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3:26-31 강함과 약함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니 그보다도 여러분 자신들이 예수님에게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나는 예수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사람이 아무런 대가도 주어지지 않는 일에 자신의 것을 소비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임을 감안해 볼 때 예수님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은 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본질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진심으로 존재한다면 과연 예수님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은 채 교회를 다니고 헌금을 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들, 그들이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대신에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고 존경받는 재미로 교회를 다니고 봉사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사실 신자라고 부를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고 교회가 단지 자신의 취미 생활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일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예수님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란 예수님에게 무엇을 받아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송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해서 기뻐하기 위해서 교회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신자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물론 희박하긴 하지만 예수님으로 인해서 감사가 끊이지 않고 예수님을 찬송하고 싶어서 예수님을 아는 형제들을 찾아 모여서 같이 기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희생으로 발생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로 인해서 충만된 상태입니다. 충만 되었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고, 때문에 달리 예수님에게서 원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받은 것으로도 충만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무리들입니다.

엡 1:23절에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뭔가 부족한 것이 있고, 그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에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활동을 증거 하는 몸으로서의 교회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란 이미 그리스도로 충만된 자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충만 되었기 때문에 부족이 없는 존재이지요.

이러한 말이 아마 여러분들에게는 세상의 현실과 동떨어진 말로 들려질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들려지고 있는 말씀은 하나하나가 세상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다른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잊으면 안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현재 우리들의 현실을 보장하는 말씀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잘못 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끌고 간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란 그리스도로 충만된 자라는 것도, 그래서 부족함이 없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도 전혀 다른 세상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을 담고 살아가는 세상은 모든 것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신의 부족을 채우고 보충하기 위해서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도 역시 예외는 아니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부족을 느끼고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 발버둥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도 한 발 뒤로 밀쳐 놓으려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현실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을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들의 나약함입니다.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부족을 느끼는 것은 모든 비교를 세상 것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하다가도 몇 푼의 돈 앞에서 자기보다 조금 잘나 보이는 사람 앞에서 부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굳게 서 있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로 사는 자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세상에서 구원받게 된 것으로 감사합니다. 멸망의 세상에서 구출된 자로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은혜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만으로도 얼마든지 충만하고 부족함이 없고 불만이 없는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또 달리 원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말하되 그리스도로 살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구원받는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현실에서 구원받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삽니다. 돈이 없는 현실에서의 구원, 직장이 없는 현실에서의 구원, 일이 잘 안되는 현실에서의 구원, 이처럼 현실에서의 구원을 원하고 그리스도를 찾기 때문에 항상 부족을 느끼면서 그리스도에게 뭔가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구원에 마음을 둔다면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구원에 마음을 둔다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부족한 마음으로 주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자신에게 부족된 것을 채워달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말하되 그리스도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인생을 통해서 배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현실에서의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서 더 깊은 실망과 낙심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하셔서 세상의 헛됨과 허무함을 알게 하시고 대신 그리스도로 사는 삶이 헛되지 않음을 발견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국가가 번성하는 것이나 망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무작정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서 활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자 하나님은 모압을 강성케 하셔서 이스라엘을 쳐서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 분명 모압이 강성하게 된 것은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도구로 모압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알고 모압의 강성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코 세상이 생각하는 복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작정 성장하고 발전하면 복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한 나라를 강성케 해서 하나님 백성을 징계하는 도구로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강성케 하셨던 모압을 하나님이 치십니다. 28절에 보면 "무리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 대적 모압 사람을 너희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매 무리가 에훗을 따라 내려가서 모압 맞은편 요단 강 나루를 잡아 지켜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강성케 하신 모압을 다시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여호와의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이지 세상의 힘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소유의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뜻은 자기 백성의 소유를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압을 강성케 하셨다가 다시 이스라엘에게 붙이신 것입니다.

29-30절에 보면 "그 때에 모압 사람 일만 명 가량을 죽였으니 다 역사요 용사라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였더라 그 날에 모압 사람이 이스라엘의 수하에 항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태평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죽인 모압 군대는 일만명 가량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같이 역사요 용사입니다. 역사란 힘이 장사인 사람을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힘이 장사인 용사들을 일만명 가량이나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께서 모압을 이스라엘에게 붙여 줬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스라엘 스스로의 힘이 아닌 것입니다. 모압이 이스라엘에게 항복을 하고 그 땅이 80년 동안이나 태평하게 된 것도 하나님이 모압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신 결과입니다. 승리도 태평도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편에서 이기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행복을 만들어 내고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은 여호와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그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믿는다면 지금 나의 실패도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꿔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다고 하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참새 하나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에 대해서 옳다라고 하면서 그 말씀을 우리의 삶에 비추어서 생각하기를 꺼려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인정하기를 피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속마음에 세상에서의 성공에 대한 열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고 살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을 받고 살아가는 것을 더 원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것은 결코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을 주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부르신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세상 것이 적다 많다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아들을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아들을 내어 놓으셨다면 그것으로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신 것이 됩니다. 사실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지금 있는 소유로 감사하자는 말조차도 죄송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내어놓으신 아들의 은혜와 사랑을 안다면 감사는 자연히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소유를 가지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흔들리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아들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의 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이 세상에 가져오신 것, 아들로 인해서 우리에게 약속되어진 것, 그것의 귀함을 알고 살아간다면 과연 그가 세상의 것으로 인해서 마음 졸이며 살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보이기보다는 가나안 백성들이 누리고 있던 문화와 문명들이 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가나안의 문명과 문화가 더 비중 있게 그들의 마음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 멸하라는 말씀을 어기고 철병거를 남겨놨고, 여호와의 목전에서 그들의 신을 섬기고 경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징계하십니다. 자기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을 강성케 해서 이스라엘을 치게 합니다. 그리고 구원자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강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왼손잡이를 구원자로 세우신 것이고, 31절에서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는 말씀대로 삼갈이란 사사에게는 소 모는 막대기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이게 하신 것입니다.

왼손잡이는 무시 받는 대상이었고, 소 모는 막대기는 결코 무기라고 할 수 없는 약한 것입니다. 블레셋 군사들은 강한 힘을 가졌습니다. 그들의 무기도 강력했습니다. 그러한 블레셋 군사 육백 명을 소 모는 막대기로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것은 왼손잡이를 구원자로 세워서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신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소 모는 막대기를 든 자를 세워서 강한 것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소 모는 막대기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것으로 블레셋을 이기고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가치 판단을 하는 이스라엘을 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블레셋이 강한 나라였다면 이스라엘도 블레셋처럼 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블레셋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스라엘에게 삼갈의 소 모는 막대기는 하찮은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소 모는 막대기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무기로 쓰인 것입니다. 소 모는 막대기는 강한 무기가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 모는 막대기를 무기로 사용한 삼갈이 강한 것도 아닙니다. 삼갈이나 소 모는 막대기는 모두가 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기에 약한 것이 하나님이 쓰실 때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강함을 드러냅니다. 결국 강하신 하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눈에는 강하신 하나님이 보인 것이 아니라 철병거가 보였고 모압의 용사들이 보였던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만이 강하신 분임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자라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강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강한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부러워 할 필요도 없고 그 앞에 기죽을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의 신앙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강하심을 마음속 깊이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의 깊은 진수일 것입니다. 강하신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내가 강해질 필요가 없음을 깊이 깨닫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신앙의 참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강하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여전히 세상의 강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까? 왜 나도 저들처럼 강해지기를 바라면서 항상 약한 것 같은 자신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고 불만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강하심을 엉뚱한 곳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를 치시는 강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시는 강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강하신 분이다'라고 말하면서 강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여전히 세상의 강한 것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자기 백성일 때 그냥 두지 않습니다. 평소 선망했던 강한 것에 의해서 실패하게 하시고, 평소 믿었던 강한 것을 무너뜨리셔서 오직 하나님만이 강하신 분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강한 자는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이들은 오직 말씀에 굴복할 뿐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이미 눈에 보이는 강한 것이 강한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세상이 보기에는 나약하고 가진 것이 없어서 소 모는 막대기 같은 하찮은 존재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에게 붙들려 있을 때는 하나님의 강하심을 증거 하는 도구로 쓰여질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강한 자 약한 자를 구분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세상의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선망하는 존재는 모압이나 블레셋처럼 힘있는 자들일 것입니다. 강한 자를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약함과 무능에 대해서 한탄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들 주변에 소 모는 막대기 같은 존재를 세우실 것입니다. 분명히 힘없는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하찮은 조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부족함이 없는 충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강함을 바라보는 우리를 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약한 것을 들어서 강한 것을 치시는 하나님의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선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강해지고 싶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조건을 갖추고 살아가고 싶습니까? 세상의 영광을 누리며 살아보고 싶습니까? 자신의 나약함에 대해서 한탄이 나옵니까? 세상에 내세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진심으로 불쌍한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그리스도가 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강하셨습니까 약하셨습니까? 그분은 약한 자였습니다. 내세울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하찮은 모습과 조건으로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강한 힘에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승리를 보이셨습니다. 소 모는 막대기와 같은 모습인 예수님이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면서까지 힘에 굴복하기보다는 말씀에 순종하는 그 삶이 바로 강함입니다.

믿음은 이런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충만케 하시는 예수님으로 이미 충만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미 충만한데 무엇에 부족을 느끼겠습니까? 이들이 진정으로 강한 자입니다. 여러분은 강한 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