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마 8:14-17) - 13강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선포함으로서 이스라엘은 모두 하나님의 법 아래서 죄인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왜 자꾸 용서받은 죄를 들먹이고, 끄집어내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하셨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그 용서의 은혜를 누리면 되는데 왜 자꾸 자신이 죄인이라는 굴레에서 떠나지를 못하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언뜻 들을 때는 그럴듯하고 또 그것이 타당할 것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오류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5:20절에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씀한 것과 같이 죄가 있는 곳만이 은혜가 넘칩니다. 죄가 더하면 더할수록 은혜는 상대적으로 더욱 넘쳐납니다. 이 말은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죄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누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법 아래서 자신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한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구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알지 못하고 용서의 은혜를 누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선포함으로 그들이 스스로 법 아래서 자신의 의나 행위에 대해서 절망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심정이 산상수훈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심정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뭔가 행위적으로 경건하고 착한 사람을 만드시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신자 38라는 증거를 착한 행실을 통해서 증명하려고 합니다. 신자 됨의 증거는 자신의 선택을 포기하고 주님께서 선택하신 길에 순종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믿음은 멀리해 버리고 착한 행위를 가지고 신자라는 증거를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확인해보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산상수훈은 절대로 실천법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이 산상수훈을 실천법으로 보고 실천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삶을 살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 많은 짐을 지는 결과만 낳았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이 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이루신다고 하면서 이것을 지키지 않은 자는 그 집이 무너진다고 하셨습니다. 산상수훈에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를 저주 가운데서 놓임 받게 하시고 죽음 속에서 생명으로 건지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한 사랑의 말씀이 산상수훈입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두려움을 가짐과 동시에 그 두려움을 덮어버리는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우리 모두가 멸망 받아야 할 존재임을 선언합니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법입니다. 죽음의 저주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저주 안에 있는 존재임을 알 때, 멸망의 구렁텅이를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자신의 착한 행위를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간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 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곧 천국에 있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에게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어떠한가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착한 행위와 양심을 믿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믿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대신 앓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16절을 보면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라고 말한 것 같이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말의 의미는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신 사건을 두고 의미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을 이루시기 위해서 병을 고치셨다는 의미입니다. 연약하다는 것은 죄의 모습이고, 병은 저주받은 자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 것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야는 우리의 저주와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한다 하면서도 예수님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때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은 저주의 인생이 생명으로 바꿔지는 것은 오직 주님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주님을 찾아오게 됩니다. 주님께 나아와서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처지가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육신의 처지만을 가지고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영혼의 처지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 앞에서도 긍휼을 구하지 않고 은혜와 사랑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형편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 8장에는 문둥병자와 백부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들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을 알고 주님을 바라보는 자의 태도가 어떠함을 보이시고자 하십니다. 1-4절에는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둥병이라는 것은 저주받은 자의 대표적인 모습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나을 수 없는 병입니다.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나와서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애원합니다. 지금 문둥병자는 단지 자신의 육신의 병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둥병 안에서 자신의 처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육신의 병이 문제가 아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자신의 영적인 처지가 문둥병자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7:28,29절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리들이 놀랐다고 말합니다. 결국 이 문둥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저주받은 상태를 발견할 수 있었고 주님께 나아와서 '주님이 원하시면 자신을 깨끗케 하실 수 있다'고 애원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앞에 나오는 자의 자세입니다.

문둥병자는 자신의 육신의 병을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문둥병을 통해서 몸만이 문둥병이 아니라 영혼이 문둥병에 걸린, 저주 아래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깨끗케 해주실 것을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을 제대로 들은 자의 모습입니다. 산상수훈 앞에서 문둥병의 상태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자는 오직 주님의 종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백부장 이야기를 통해서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시고 있는데 한마디로 믿음이란 종으로 자처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백부장은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하면서 자기의 밑에도 군사가 있는데 그들도 자기가 시킨 대로 모든 것을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 백부장은 자신은 주님의 종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시킨 대로합니다. 그러니 자기도 시켜달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서 유대인들을 공격합니다(11,12). 유대인들은 자기들 스스로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지키고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처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믿음이었음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자기 스스로 뭔가 실천해서 의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처지를 알고 하나님께 나아와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종으로 살기를 소원하는 것이 곧 믿음이며 구원받은 자가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문둥병자는 일반 백성들과 함께 거할 수 없는 더러운 자이고,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 문둥병자와 이방인을 들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구원은 우리의 행위나 혈통과 전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신 그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자, 그 자만이 오직 천국에 거하는 자가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봤습니까? 자신이 문둥병자임을 고백했습니까? 또한 여러분은 자신과 하나님이 어떤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를 소원하고 있습니까? 나는 주님께서 시키신 대로 움직이겠다는 각오가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 곧 믿음이 있는 신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자는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신자란 이런 것이다'를 인간의 생각으로, 인간의 기준으로 상상하지 마십시오. 신자는 문둥병자같이 자신의 처지를 깊이 알고 주님께 나오는 자이며, 오직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움직이는 자가 곧 신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무엇을 부탁합니까? 육신의 문제를 부탁합니까? 우리가 부탁드릴 것은 문둥병 같은 내 처지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나의 처지를 주님께 부탁드리고 우리의 모든 인생을 주님 말씀에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