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3:12-25 왼손잡이 구원자

고전 1:27-29절에 보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세상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구조의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이란 상대적입니다. 약자는 강자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미련한 자는 지혜 있는 자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것을 택하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강자가 약자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지혜 있는 자가 미련한 자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이치로 생각하면 전혀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세상은 강자가 당당하고 지혜 있는 자가 고개를 들고 살아갑니다. 약자는 항상 기가 죽어 살고 미련한 자가 고개를 숙이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과연 어떤 강자가 어떤 지혜 있는 자가 약자 앞에서 미련한 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가지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약자 앞에서 강자가 부끄러움을 느끼고 미련한 자 앞에서 지혜 있는 자가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사람들의 자연스런 현상과 반응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약자 앞에서 강자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결코 세상적인 비교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것을 비교한다면 오히려 약자가 강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정상입니다. 따라서 강자가 약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면 그것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 약자에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고전 1:30-31절에서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고전 1:26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육체로 자랑할만한 것이 없는 자로 불렀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한 자를 택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약한 자에게 무엇이 있기 때문에 강한 자가 부끄럽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난자입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약자에게 있는 그 예수님으로 인해서 강한 자가 부끄러움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돈으로 비교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로 비교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평가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힘이 되고 지혜가 되는 것은 돈이고 지식이기 때문에 돈 없는 자 지혜 없는 자가 부끄러움을 가지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리스도가 힘이고 지혜이며 의로움이고 거룩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가 힘있는 자이고 지혜 있는 자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소위 세상적인 강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과연 세상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가지겠습니까? 약자가 그리스도안에서 산다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가지는 세상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은 오히려 약자의 그리스도를 무시할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안에 사는 약자로 인해서 강자가 부끄러움을 가진다는 것도 역시 세상적인 모습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강자가 그리스도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가진다면 그것은 그 강자 역시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약자의 위치에서 강자에게 부끄러움을 주는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약자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강자라고 생각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강자로 생각하며 살다가 자신보다 더 나은 강자의 등장으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가지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의탁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고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겼을 때 하나님은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에게 이스라엘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옷니엘이란 사사를 세워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사가 죽자 그들은 다시 악을 행하자 하나님은 모압을 강성케 하셔서 이스라엘을 점령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여호와께 부르짖자 하나님은 다시 사사 에훗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에훗을 그냥 에훗이라고 말하지 않고 왼손잡이 에훗이라고 소개합니다. 굳이 에훗을 왼손잡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현대 사회의 시각에서는 왼손잡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물론 사회적 환경의 구조가 보편적으로 오른손잡이를 중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불편한 것은 많지만 왼손잡이가 특이한 자로 구분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의 구별이 심했습니다. 지금도 아이들이 왼손을 쓰려고 하면 오른손을 쓰도록 가르치지만 예전에는 왼손잡이는 상놈이나 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도 역시 오른손잡이가 정상이고 왼손잡이는 비정상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오른손이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출 15:12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나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할 때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라고 하면서 주께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셨음을 말합니다. 또 시 17:7절에서도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라고 말하고, 시 18:35절에서도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오른손에 구원의 의미를 두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구원의 힘을 오른손에 있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씀하는 것은 보면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음을 말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이 구원자를 세우시는데 그가 왼손잡이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시각으로 볼 때 비정상적인 사람이 구원자로 등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왼손잡이를 구원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왼손잡이임을 밝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왼손잡이를 등장시켜서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오른손잡이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오른손잡이는 강자의 위치에 있고 왼손잡이는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받는 무시 받고 멸시받는 약자의 위치에 있는 자로 볼 때 하나님은 약자를 구원자로 세워서 강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시 받는 비정상적인 위치에 있는 왼손잡이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은, 결국 스스로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위해서 한 것이 무엇인가를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고 항상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돈있는 자들 앞에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며 살아가는 돈 없는 자를 세우심으로서 돈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너희는 있는 돈으로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를 책망하기 위해서 돈이 없으면서도 없는 자들을 도와주고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압왕 에글론을 섬기게 된 것은 힘에 의해서 굴복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8년 간을 힘에 의해서 지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안에 왼손잡이 에훗이 등장을 해서 계략으로 모압왕 에글론을 살해하게 합니다.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도 굴복하고 어찌할 수 없었던 에글론을 비정상인 에굴론을 세워서 죽이게 하신 것이 바로 정상적인 이스라엘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상적이면서도 비정상적인 사람보다 무능력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압 왕을 섬기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왼손잡이인 에훗에 비하면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그 정상적인 오른손으로 그들은 기껏 악을 행했던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들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것이 왼손잡이인 에훗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다윗의 위대함과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무능함과 부끄러움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두려워서 떨고 있는 골리앗 앞에 힘없는 어린 다윗을 세우시고 칼도 창도 아닌 돌멩이를 가지고 골리앗을 죽이게 하신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이 신앙에 대해서 무능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삼상 17:45절에 보면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말합니다. 즉 다윗은 힘으로 골리앗과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운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다윗이 믿음이 있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믿음이 없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골리앗의 힘만 봤지 하나님이 계심을 보지 못하던 이스라엘의 실체가 어린 다윗을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정상적인 오른손잡이고 다윗은 비정상인 왼손잡이로 비교될 수 있습니다.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선 어린 다윗은 분명 상식적으로 볼 때는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다윗 앞에서 이스라엘 그들은 과연 무엇을 믿었으며 무엇을 의지했는가가 여실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을 세워서 이스라엘에게 묻고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묻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무엇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마음대로 교회를 나오실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면 죽인다고 위협하는 세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아직도 마음놓고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으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의 소식을 간혹 듣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듣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믿음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놓고 교회로 모일 수 있는 환경을 주셨는데 교회로 모여서 무엇을 했는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몸이 성한 우리들 앞에 몸이 성하지 못하면서도 주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세우심으로서 성한 몸으로 무엇을 했는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았습니까? 누구를 위한 삶을 살았습니까? 하루하루의 삶이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는데, 우리는 그 하루의 삶을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갑니까?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은 이스라엘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며 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이 곧 오늘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무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들 앞에 약자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아무것도 없고 무능력하고 무시와 천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왼손잡이를 세우심으로 믿음에 무능력한 우리들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삶의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주님을 향한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을 세우심으로서 풍성함 속에서 오히려 주님에 대한 소망에 희미해진 우리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소위 세상적으로 능력이 있는 자, 그것이 능력이 아닙니다. 만약 세상적인 힘이 있다면 그 힘으로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를 다시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주님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웃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부끄러움을 가질 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른손잡이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왼손잡이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부끄럽게 할 수 있는 왼손잡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세우신 왼손잡이로 인해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의 무능력함을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것으로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우리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고 우리들의 소유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린 너무 교만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 누구로부터 왔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주어진 것을 소유하고 지키는데에만 급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교회를 나왔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발합니다. 약자이면서도 구원자로 오신 주님은 언제나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그것을 희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들 주변에 주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세우심으로 다시금 우리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섬기는 자가 높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거지 나사로였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생전에는 거지 나사로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지옥의 고통 속에서야 나사로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무엇인가를 발견했을 뿐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왼손잡이가 있을 때 그를 통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목사가 자신보다 더 큰 교회에 시무하는 목사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교회에서 가장 힘들고 어렵게 살면서도 주님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신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가 과연 주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목사라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믿음이 있는 신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목사가 과연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살아가겠습니까?

교회는 참으로 진실된 성도가 필요합니다. 주님으로만 살아가면서 우리를 부끄럽게 해줄 왼손잡이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안타까움은 바로 그러한 왼손잡이의 위치에 있는 자가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왼손잡이의 위치에 있는 자를 세우시고 그를 통해서 부끄러움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작은 자를 통해서 자신의 부끄러움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작은 자로 약자로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것도 두렵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바로 주님이 세우신 구원자 왼손잡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