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날입니다. 교회는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을 하였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교회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건을 머리에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해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이런 모습을 보면 교회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만 따르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무슨 소리냐 예수님을 믿는 교회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실 지 모릅니다. 물론 교회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을 환영하며 '호산나'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열렬하게 주님을 환영했던 유대인들과 같은 모습에 불과합니다.
당시 예수님을 환영했던 무리들은 나중에는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외쳤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인기가 있으시던 분이 한순간에 그 인기가 하락돼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주지를 못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열렬히 환영할 만큼 인기가 있으셨던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실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눈에서 사라지고 힘없이 붙잡혀서 온갖 욕을 다 당하시고 수치를 당하여서 말 한마디 못하시는 그런 힘없는 예수만이 그들 눈앞에 비춰졌습니다. 순간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에게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하는 예수를 추종하는 어리석음을 행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가지고 싶은 것도 많고 누리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이것을 제공해주는 존재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고 쫓아가겠다는 기세입니다. 그런 신이라면 두손을 들고 환영하겠다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예수님은 당연히 이적을 베풀면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복을 주시는 예수님이지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들에게도 이 땅의 모든 것에 미련을 두지 말 것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은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참지 못하는 것은 땅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는 요구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흘리신 피의 공로로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주신다는 예수님은 사람들이 환영합니다. 이것 만이라면 얼마든지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피의 공로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천국이 우리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가신 길,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세상의 영광과 재물을 원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모든 소망을 포기하고 오직 하늘만을 바라고 살 것을 요구하는 그 예수님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서 예수님은 인기 없는 분입니다. 오로지 인기 있는 예수는 죄를 용서해주는 예수, 천국 보내주는 예수, 병낫게 하는 예수, 복주는 예수에 불과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진짜 예수님은 전혀 인기가 없습니다. 지금 많은 교회는 마치 닮은꼴의 복제판의 예수를 하나 만들어서 섬기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신 그 예수님을 찾아서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다른 예수이고, 결코 구원과 상관없는 예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와 같은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귀 없는 자는 들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귀 있는 자는 누구이고 귀 없는 자는 누구입니까? 귀 있는 자란 예수님을 바로 볼 줄 알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자란 뜻입니다. 결국 귀 없는 자라는 것은 자기의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기 때문에 예수를 바로 보지 못하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5절의 말씀은 귀 있는 자만 들으라는 의도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이 세대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르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만 관심을 두고 사는 자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 세대의 모습입니다. 이 세대는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사는 세대이지 결코 예수님께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세대가 아닙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비유하시는가 하면 장터에서 피리 불고 애곡하는 것으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신 비유가 아닙니다. 17절 끝에 보면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니하였다 함과 같다는 말은 이미 있었던 말을 예수님이 인용하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17절의 비유는 누가 먼저 했던 비유입니까? 바리새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자기 같은 백성들을 향해서 자신들은 지금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할려고 애를 쓰는 데 당신들은 왜 우리를 따라서 함께 열심을 내지 않느냐는 것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것으로 비유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그런 말을 하는 바리새인들이 지금 예수님이 이적과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줘도 전혀 따르지 않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대입니다. 모든 관심이 온통 자기에게로 쏠려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입니다. 세상이 기대하는 예수님은 영광스런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자기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힘있는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에 오신 예수님이 아니고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예수님은 이 세대에서는 인기가 없습니다. 인기 있는 예수님은 번쩍 번쩍하게 영광스런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인 것입니다. 이 세대가 이런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천하게 여기고 무시당하는 그런 자들 속에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1:8절에서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악한 이유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대가 들을 귀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지혜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져야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때문에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은 학벌과도 상관없고, 지식과도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무식한 사람도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에 서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자가 바로들을 귀가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웅장한 예배당에 계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값비싼 파이프 오르간에 계시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생각으로 세상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대는 무엇을 원하는 세대이기에 예수님을 알아보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21-23절을 보면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당시 예수님이 많은 권능을 보이신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이 소돔과 고모라, 두로와 시돈 보다 더 악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나면 그들의 모든 소망은 땅에서 보다 더 잘사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바로 알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보이신 권능이 무엇입니까?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소경, 앉은뱅이,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25절). 자기의 지혜와 자기의 슬기를 믿는자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재주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이 찾는 예수는 단지 자기를 도와주는 예수일 뿐입니다. 이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낮고 천한 자를 찾아오신 예수님,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찾고 계시는 예수님은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 때문에 들을 귀가 없고, 볼 눈이 없기 때문에 귀머거리요 소경된 자일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딴에는 모든 것을 보는 자요, 모든 것을 듣는 자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대는 예수님이 인기가 없는 세대입니다. 옛날의 그 세대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예수님은 결코 낮고 천한 자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아니라 돈을 갖고 오신 예수님이고,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일 뿐입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예수님을 만날 자는 어린아이 같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자라는 것은 어린아이 같이 순수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 욕심도 없이 단지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나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세상을 원하면서 살았던 자인데 그런 나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신 것을 감사하는 그 모습을 말합니다. 내가 세상의 것은 가진 것이 없고, 지식도 없어도 예수님을 알 수 있는 눈을 뜨게 하시고, 마지막 심판때를 알게 하신 그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그 마음을 어린아이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마음에 함께 하십니다.
신자가 교회에 나올 때는 다른 것은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이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만 나오면 됩니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이 좋아서 교회 나왔을 뿐이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교회 나왔을 뿐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아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이 주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무거운 짐이 있다고 해도 수고하는 삶을 산다고 해도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내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 내가 주님을 알 수 있는 눈을 뜨게 된 것, 내가 심판을 알고 천국만 바라보는 신자가 된 것으로만 기뻐할 때 그 사람은 주님 안에서 평화와 쉼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체가 이미 짐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큰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위로 받지 못하는 것을 주님 안에서는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지금 보다 더 많은 것을 차지하고, 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에서 신자는 이런 저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은 차지하고,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예수님을 향하여 귀가 열리고 눈이 뜨였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신자에게만 주님은 위로의 주님이 되시고 쉼을 주시는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억울해하지 말고 십자가의 예수님이 인기 없는 이 악한 세대에서 여러분에게만큼은 십자가의 예수님이 인기 있는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