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마 8:18-27) - 14강

신자 아닌 사람이 신자되는 길은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신자되는 길을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신자되고 싶어서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우리의 힘으로 신자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과 생각에 따라서 교회에 나온 것을 가지고 이제부터 나는 신자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착각일 뿐입니다. 단지 교회 다니는 것하고 신자로서 부름을 받아서 교회에 나오는 것하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전자의 경우는 그냥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후자의 경우가 곧 신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다닌다고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세상에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신자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교회 다녀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를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 눈에 보이는 교회라는 울타리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도구가 될 수 없으며, 교회라는 울타리가 거룩한 공간이 되는 것도 아니며,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예배나 기도도 우리를 신자로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열심히 종교생활을 함으로써 자신이 신자인 것을 증명하려고 하고, 또 소위 믿음이 큰 신자가 되어 보려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스스로 십자가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인간편에서 시작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은혜로 주어진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의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은혜를 아는 증거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모든 공로를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행해지는 자신의 열심 있는 종교생활을 바라보며 스스로 신자라고 자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기도할 수 있고, 은혜 때문에 교회 나올 수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의 종교행위를 의로 삼는 죄악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로부터 출발하면 안되고 죄인으로부터 출발을 해야 합니다. 죄인으로서 출발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눈에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내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다니고 싶다면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우리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라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좇는 자가 신자인데 십자가를 좇는다는 것이 단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를 좇고 싶다고 해서 좇아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인간 스스로가 이길 수 없습니다. 결국 나 자신을 이기는 힘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힘, 즉 은혜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신자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사람과 제자가 아닌 사람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 본문입니다. 먼저 19절을 보면 스스로 예수님을 좇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제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나온 사람입니다. 결심한 사람답게 주님이 어디로 가든지 주님만 좇겠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가 생각할 때 이 사람은 신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래 착하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단지 '나는 세상에서 머리 둘 곳도 없다'(20)라는 말씀을 하셨을 뿐입니다. 즉 이 땅에는 예수님이 계실만한 곳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계실 곳은 어디입니까?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가 예수님의 본향입니다. 세상에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뿐입니다. 예수님을 좇는 자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사는 것이 제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서기관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기관은 예수님을 좇으면 많은 혜택이 있을 것으로 착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좇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뭔가 혜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로보고 세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나라만을 바라보는 자가 예수님을 좇는 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자는 우리의 결단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으로 가능한 것이고, 주님의 부르심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고치시면서 제자 되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21절과 22절에 나온 얘기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 부름 받은 제자입니다. 그런데 부친을 장사지내고 가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친을 장례 지내는 것을 금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실 일은 영생을 주는 일, 생명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음과 상관없는, 오히려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일으키는 일을 주님께서 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 또한 세상과 상관없는 일을 하는 자이며 영생과 생명을 위해서 일하는 자가 곧 제자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영생과 생명을 줄 수 있는 일에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나온 것을 단순히 종교생활, 즉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기 위해서 나왔다면 그것은 단지 예수라는 선생을 좇고자 하는 서기관과 같습니다. 제자와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이 땅에서 오셔서 이루신 영생과 생명의 일에 부름 받았음을 알고 그 도구로 사용되어지기 위해서 나오신다면 그것이 바로 부름 받은 제자의 모습인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고쳐 가실 것입니다. 본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믿음이 적다고 책망하시면서 주가 누군가를 알게 하신 것 같이 주님은 우리들의 믿음 적음을 책망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은혜만큼은 거부하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자리에 우리를 두렵게 하고, 괴롭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제자들도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떨었습니다. 그리고 주무시는 주님께 달려가서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외쳤습니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십니다. 제자들의 믿음 적은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주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면 어떤 어려움과 괴로움도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있는데 풍랑이 일어나고 죽을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평안하시는데 우리는 평안하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 적은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시려면 처음부터 풍랑이 없도록 하시자 무엇 때문에 풍랑이 일게 하시고 그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것입니까? 결국 풍랑을 통해서 제자들의 적은 믿음을 고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통해서 주님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27절을 보면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풍랑을 통해서 새로운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의 제자들의 생각에는 주님이 누구시냐에는 전혀 관심없이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어떤 풍랑도 없이 평안할 것이라는 기대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풍랑을 통해서 주님이 누구시냐에 관심을 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름 받은 제자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풍랑도 은혜요, 괴로움도 은혜요, 두려움도 은혜입니다. 단 풍랑과 괴로움과 두려움 속에서 주님께 관심을 두고 주님을 발견한 자에게만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녀서 세상의 것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제자 아닌 자의 모습입니다. 제자는 오직 주님을 얻고자 애쓸 뿐입니다. 주님을 배우기 위해서, 주님을 내 마음에 가득 채우기 위해서 내 손에 있는 것을 버려가는 것이 제자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나그네로 사는 것이고 주님을 좇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런 제자로 고쳐 가시기 위해서 풍랑과 괴로움으로 우리를 빠뜨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서 부르신 신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제자 아닌 자는 어떤 모습입니까? 28절부터 보면 귀신들린 자 얘기가 나옵니다.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자기를 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괴로움 때문에 주님을 거부하는 것, 괴로움이 담겨 있는 십자가는 싫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제자 아닌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애당초부터 이런 자였습니다. 괴로움 때문에 주님을 거부하는 그런 모습이었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에 우리를 고쳐 가시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주님을 바라보는 것, 비록 지금 풍랑과 어려움 때문에 흔들린다고 해도 주님을 바라보고 싶어하는 것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고 그것이 제자의 모습임을 감사하기 바랍니다.

본문에는 또 하나 제자 아닌 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돼지 떼가 물에 빠져 몰사하자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세상의 것 때문에 주님을 거부하는 모습, 이것이 제자 아닌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우리를 제자로 고쳐 가시는 능력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종교생활을 잘해서가 아니라, 구제를 잘하고 선교를 잘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부르신 제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기뻐하고 감사할 때 어떤 풍랑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면서 감사할 수 있고 주님을 좇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