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당치 않음(마 10:34-39) - 17강

성경은 신자에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기뻐하신 바를 가르치며 신자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기의 생각과 상식을 가지고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쉽사리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오직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때는 자신의 생각과 상식은 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틀에 갇혀서 활동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인간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의 틀에 갇혀서 열심히 사는 것을 믿음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전도를 할 때도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오는 것을 전도이고 믿음이며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자기의 생각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에 갇혀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전도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에 갇혀있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도 그 내용이 자기의 생각을 옹호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성경을 볼 때는 자기의 생각과 전통과 상식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봐야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도는 사람을 설득하거나, 또 이웃에게 호의를 베풀어 교회에 호감을 갖게 함으로써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교회만 나오게 하면 구원받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효과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을 교회로 데려왔다고 할 때 그 신자는 교회에서 신앙 있고, 열심 있는 일군으로 추앙 받게 되고, 또 자기가 전도해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가 저 사람을 구원시켰다는 가슴뿌듯한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도의 주체가 성령이라는 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주체가 성령이고 우리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나 자신의 노력과 수고는 전도의 결과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나에게 알게 하신 것을 전달만 했을 뿐이지 나머지 모든 일은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전도는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인데 그 도라는 것은 십자가 아래 모두가 죄인이라는 도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신자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도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에는 자기 힘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예수님은 나중에 내가 죽으면 천국이나 보내주고 지금 세상 살아갈 때 내가 하는 일이나 도와주는 예수님'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고 합니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목자가 우리가 따라가야 할 분입니다. 그러나 그 목자는 아무나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아는 자만 따라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목자는 자기의 음성을 아는 양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양이 곧 잃어버린 양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목자가 없이 유리하던 처지였음을 아는 자가 곧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전도라고 하는 것은 천국복음을 그대로 전파해서 잃은 양을 찾는 것입니다. 그 잃은 양을 찾을 때 천국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하나님께는 더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그것은 천국복음을 전파해서 잃은 양을 찾는다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 아닙니다. 찾는 것은 성령이 하실 것이고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바른 복음만 전하면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채찍과 공격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을 때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에게로부터 공격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동일한 복음입니다. 사람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죄인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대로 복음을 전할 때 겪게되는 결과는 예수님이 가신 길 그대로일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복음이라고 여기고 있는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34절)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가정이 화평해지고 모든 갈등도 사라지며 그야말로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불화 하게 하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36절)는 심각한 말씀까지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전도의 어렵고 힘든 모습이다. 그러면 전도를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전도는 내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대해서 호감을 갖도록 하여 교회로 오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전도를 이렇게 한다면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되고 그런 가운데서 할 수 있는 말은 '예수 믿으면 천국갑니다' '예수 믿으면 복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병이 낫습니다' '예수 믿으면 집안이 평안해집니다' 등의 말을 하게 됩니다. 이런 전도에는 불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원하고 있고 갖고 싶어하는 것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제공하는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듣고도 사람들이 예수 믿기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그들이 자기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이라는 것은 보이지도 않고 죽은 후의 문제이기 때문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고,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은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고 일하면 얻어질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구태여 예수를 붙들고 통사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전도는 그러한 것이 곧 죄이고 그 죄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충돌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고 있는 것을 틀린 것이고 죄라고 말할 때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양은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내편에서 적극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어떤 자리에서건 자신의 신앙을 그대로 드러내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일을 한답시고 가정 일을 소홀히 함으로 겪게되는 불화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화가 아닙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이든 내가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살면서 주님만 내 목자로 여기고 말씀대로만 살고자하는 신앙에서 오게되는 불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위 환경과 타협하지 않을 때 오게 되는 어려움을 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본문 38절, 39절을 보면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살 때 주님 때문에 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져야 했던 그 이유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자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살아가는 사고방식과 다르게 살 때, 세상은 옳다고 여기는 것을 틀린 것이라고 말할 때, 세상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기는 것을 마귀의 일이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필연코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충돌이 두려워서 피하고자 할 때 그것은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이고 결국 주님 앞에서 합당치 않은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는 어렵고 힘든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주님께만 모든 가치를 두고 있는 신앙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그냥 자신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신앙고백 그 자체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도를 상대방과의 다툼을 피하면서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혜로운 것으로 말합니다. 물론 일부러 다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과 복음이 아닌 것이 만났을 때 필연코 발생하게 되는 다툼까지도 상대방의 마음을 좋게 하겠다는 의도로 피하려고 하거나 다툼과 불화라는 어려움이 싫어서 피한다면 그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당치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합니다. 흔히 이 말씀을 상대방과 부딪힐만한 부분은 피하면서 전도하라는 말씀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신자는 어느 자리에서건, 어떤 상황에서건 자신의 신앙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이 이리가운데 있는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리로 인해서 찢기고 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7-18절의 말씀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와 순결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뱀의 지혜라는 것은 숨고 도망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뱀을 싫어합니다. 뱀을 보면 돌을 던지거나 공격을 합니다. 그럼에도 뱀은 자기의 모습을 감추거나 바꾸지를 않습니다. 이것을 뱀의 지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신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느 것이 심판의 자리고 어느 것이 생명을 얻는 자리인가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신자가 어떤 핍박과 공격을 두려워해서 전해야 할 복음을 바꿔버리고, 드러내야 할 신앙의 모습을 포기해 버린다면 결국 천국과 지옥의 자리가 구분이 안되는 것입니다.

32절, 33절을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하십니다.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복음을 바꾸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니 전도가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고 불화 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전도하시다가 받은 그대로 신자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24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내 말이 아니라 위에 계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전도입니다. 그래서 20절에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사는 자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일부러 핍박으로 어려움으로 몰아넣고자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단지 어떤 경우에서라도 외부의 힘에 의해서 자신의 신앙을 굽히거나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내가 미움을 받게될지언정 내가 깨달은 복음이 나로부터 바뀌어져 나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각오와 신앙으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