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마 6:31-34) - 10강

지난 주일에는 금식에 대하여 말씀드리면서 금식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뭔가 잘못되었음을 발견했을 때 무엇으로 인해서 잘못되었는가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민감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몸에 대한 문제에 가장 민감합니다. 때문에 언제나 자기 몸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서 잘못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했을 때 몸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먹는 것을 포기하면서 신자는 먹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우라는 것이 금식인 것입니다. 신자가 떡으로 살고자 하지 않을 때 이웃과 나누는 사랑으로 살 수 있는 것이고 땅에 대한 관심에서 하늘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있는 신자라면 자신이 몸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지를 못하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세워가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회개하면서 애통해하는 것이 금식의 자세인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몸에 관심을 두면 땅의 일에 모든 마음을 두게 됩니다. 그럴 때 신자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자신으 포기하고 주님이 가신 길을 가는 것인데 주님은 결코 세상에 마음을 두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몸에 대해서 포기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또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신자는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란 전혀 다른 두 가지의 것에 동시에 동일한 관심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때문에 재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살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가 결국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세워야 합니다. 뭔가 내가 버려야 할 것을 분명히 정해놔야 그것을 버리기 위해서 힘쓰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땅입니까? 하늘입니까? 여러분이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19절과 20절을 보면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에 헌금하고 구제하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보물이 있는 그 곳에 마음이 있다는 말씀과 같이 지금 우리들의 마음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땅에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은 결국 보물을 땅에 쌓는 것이고 땅의 것은 가지지를 못하고 누리지를 못해도 하나님께 대한 관심만큼은 버릴 수 없다는 소원으로 세상을 살 때 그 자의 보물은 하늘이고 결국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 대한 관심에서 떠나지는 못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는 염려라는 것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산상수훈을 말씀드리면서 강조했던 것은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실천명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도 실천법으로 봐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사람은 그 누구도 염려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염려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염려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주님 말씀대로 염려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염려할까봐서 염려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을 실천법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염려라는 것은 내 몸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몸에 대한 관심, 땅에 대해서 관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는 염려가 끊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땅에 대한 관심을 버려라, 즉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모습은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찾고 세상에서蝥 돈을 찾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대로 세상에서 돈을 찾는 사람이 교회에 왔다고 해서 하나님만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세상의 재물에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다고 해도 자신의 세상일에 동자하고 복을 내려주는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결코 신자가 아니고 천국과도 상관이 없는 모습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도 자신의 일이 잘되기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잘되든 못되든, 어떤 일이 있든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알고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것이 곧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결국 염려라는 것은 단순히 걱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관심을 땅에 두고 산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즉 돈을 주인으로 삼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돈을 주인으로 섬길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염려입니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돈의 힘으로 세상을 사는 삶이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세상을 사는 삶이 될 것을 요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해서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그 목숨과 몸을 누가 책임지고 계시는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 있어야 우리의 목숨과 몸을 지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중의 새는 어떻게 사느냐고 말합니다. 심지도 않고 모아들이지도 않는 새는 어떻게 몸을 지탱하는가? 모두 하나님께서 기르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새들보다 더 귀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기르시지 않겠느냐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먹고사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니까 너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삶의 목적은 몸과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새는 단지 몸과 목숨을 유지하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인간인 우리도 몸과 목숨은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만이 할 수 있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몸과 목숨에만 관심을 가지고 산다면 그것은 공중의 새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새보다 더 귀하다는 것은 새도 하나님이 기르시는데 너희를 안기르시겠느냐 그러니까 먹을 것 입을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새보다 더 귀하다는 것은 우리는 새와 같이 살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즉 새같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鎨.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삶은 몸과 목숨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몸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사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들의 백합화보다 못하다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만큼 세상의 모든 영광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신 들의 백합화보다 못하다고 합니다. 결국 세상의 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크고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들의 백합화보다도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목숨을 위해서, 몸을 위해서만 산다는 것은 들의 백합화보다 못한 인생을 사는 것이고 결국 풀이 아궁이에 던져지듯이 우리 또한 멸망의 구렁텅이로 던지움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열심히 아주 열심히 몸을 위해서 목숨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몸을 좀 더 치장하고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돈을 벌려고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돈이 없어서 고통스러워하고, 돈이 없어서 슬퍼하고, 돈이 없어서 낙심하고 세상을 비관합니다 돈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 주인으로 삼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인생은 결국 흙에 묻혀버릴 인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인생을 사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이방인들이고 그들이 결국 구하고 염려하는 것은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신자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신자의 할 일입니다. 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葨. 일을 해도 그 일을 하나님이 주신 일로 알고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목적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편안한 삶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생명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의 의도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땅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삶을 원하고 계십니다. 날마다의 삶을 세상에 매여서 돈에 대한 염려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돈에 대한 염려로 살았다고 해도 이 말씀으로 통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고 내일은 돈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사는 날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