라서 베냐민 남은 사람들의 아내가 되게 할 수도 있었지만 본문 1절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는 말씀대로 그들은 이미 자기들의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않기로 맹세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 맹세는 이미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여서 베냐민을 치기로 작정할 때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그들은 베냐민 사람들의 악한 행동에 대한 분노로 인해서 그런 악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딸을 줄 수 없다는 의도에서 한 맹세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맹세를 했기 때문에 자기들의 딸을 베냐민 사람의 아내로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다른 종족의 사람들에게서 여자를 구하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 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여자를 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궁리한 것은 자신들이 누군가를 칠 정당한 구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그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했던 것을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미스바에서 자기들과 뜻을 같이 해서 이 미스바에 모이지 아니한 사람은 반드시 죽인다고 맹세를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맹세한 대로 누가 미스바에 오지 않았는가를 찾아내서 그들을 치고 그들 가운데서 여자를 구해 베냐민 사람에게 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미스바에 올라오지 아니한 야베스 길르앗 거민을 쳐서 남자와 자지 아니한 여자만 남기고 모두 진멸해 버립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이 얻은 여자는 사백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자가 부족하자 이스라엘은 베냐민 남은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절기에 춤추러 나온 실로의 여자들을 붙들어서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고 하게 됩니다. 이것이 21장의 전체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21장을 마치면서 '사람이 각기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우린 오늘 이같은 본문을 대하면서 단지 사람을 쉽게 죽이는 것에 대한 악을 생각하기보다는 왜 그들에게서 이런 행동이 나오게 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과연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을 칠 정당한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스바에 모이지 아니한 사람은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맹세를 했다고 하지만, 그 맹세는 사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 스스로의 분노에 의한 맹세였습니다.

즉 자신들이 베냐민 사람을 치는 것은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이스라엘의 의를 지키는 거룩한 싸움으로 여기고 이 싸움에 함께 하지 아니한 자는 베냐민 사람의 악을 동조하거나 그들과 같은 사람으로 여긴다는 의도에서 한 맹세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는 행위는 의로운 것인데 우리의 의로운 행위에 함께 하지 않고 동조하지 않는다면 너 역시 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맹세의 의도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맹세가 바른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맹세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신들의 맹세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는 맹세와도 같습니다. 사실 베냐민 자손이 끊어질 위기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이스라엘 자신들 가운데서 딸을 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미스바에서 딸을 주지 않는다는 맹세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맹세 역시 하나님의 뜻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미스바에 모이지 않은 사람은 죽인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딸을 주지 않겠다는 것도 베냐민처럼 나쁜 사람들과는 혈연의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착한 우리가 악한 베냐민과 혈연관계를 맺게 되는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볼 때 그들의 맹세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자신들의 분노에 의해서 스스로 만든 맹세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됨을 알았다면 자신들이 한 맹세를 지킨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의 맹세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결국 이스라엘의 맹세에 의해서 야베스 길르앗 거민들이 죽게 되고 실로에 춤추런 온 여자들이 애매하게 베냐민 땅으로 붙들려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결과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행동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저는 참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한 구절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2절에 "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거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 인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자지 아니하여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이 실로 진으로 끌어오니라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참으로 중요한 대목은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야베스 길르앗을 치고 남자와 자지 아니한 여자만 살려서 실로로 끌고 옵니다. 실로는 요단 서편, 즉 가나안 땅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는 말이 단지 실로가 가나안 땅이라는 지역적인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언급된 구절일까요?

당시 실로에는 하나님의 집이 있었습니다(18:31).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집이 있는 실로로 자신들이 강제로 얻은 여자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악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기 위한 구절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가나안 땅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 어떤 의미의 땅입니까?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에게는 그냥 땅이 아니라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며 그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와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서 수많은 원망과 불신앙을 보였습니다. 즉 가나안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으나 가나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이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로서 살아가는 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로서 가나안 땅에 들어왔음으로 안다면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앙과 자비로서 살아가는 것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한 맹세를 어기지 않기 위해서, 또 자신들의 힘으로 베냐민 자손을 유지하기 위해서 길르앗 거민을 죽이고 여자를 빼앗아 온다는 것이 과연 가나안 땅의 의미에 맞는 것입니까?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18:28절에 보면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고 말씀합니다. 가나안 거민들이 자기들이 거하던 땅을 잃어버리고 쫓겨난 것은 이스라엘 백성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나안 땅을 더렵혔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아가던 삶의 방식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이웃도 해치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더럽히면, 즉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라 이방인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면 그들 역시 가나안 땅에서 쫓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행동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움에서 멀어진 것임을 암시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가나안 땅에 합당하지 않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베냐민 자손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문제를 자기들의 소견과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결국 야베스 길르앗 거민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자기들이 맹세한 내용을 구실로 삼아서 친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갈 수 없는 땅입니다. 가나안 땅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힘으로 얻은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우심 덕분에 얻은 땅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과 은혜가 그들을 가나안 땅에 있게 한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약자를 핍박하는 것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능력인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문제가 발생한다면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는 것인가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직 자신들의 소견과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 본문을 대하면서 오늘 우리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고 사사기를 마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리스도안이라는 것이 추상적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도 없고 만져지는 것도 없기 때문에 무엇이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것인지 자신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실제적이며 구체적이며 우리들에게 보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이란 구약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나안 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이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땅인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이라는 이 땅에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죽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것으로 인해서 생명의 영역인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 안이라는 특별한 나라가 요구하는 그 정신과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맞는 새로운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 것처럼, 오늘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맞는 새로운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하나하나가 과연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맞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우리들의 생각과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본문의 이스라엘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할 때, 우리는 스스로 해결 방법을 강구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꼭 문제가 해결되는 방향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법이 과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다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 몰두하다보니 결국 드러나는 것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 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문제 해결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문제 해결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손해를 보게 하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에게는 그 어떤 방법이 없음을 인정하고 조용히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게 하심으로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00원을 잃어버릴 문제가 발생하면 100원을 잃지 않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는 생각만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100원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인간적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다보니 결국 대신 다른 이웃에게 피해를 주고 마음의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는 말씀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묵상하시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신자라면 멸망 받을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주어진 새로운 나라인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법칙인 사랑과 자비, 긍휼과 용서, 섬김, 희생, 온유처럼 그리스도의 성품과 마음에 맞춰 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에게 순종하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