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접하라(마 7:1-12) - 11강

염려라는 것은 사람이 세상을 자기의 힘으로 자신이 계획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어 나가고자 힘 쓸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의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염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다고 해도 자신의 모든 생각과 계획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인간은 몸을 위해서만 살 때 그것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 같은 인생에 불과하며 하나님께 부름 받은 신자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살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자신의 몸을 위해서 살 때 그것이 곧 땅에 보물을 쌓아 가는 삶이고, 이런 사람은 언제나 입을 것, 먹을 것, 마실 것을 위해서 염려하며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가 자신의 몸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전에도 말했지만 산상수훈은 실천법으로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꼼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법 아래서 우리의 의로움이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산상수훈인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봐야 하는가, 왜 우리가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해서는 안되는가를 가르쳐주는 것이 산상수훈인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법은 우리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 산상수훈의 법대로 안하면 지옥 간다고 했을 때 누가 그 법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모두다 지옥가야 마땅할 죄인밖에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얻는 것입니까? 법 아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1절을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네가 남을 비판하면 남도 너를 비판하니까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비판이라는 것은 일단 '나는 너보다는 낫다'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상대방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남을 비판할 때 자신도 남의 비판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비판을 받아야 할 대상이 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의 비판을 받지 않고 비판할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뿐입니다. 따라서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는 모두가 죄인이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는 그 누구도 남을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누구도 남을 잘못을 지적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상대방의 죄를 의도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이 상대방보다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형제의 잘못을 드러내고 약점을 공격하는 것을 금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절에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합니다. 티나 들보는 죄의 경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의 잘못만을 보지 말고 자신의 큰 죄인임을 알아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같이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서로의 행위를 가지고 비교하고 경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내 형제입니까? 형제란 한 아버지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가 같은 자가 내 형제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무조건 형제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구원시켰음을 알고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고 이웃을 대하는 자가 곧 내 형제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누가 내 형제다운가'하고 옆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스스로 형제의 자리를 벗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스스로 남을 판단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네 형제인가를 보지말고 내가 저 사람의 형제로 다가가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즉 언제나 내가 죄인임을 알고 이웃을 대하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는 법 아래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내세웁니다. 자신의 의를 자랑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도 죄인의 몸이라는 것을 거부합니다. 결국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며 거룩한 것을 발로 밟아 버리는 개와 돼지 같은 존재입니다. 개, 돼지는 당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앞서 말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자를 이방인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열심히 한다해도 그것이 자신의 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를 의로 삼을 때 '나는 죄인이다'는 것이 사라지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게 됩니다. 교회가 아무리 커도 그것이 목사의 자랑이 되고, 의가 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결국 신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법을 지킬 수 없고, 따라서 구원과도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이런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선물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선물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 7절의 말씀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은 기도의 방법으로 많이 강조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는 스스로 법을 지켜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5장에서도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또 우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도 법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했지만 그것으로 천국을 가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형제를 욕하면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뿐 아니라 모든 말씀이 우리의 의를 자랑할 수 없도록 입을 다물게 하는 말씀들입니다. 때문에 구원은 하나님 은혜를 근거로 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내가 뭔가를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결론이 12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남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남을 대접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남이 나를 대접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대접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우리는 법 아래서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그런 존재였는데 예수님께서 대신 법 아래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안겨주신 것을 예수님이 우리를 대접한 것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법을 제시해서 우리는 그 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철저히 깨닫게 해서 예수님의 은혜만 바라보는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간절함으로 구하게 하는 그런존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자가 이러한 인간의 존재를 알고 형제를 대한다면 서로 비교하면서 경쟁하거나 비판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항상 자신도 예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자세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신자에게서는 예수님만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이 예수님께 대접받았음을 알고 자신도 남을 대접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우리가 구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진심으로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구하십시오. 땅에서 편하게 지내고 어려운 문제가 사라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죄인된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대신 법 아래 순종하신 은혜입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자는 비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남을 대접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께로부터 대접을 받았음을 아는 신자의 모습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