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3:7-11 사사의 등장

구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을 배경으로 한 신약은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을 위해서 죄악의 땅에 오신 구세주에게로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구약을 무시한 신약의 해석은 이미 바른 해석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신약의 해석 역시 잘못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해주는 구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 신약을 해석함으로 인해서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는 여러 가지 신학이 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상급차등', 즉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일을 많이 한 자는 나중에 천국에서 상을 많이 받고 적게 한 자는 적게 받는다는 이론이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급차등론이라는 이론 자체가 인간의 각각의 자질을 인정하는 것으로 출발하는 이상 이미 구약의 체계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상급차등론'은 인간에게 주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는 것으로 출발해야 성립이 가능한 이론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에게는 주님을 위해서 일할 자질이 없다라고 한다면 상급차등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위해서 일할 자질이 인간에게 있다면, 그 자질로 많은 일을 한 사람은 상을 많이 주고 적게 한 사람은 적게 준다고 할 때 '상급차등'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이 과연 이러한 이론의 바탕이 되는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자질이 있다'는 것을 옹호하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구약이 인간에게도 선을 행할 자질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쓸데없이 끼여든 하나님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귀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왜 끼여드느냐는 타박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구약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선을 행할 자질이 없지만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음으로서 선을 행할 자질이 주어졌다라고 한다면,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성령이 주어진 이상 그 즉시 십자가는 철수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고 성령이 주어짐으로서 선을 행할 자질을 받았다면 그때부터는 자신의 자질로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이 동일하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 앞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차피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이라면 성경이 우리 앞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인간이 스스로 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죄를 알고 십자가를 믿을 자질이 있는 것이라면 성경이 있을 이유가 분명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즉 인간 스스로 죄를 알고 십자가를 믿을 자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성경이 있다고 해도 무용지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생각이 타당하게 여겨지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생각 자체가 인간은 죄인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자기 구원의 입장에서만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믿고 안믿고가 내 의지에 달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함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택한 자가 누구인가?'를 분별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나의 죄로 인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가 곧 나의 생명임을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택하지 않은 자가 성경을 보는 시각은 자기 중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자신의 죄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신앙을 과시하고 스스로 노력해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보려는 시도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가 곧 인간임을 낱낱이 폭로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독생자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야 했고 죄인된 인간이 담당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서시고 인간이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심으로서 죄로부터 해방될 유일한 길을 열어놓으셨고 그 길로 자기 백성을 인도해 가신다는 것이 신약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인간은 죄인임을 말한다면, 신약은 모든 것은 주님이 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성경을 대할 때 발견되어지는 것은 '나는 죄인이고 모든 것은 주님이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할 일이 뭐겠습니다. 모든 일을 주님이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곧 성도가 할 일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가 바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라면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도 자기 구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도라면 자신이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임을 알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 구원에 대해서 묻는다는 것 자체를 송구스럽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택하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도구로서의 선택이지 자기 구원의 확신으로서의 선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생각하는 선택이란 자기 구원을 과시하고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의 선택, 즉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서신을 쓸 때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울 자신이 선택받은 것을 자신을 과시하고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택함 받았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이라는 것은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 1:23절에서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요한은 자신의 실체가 세상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요한은 자신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배후의 주님을 보이기 위해 살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죄라는 것은 자기 배후에 계신 분을 보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성경의 모든 내용이 자기에게 영광을 부어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이 뭐가 좋아서 하나님만 섬겨야 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고의로 '이제부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자'라고 작정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신을 섬긴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 신을 섬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서 가나안 땅에 살게 되었는지를 잊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가나안 열국을 남겨 놓았을 때 그들과 혼인을 한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가나안 열국을 바라보면서 신앙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어떤 언약을 하셨는지, 하나님이 가나안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셨는지의 차원에서 가나안 열국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의 유익이라는 차원에서 대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여호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 주변에 놓여 있는 모든 것들, 즉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신앙의 차원에서 모든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일어나는 무수히 많은 사건들을 내 삶의 편안함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진리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집안에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다고 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이라면 진리의 차원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오직 급한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앙도 잠깐 뒤로 미룰 수 있다는 생각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이스라엘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면,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보이는 일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즉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고 편안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을 통해서 내 배후에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증거 되고 그리스도가 보여질 수 있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선택받은 자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까 아니면 문제 해결에만 관심을 두게 됩니까? 만약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신자라면 어떤 문제에서든 신앙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고 내가 편안해지는 것보다도 내 배후에서 나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증거 되어지고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하나님이 백성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나만큼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철저하게 예수님만 믿고 살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여겨지고, 믿음이 있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생각이 될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잊고 살면서 바알과 아세라를 바라보는 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증거는 여러분의 삶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여러분의 주변에 가나안 열국을 남겨 두심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데 얼마나 열심인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가령 장사를 하는데 하루종일 한푼도 벌지 못했다고 합시다. 이것 하나로도 우리가 진리를 중심으로 사는지 아니면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는지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산다면 한푼도 못번 것 때문에 화를 내고 원망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중심이라면 돈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알았다는 것으로 감사할 것입니다. 천국은 돈으로 가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진리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니 말씀이니 이런 것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관심은 오직 자신들의 인생이었습니다. 좀 더 좋은 삶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에 관심을 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세라와 바알을 섬겼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은 조치를 취합니다. 그것은 8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을 섬겼더니"라는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손에 붙여서 8년 간을 그들을 섬기며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8년 간의 고생을 하면서 여호와께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옷니엘이라는 사사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9-10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옷니엘을 가리켜서 구원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옷니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만한 힘있는 용사이기 때문에 구원자로 세움 받은 것이 아닙니다. 10절에 보면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했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이스라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옷니엘이란 사사의 등장은 누구 때문입니까?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이스라엘 안에 사사가 등장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결국 옷니엘이란 사사가 등장을 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신앙의 바른 길로 가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직접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이방인과 싸우라고 하지 않고 옷니엘이라는 사사를 세워서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사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신앙의 바른 길을 찾아 갈 수 있는 자들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옷니엘이라고 해서 스스로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옷니엘도 그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했기에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옷니엘이 메소보다미아 왕과 싸울 때도 여호와께서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셨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바른 신앙의 길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증거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고 사사를 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게 된 것은 이방인의 손에 그들을 붙이신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입니다. 여호와께 부르짖도록 만드시고, 사사를 세우시고, 사사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하시고, 이방인을 사사의 손에 붙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자질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서는 날마다 여호와를 잊어버리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간의 본성 그대로 살아가도록 그냥 놔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이기에 구원자를 세워서 그들을 바른 신앙의 길로 되돌려 세우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사사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신을 섬겼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자가 되었다면 그것도 역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가나안 땅은 돈이 필요 없는 땅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던 땅이고 그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심으로서 들어오게 된 땅이기 때문에 가나안에서의 삶의 방식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있음으로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땅이며, 이스라엘은 그러한 가나안 땅에서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잊어버렸다면 자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고, 그 결과는 자신들의 삶에 눈을 돌리고 스스로 살길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보다는 살아가는데 유익이 되고 필요한 것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 가야 할 길로 되돌리기 위해서 징계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하시고 신이 임한 자를 구원자로 세워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속에 신이 임한 자는 사사입니다. 신이 임했다는 것은 진리를 중심으로 사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라도 진리를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을 때 그를 책망하고 나무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앞에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셨던 구원자가 서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이스라엘처럼 진리를 중심으로 살지 않고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우리 앞에서 진리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임을 보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마다 진리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 우리의 허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구원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자랑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이며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신자는 이미 돈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세계 속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로서 구원을 보여주며 살아가야 할 사람으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신이 임한 신자는 진리를 중심으로 하지 않은 삶에 대해서 책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를 징계해서라도 신자로서의 길을 가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은혜가 생각나는 사건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몸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구원자를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깨달으시고, 이제 여러분이 신이 임한 자로서 구원자의 자리에 서서 구원을 보여주고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에 대해서 나무랄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