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3:1-6 시험

1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주변에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히위 사람을 남겨 두셨는데, 남겨두신 이유는 남겨둔 가나안 백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겠다는 의도이십니다. 4절에 보면 "남겨 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고 말씀합니다. 우린 이것으로 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가 가나안과 전쟁을 할 때 그들을 다 쫓아내지 않으시고 남겨 놓으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서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을 청종하며 살아가는지 아니하는지 시험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시험이란 하나님의 확인 작업입니다. 하나님이 맨처음 시험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창 22:1절에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은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냥 이삭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험에서 무엇이 확인되는 것입니까? 과연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가 확인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순위에 있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의 확인작업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갑니다. 그리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할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합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바침으로 확인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독자 이삭을 바침으로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 신 8:2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기 위한 시험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진실된 것이라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말씀이 귀하다는 것을 아는 믿음의 행위라면 어떤 조건과 상황과 환경에서도 그 믿음은 변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 13:3절의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라는 말씀에서도 여호와가 시험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고 다른 신을 섬기자 하고 그들의 말대로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고자 하여 시험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홍해였고 물 없고 양식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원망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여호와를 사랑하는지 시험하시는 확인작업이었는데 말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였다면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여호와를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보았다면 뒤에서 애굽 군대가 쫓아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고, 물이 없고 양식이 없다고 해서 근심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여전히 이스라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가나안 백성을 남겨둔 것역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령을 청종하는지 알기 위한 시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확인하고 입증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업인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인식하는 시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 자체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라는 것 자체를 하나의 터무니없는 헛소리로 치부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인도한다면 왜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느냐고 반문합니다. 이것이 신에 대한 세상의 인식입니다. 세상을 도와주고 잘되는 쪽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신다운 신의 모습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지럽고 악해져가는 세상을 보면서 '신은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만 좋은 환경을 바라고 살아갑니다. 좋은 환경으로 인해서 편안하고 좋은 인생을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외 신에 대한 다른 관심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신이란 단지 섬겨주면 되는 존재로 인식해 버립니다. 인간이 신을 섬기면 신은 인간을 도와주는 관계로 여깁니다. 서로 좋은게 좋은거라고 인간이 신에 대해서 할 도리를 다하면 신은 인간을 위해서 할 도리를 다해달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신에게 갖다 바치는 것을 부지런히 하면서 바쳤으니까 좋은 것으로 갚아달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여러분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의 상황과 환경들에 대해서 불만스러울 때가 많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쪽으로 되어지지 않고 항상 엉뚱한 쪽으로 되어질 때, 더군다나 그것이 자신에게 고통과 어려움으로 다가오게 될 때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여기기가 매우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힘들게 여기는 상황 속에서도 중지되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확인작업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듯,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듯 우리를 시험하시면서 진짜 가짜를 가려내는 확인작업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어려운 상황만이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내 뜻대로 되어지는 상황, 한마디로 말해서 만사 형통이라는 상황 역시 하나님의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네 뜻대로 되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살아가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란 어떤 환경과 상황 속에서 산다고 해도 삶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증거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여러분의 삶속에서 증거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삶은 여러분이 입술로 고백하는 믿음과 주님에 대한 사랑이 과연 진실된 것이고 참된 것인가를 증거하고 확인하는 시간임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진실된 것인가를 확인하는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진실된 믿음이라면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풍족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진실된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풍족함으로 인도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서 가나안 열국을 남겨 두셨습니다. 즉 가나안 열국이 남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나안 열국이 주변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로 삼고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내로 주며 그들의 신을 섬기고 맙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보다는 남아 있는 가나안 열국과 친하게 지내고 함께 어울리는 것이 더 유익 되고 앞으로 자신들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나안이란 쫓아내야 할 족속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과 어울리지 말고 혼인하지 말고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것은, 가나안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을 쫓아냄으로서 무엇이 참된 복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풍족하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덕분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복을 내려서 이렇게 풍족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나안 속에 이스라엘을 집어넣으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게 하셔서 참된 복은 세상에서 풍족하게 살아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됨에 있다는 것을 증거 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이 안다면 가나안 거민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무리 자신들의 삶에 도움이 되고 득이 된다고 해도 쫓아내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가나안 열국을 남겨두심으로서 이스라엘은 두 방향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는 말씀보다는 자신의 삶에 득이 되는 것을 쫓아가는 것과, 다른 하나는 삶에 비록 손해가 있다 할지라도 말씀이 명하신 대로 쫓아가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가의 여부가 하나님이 가나안 열국을 남겨두심으로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믿는다고 하고, 제사를 드리고, 할례를 행했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의 진실된 여부는 남아 있는 가나안 열국에 대해서 어떻게 행하느냐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 열국과 혼인을 하고 그들의 신을 섬긴다는 것은, 그들 역시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고 자신의 삶을 우선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본문에서는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이라고 말합니다.

가나안 전쟁이란 단순히 국가와 국가 간의 싸움이 아닙니다. 땅 빼앗기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을 모르는 자의 싸움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아는 자와 어린양의 피를 모르는 자의 싸움인 것입니다. 힘으로 사는 사람들 안에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투입된 것입니다. 이것이 가나안 전쟁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 전쟁을 모른다는 것은, 결국 무엇 때문에 자신들이 가나안에 있는지 그리고 왜 가나안 열국이 존재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즉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가나안에서 살게 하신 시각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주어진 모든 환경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고 자기 발전을 꾀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의 문제는 삶에 대한 시각의 무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자기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을 위한 삶으로 인식을 했을 뿐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는 인식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곧 가나안에 존재하는 그 이유 자체를 알지 못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가나안 거민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시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쟁이란 싸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가나안 거민들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살아가는 삶을 증거 해야 하는 것이 가나안 거민들이었습니다. 세상이 모두 복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결국 복이 아니고 오히려 저주라는 것을 드러내고 증거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 거민들과 혼인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는 신을 섬깁니다. 이것은 삶의 방식이 가나안처럼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존재이유, 즉 가나안 전쟁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가나안처럼 저주의 자리에 함께 혼합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죄악이 하나님이 남겨두신 가나안 열국을 통해서 확인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삶에 대해서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십니까? 삶에는 어려움과 풍족함이 함께 어울려 있습니다. 어떨 때는 어려움으로 우리를 곤란하게 하기도 하고 근심과 걱정으로 밀어 넣기도 합니다. 또 어떨 때는 풍족함으로 인해서 행복을 느끼게 하게도 하고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도록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러한 삶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어려움이 있을 때 단지 빨리 어려움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만 있습니까? 풍족해지면 '역시 돈이 최고다'라는 기쁨만 있습니까? 어렵든 풍족하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서 가나안 열국을 남겨두신 것처럼, 여러분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풍족함을 남기기도 하고 때로는 어려움을 남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싸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싸움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하듯,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여호와의 전쟁을 알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지금 싸우고 계시고 우리는 그 군사로 부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무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전쟁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단지 좋은 것이 주어지면 '은혜다' '복받았다'라고 여겨버리고, 자기에게 나쁜 것이 주어지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하면서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만 존재하고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삶일 뿐,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삶을 통해서 무엇이 증거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들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여러분의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차이점입니다. 신자는 삶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삶을 단지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일터로 여길 뿐입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삶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삶에 다양하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여러분의 믿음이 확인되어지는 도구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삶이 왜 염려와 걱정으로 흘러갑니까? 그 이유는 삶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삶을 통해서 자신의 자존심을 확보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삶을 통해서 증거하고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려움이 오게 되면 그것을 삶의 실패로 여기게 되고 낙심하게 되고 자포자기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을 하나님을 증거 하는 도구로 인식을 한다면 잘되든 못되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어떤 삶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군사입니다. 군사로서 전쟁을 잊어버리고 있다면 그것은 군사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 주변에 가나안 열국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과연 전쟁을 의식하고 사느냐 아니면 전쟁을 잊어버리고 사느냐는 것이 가나안이 남아 있는 상황을 통해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삶 역시 전쟁입니다. 믿는 자로서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거하며 산다는 것은 곧 전쟁을 의미합니다. 돈으로 살아가고 힘을 의지하고 사는 세상 속에서 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로 감사하며 살아가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과 하나님의 용서의 힘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무엇이 진짜 복이며 생명인가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쟁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 전쟁의 군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것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입니다. 풍족하면 풍족함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고 예수님의 희생과 하나님의 용서가 나를 살린다는 것을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풍족하면 교만해지고 자기 힘을 과시하며 살아가지만, 신자라면 풍족함 속에서도 여전히 겸손하게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살린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고 맡겨진 것임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여러분에게 풍족함이 있기도 하고 어려움이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여러분을 확인하고 시험하시기 위함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아하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확인하시기 위해서 어려움을 나에게 남겨 주셨구나'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군사로 살아가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오직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삶의 성공을 위한 싸움에만 열심이라면 그것은 결국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이 삶을 통해서 증명될 뿐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신앙의 전쟁터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싸움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삶을 대한다면 결국 세상 사람들과 연합하게 되고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싸움을 잊어버린 삶이라면 하나님의 시험도 잊어버렸을 것이고 결국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보다는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원망하게 되고 걱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미 그리스도의 생명이라고 하는 놀라운 축복의 자리에 있습니다. 이 축복의 자리에서 여러분의 삶을 바라보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데, 왜 내 주변에 이런 상황과 환경을 만들어 놓으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 것입니다. 날마다 싸우는 자로 살아가는지 여호와의 전쟁을 과연 아는 자인지는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확인될 것입니다. 그 확인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시험하고자 여러분 주변에 많은 것을 남겨 놓으시기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전쟁을 아는 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