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백성(마 1:18-25) - 1강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일하실 때 사용하시는 도구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셔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도구로서 쓰여져야 한다는 사실을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누군가의 어려움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어려움에 있는 신자를 도와 주세요'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즉 우리의 바램은 하나님이 손수 그 신자를 도우셔서 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시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기도했다는 것으로 '내 할 일은 이제 다했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내 형제를 위하여 기도했으니까 나는 그 형제를 사랑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형제를 위해서 기도했느냐가 아니고 형제를 위해서 어떤 도움을 줬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가 되어서 그 형제에게로 다가가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소는 우리 자신이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도 우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희생과 섬김입니다. 기도했다고 해서 말로 위로했다고 해서 신자의 할 일을 다 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어려움과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를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물으십니다.

신자의 할 일은 내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움직이는 것이지 나는 가만히 앉아 있고 하나님께서 어떤 능력을 보이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신자는 바로 이런 삶의 정신의 소유자입니다. 이런 자가 바로 21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자기 백성"인 것입니다. 그럼 자기 백성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1:1-16절까지는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기록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예수님의 내력을 설명하기 위한 족보가 아니라 심판을 받아야 할 인간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족보임을 알아야 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선조모들인 사라, 리브가, 레아 그리고 또 그밖의 여자들이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비천하고 미천한, 유명하지 않은 자들을 택함으로써 사람들이 보기에 위대한 것을 선택하지 않는 하나님의 특이한 의의 일면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누가 누구를 낳고'하다가 '누구는 누구에게서'라고 말이 바뀌는 부분이 있습니다. '누구 누구에게서'라고 칭하는 사람은 모두 다섯 사람입니다.

첫째는 다말(룻 4:12)에게서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로서 유다와 동침한 이방여인입니다. 다말이 유다와 동침하게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다의 가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다의 자손을 잇고자 한 것입니다. 유다는 인간적인 생각에 빠져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야된다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단지 자기 아들을 살리려고만 했던 것입니다. 결국 다말은 자기가 창녀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가문을 잇고자 한 희생 때문에 약속이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라합(수 2:1; 6:25)에게서입니다. 라합도 이방여인이요 창기로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려주게 된 것입니다.

셋째는 룻(룻 1:4,22)에게서입니다. 룻은 남편을 잃은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자신의 편한 길을 찾아가지 않고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된다하면서 나오미를 좇아간 모압여인입니다. 이방여인이 유대 땅으로 갔을 때 겪을 고초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나오미의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넷째는 우리야(삼하 11:3)의 아내에게서입니다. 우리야는 헷사람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밧세바는 이방여인입니다. 우리야의 아내는 밧세바입니다. 그런데 밧세바가 기록되지 않고 우리야가 기록되고 있는 것은 다윗의 죄로 인해서 죽음을 당한 우리야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지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여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예수 안에서 그의 목표에 도달하게 될 모든 이방인까지도 구원하는 하나님의 행동을 시사하려는 것입니다(마 28:19).

1:1-17절까지의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의 역사를 이미 아브라함의 선택에서 시작했으며, 예수 안에서 인간들의 모두 불투명한 의심스러운 죄적인 행위를 꿰뚫고서 역사의 목표에로 역사를 이끌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복음서 기자의 신앙 고백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우리가 어떤 구속력 없는 역사적인 논잰으로서가 아니라, 이런 신앙 고백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느냐는 데 달려있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마리아에게서입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로서 동침만 안했지 법적으로는 부부로 인정된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 사이에 예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개입은 아주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부부이긴 하지만 아직 처녀인 마리아를 예수님께서 사용하심으로 인해서 마리아는 수많은 멸시와 고초를 받아야 할 위기에 빠진 것이고 요셉은 요셉대로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천사의 말대로 마리아를 집으로 데려오게 되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고 말합니다. 동침치 않은 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태어난 아이가 행여 자기로 인해서 태어났다는 오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동침치 않은 것입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정식으로 하면 요셉의 아들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요셉은 그러한 모든 것까지 포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용하셔서 일을 하시고자 하실 때 마리아와 요셉은 다같이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하고 오히려 그로 인해 받을 수 있는 고초와 어려움까지도 거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섯 사람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의 도구로 내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기를 희생시키는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인들의 이런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들이 생명의 족보에 실릴 수가 있었다는 것을 예수님의 족보가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희생의 삶은 그때에 그쳐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땅에 완벽한 희생자를 보내셔서 그 희생을 근거로 해서 자기 백성을 찾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따르는 자를 '자기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잉태(1:18)나 탄생(2:1)은 직접적으로 보도되지 않고, 다만 그 결과만이 보도됩니다. 즉 한편으로는 요셉의 당항함이, 또 한편으로는 헤롯의 당항함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사생아로서의 예수의 의심스러운 출생에 대한 그리고 예수가 베들레헴 대신 나사렛인이라는 공격에 대항하여 마태가 예수의 출생은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졌으며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를 통하여 다만 이 출생은 하나님의 의해서 의도되고 이루어졌으며, 예수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만을 말하려고 할 뿐입니다.

19절에 '요셉의 의로움'이 등장합니다.

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23절에 보면 이사야는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즉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거짓과 참을 구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구약과 신약의 아이의 이름이 각각 다르게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7:14절의 예언이 있게 된 것은 남쪽 이스라엘이 북쪽 이스라엘과 이방 연합군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아들 수알야숩을 데리고 아하스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즉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이런 전쟁을 통해서 참된 이스라엘로 남는 자가 생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전쟁 속에서 가짜 이스라엘과 참된 이스라엘로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이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는 것도 이긴다는 징조가 아니라 남은 자는 돌아온다는 징조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즉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셔서 자기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를 구별해 놓겠다는 의미의 말씀으로 예수라는 이름과 그 의미가 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이라는 것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수시로 개입하십니다. 나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개입하실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당연히 누릴 권리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포기하고 그 권리를 하나님께 넘겨 드리는 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마리아와 요셉의 모습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일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나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다른 자를 죄에서 건지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의 목적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는 예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해도 나의 귀한 시간과 나의 귀한 돈 때문에 누군가가 죄에서 건짐 받기를 소원하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모든 일은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의 권리와 자기의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 일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그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할 때 그 자는 결국 예수님의 자기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구별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비천한 나사렛 예수로 오신 것입니다.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목수의 아들로 오시고 비천한 마을에서 자라시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외형을 보고 따르는 자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외형적인 것을 보고 예수님을 무시했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백성은 낮고 천한 그 모습 안에서 구세주를 바라보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백성은 세상에서의 잘 됨을 위해서 예수님을 좇는 자가 아니고 십자가를 알고, 예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고자 하실 때 나의 권리를 포기하면서 예수님의 도구로 쓰여지기를 기뻐하는 자가 곧 예수님의 자기 백성인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는 것에 만족할 뿐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하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요구라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또한 심판을 받아서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야 할 존재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한다면 땅의 것은 나에게 무의미한 것이고 하늘의 것을 바라보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것보다는 세상의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있고 그리스도의 희생도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진 자에게는 예수님의 오심이 결국은 심판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십자가를 발견한 자들에게는 구원이지만 십자가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도구로 존재해야 합니다. 직장은 돈을 벌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남에게 헌신하고 봉사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도 행복을 누리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야 할 장소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백성으로서 죄에서 건짐 받은 신자들입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다른 자들을 죄에서 건지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나를 사용하시기를 기다리는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