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세상에 교회가 많고 교인이 많은 것을 가지고 기독교의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교회가 많고 교인이 많은 것을 가지고 기뻐하고 가슴 뿌듯해 하는 것은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기독교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하나의 종교 조직으로서 자기의 조직을 강하게 하고, 든든하게 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인원과 재정의 넉넉함을 위하여 모든 힘을 기울이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은 힘이 없으면 무시를 당하게 되어 있고, 힘이 있는 자에게 눌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죄인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다스리는 것이 사회의 질서입니다. 이런 질서 속에서 사람들은 다스림 받는 것보다는 다스리는 것을 원합니다. 남보다 뒤쳐지는 것을 싫어하고 항상 다른 사람의 우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가인이 아벨과 함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자 자신이 뭔가 아벨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분을 내고 결국 아벨을 죽이게 된 가인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힘을 원하게 되어 있고 그 힘은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물이 힘이고, 지식이 힘이고, 양심이 힘이고, 권력이 힘이고, 자식이 힘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힘을 자기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얻지를 못합니다. 힘은 갖고 싶은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초월적인 존재를 찾게 됩니다. 뭔가 능력이 있는 신을 찾아서 자기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을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심심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종교에는 인간의 모든 꿈과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신에 의해서 이 땅에서 보살핌을 받으면서 어려움도, 고통도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항상 기쁘고 좋은 날만 있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에 의해서 자신이 보호받기를 원하고, 종교에 의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심에 의해서 신을 섬기게 될 때 신은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섬기는 형태는 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먼저 신을 섬기는 목적이 같아지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신 앞에서 행동하는 모습이 같아집니다. 물론 의식의 모양이나 방법은 틀리겠지만 그 길은 같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헌금하고, 헌신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힘을 통해서 자신을 보호하고, 복을 누리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면 불교가 예불하고, 기원하는 모든 것도 부처의 자비하심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일이 잘되어 나가기를 추구하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런 종교심을 신앙이라고 부추기고, 더 많은 열심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 것도 결국에는 자기의 교회라는 조직을 더 강하게 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것을 성경은 죄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있다고 해도 그 관심은 모두가 자기 자신을 좋게 해주는 하나님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말하는 것이 자비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입니다. 물론 그 자비와 사랑도 성경적인 자비와 사랑이 아니라 단지 이 땅에서 교회 나오는 사람들을 무조건 보호해주고, 복을 주고, 죄를 용서해서 죽어서는 천국 보내주는 자비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을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을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종교심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신앙인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자기로부터 출발한 종교심은 믿음이라는 것이 자신에게 별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주님으로부터 떠나버립니다. 이것이 스스로 주님을 좇고자 하는 제자아닌자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신앙은 모든 형편과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기를 소원합니다. 일단 세상의 것을 소유하는 것이 힘이 아니고 진짜 힘은 하나님을 아는 것임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가 자신의 모든 삶속에서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한 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하나님 나라에 거하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이런 신앙을 만들어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성공적인 삶을 바뀌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식으로 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고통이 있었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고통 속에서 세상의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은즉 오직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겠다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와 알지 못한 자의 믿음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십니다. 그러나 본문은 병자를 고치신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이 예수님께 어떤 태도를 보였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속으로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참람하다는 것은 신을 모독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권리를 침해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서기관들에게 죄용서를 받았느니라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은 둘 중에 쉬운 것을 골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둘 다 어렵다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이나 전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실려온 사람에게, 그것도 자기의 믿음으로 온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믿음 때문에 오게 된 처지인데 그 사람이 일어나서 걸어가게 되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중풍병자 자신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어서 일어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죄사함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가게 되는 것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중풍병자를 일어나서 걸어가게 한다면 그 분은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도 있다는 것을 믿어라는 얘기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내가 누구냐'를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권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세라는 것은 우리가 요구해서, 우리의 정성과 노력을 보시고 그것이 가상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편에서 예수님의 권리로 예수님 마음대로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죄사함도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권세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권세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들의 제사, 십일조, 금식 등 종교 행위가 자신들은 신자되게 하고, 복을 받게 하는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안다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 소망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권세로 우리에게 일하실 분입니다.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 앞에서는 순종하는 것 같이 우리의 모든 것도 주님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권세를 인정하는 것은 결국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나머지는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걱정, 근심, 낙심들은 모두 예수님의 권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알고 믿는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권세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 있는 그 자체를 가지고 기독교는 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복에 눈을 뜨지 못했습니까? 중풍병자 같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움직이지도 못한 그런 처지에 있던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다면 이것은 놀라운 주님의 권세 안에 내가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과 염려는 다 버려라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런 기독교에는 절대로 힘을 구축하기 위하여 신을 찾는 모습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왜 신을 찾습니까? 오늘도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습니까? 그냥 예수님만으로, 예수님만으로 모든 것을 만족한다는 그런 믿음에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권세에 의해서 신자되었고, 예수님의 권세에 의해서 죄사함 받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나에게 소중한 것이 아니고 목적도 아니며 오직 주님 안에서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며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제자 편에 서 있는지 바리새인과 서기관 편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