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으로(마 7:13-27) - 12강

믿음이란 내 힘으로 뭔가 할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힘만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 천국가지는 못하지만 천국 가는 일에 뭔가 보탬이 되고자 애를 씁니다. 천국은 신자로서 착한 일 많이 하고 열심히 교회 봉사한 사람이 갈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분명히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은혜가 주어질 만한 사람을 스스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저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리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만한 사람,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기편에서 뭔가 신자다운 행동을 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도 거리가 먼 종교인에 불과한 모습일 뿐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인간은 그 어떠한 선한 행동을 해도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로 여길만한 것이 인간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은혜를 구하는 것이 인간편에서 할 일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구한다는 것은 자신은 무엇을 해도 죄악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나를 끄집어 내 줄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도 구원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너 자신은 오직 더러움 그 자체임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그 은혜를 소원하라는 말씀이지 이것저것 다 필요없이 천국 갈려면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이것저것 다 필요없이 단지 교회에서 목사가 시킨 대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면 그것이 곧 천국 가는 길인 것으로 착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모습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크게 좁은 문과 넓은 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편하고 좋은 것을 원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은 편하고 좋은 것을 일부러 거부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불교식으로 고행을 말하는 것이 좁은 문이 아닙니다. 좁은 문이란 세상과 다른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 즉 예수님을 진실로 아는 자와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서 세상과 다른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진실로 아는 자는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좁은 문입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그런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을 넓은 문으로 바꾸어서 다가오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것을 자랑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불법이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다시 말해서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대로 남을 그 은혜로 대하는 것을 주님의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능을 행하고, 병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어떤 표적을 주님의 은혜로 바꾸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거짓선지자입니다. 좁은 길을 말하지 않고 넓은 길을 말하는 것은 모두가 불법입니다. 이 땅에 대한 우리의 욕심을 버리라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열심히 구하면 주신다고 하면서 욕심을 조장시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불법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표적입니다. 기도가 응답되고, 병이 낫고, 열심 있는 종교생활이 그들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열매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제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행한다고 해도 주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누가 더 많은 권능을 행하고 누가 더 열심히 봉사했느냐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사람들을 좁은 문으로 영생의 길로 인도했느냐만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주의 이름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개입되지 않고, 인간의 욕심이 개입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만을 가르치고 주님만을 보여주는 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에는 인간의 의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모습만이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에게 다스려지고 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에 대한 답을 내리고 있는 것이 24절부터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반대로 26절에서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서로 똑같이 집을 짓기는 지었는데 한쪽은 반석 위에 지었고 한쪽은 모래 위에 지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 무너짐과 무너지지 아니함의 차이인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이 반석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것은 예수님은 기초만을 중요시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초만을 중요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기초 위에 세워진 집 전체를 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은 튼튼하고 좋은 집으로 보시고, 반면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집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아니하는 참된 신자이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신자라고 구분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 전체입니다. 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사람의 인생은 마지막때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상수훈을 말하면서 수없이 강조했던 것이 이것입니다. 절망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뭔가 흐뭇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남보다 뭔가 괜찮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들을 버리기를 요구하는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따라서 산상수훈을 읽고서 자신에게 대해 절망감을 가졌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본 것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우리에 대해서 그토록 절망감을 가지도록 하십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로마서 5:20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자신의 실체를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자가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살려고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으로 세상을 사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 앞에서 우리는 참으로 악하고, 더럽고, 죄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발견한 자는 이런 자신의 더러움을 씻어주시고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더 크고 놀라운 은혜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실패한 나의 모습을 아는 것만큼 은혜는 더 큰 기쁨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우리를 절망케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산상수훈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함을 우리에게 깊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예수님의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신자는 이 은혜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세상일이 잘되더라는 그런 잘못된 은혜가 아니라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은혜를 전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신자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알기 때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를 보고 있는 자는 이 땅의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앞에서 자신을 의로 삼지 않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깊이 알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자가 곧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면서 팔복을 먼저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결국 천국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복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세상에서 많은 일을 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땅의 문제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더러움과 죄 때문에 주님만 바라보는 자입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자는 어떤 환난과 유혹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이 고백 속에서 은혜를 바라며 모든 소망을 주님께 두고 사는 것이 기쁨으로 사는 것이고 이런 신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 없이도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여, 주여'라고만 하면 천국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은혜는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만 찾는 해결책으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자신의 죄를 모르면서 죄의 용서를 말할 수 없습니다. 산상수훈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