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박사(마2:1-12) - 2강

신자라면 누구든지 예수님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신의 죄가 무엇임을 알고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과 죄가 무엇인줄도 모르면서 상투적으로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상투적으로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말로만 죄인이지 정작 자기 자신 스스로는 항상 의인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의 증거로서 자신의 종교생활을 앞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죄를 알고 진심으로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등장하는 또 하나의 잘못된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죄만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의 모습에서 실망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크나큰 신앙의 고통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죄에서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것까지는 필요하지만 실망에서 고통으로 빠져버리면 결국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은 우리를 정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 정죄 속에서 우리를 지키고 있는 용서와 사랑을 보게 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죄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함께 볼 수 있어야 기쁨이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더러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전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에 크나큰 힘이 될 것입니다. 신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 모습입니다.

본문에 보면 동방박사가 등장합니다. 흔히들 동방박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서 먼 곳에서부터 베들레헴까지 온 사람이라고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한가지 의문점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에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갔느냐는 것입니다. 박사들이 자기들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라면 길을 잘못 들어서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박사들은 처음부터 별의 인도를 받아서 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박사들을 그들의 땅에서부터 인도하셔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박사들을 통해서 무엇을 보이시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만약 앞서 말한 대로 경배가 목적이라면 별은 그들을 곧장 베들레헴으로 인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십니다. 그곳은 왕이 있는 곳이고 또 유대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박사들은 그곳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습니다. 즉 예루살렘에 있는 왕을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예루살렘은 크게 소동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박사들에게 두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기 예수께 예물을 드리면서 경배하는 박사들의 신앙을 소개하려고 이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즉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를 구별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러면 자기 백성은 어떤 사람입니까? 요셉과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이 자기의 삶에 개입하시자 자신에게 오게 된 수치와 멸시를 감당하며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수치와 멸시 즉 자기 손해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고 예수님의 백성된 모습입니다. 이러한 자기 백성과, 자기 스스로 의를 드러 내려고 하고 자신의 행위를 가지고 의의 근거로 삼으며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면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한다는 생각 속에서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자들을 무시하는,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구별하기 위해서 임마누엘로 오신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하셨던 임마누엘을 이루시기 위해서 즉 예루살렘에 대하여 심판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예루살렘에 있는 너희들은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는다'고 하자 헤롯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그들은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미가 5:2절의 말씀을 들어서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대답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을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단지 예수님이 탄생할 장소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이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아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죄의 모습을 깨닫고 그 죄를 감싸고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성경을 아는 것을 가지고 교만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성경을 잘 아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교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의 그들이었기 때문에 미가서에 기록된 말씀도 자신들의 죄의 모습을 드러내고 심판하겠다는 예언이었지만 그들은 단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신 장소로만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적인 생각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바라볼 때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전혀 반대된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그러했습니다.

미가 5:2절은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칠 자가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재판자는 종교지도자입니다. 그들의 뺨을 친다는 것은 그들을 심판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당시 미가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 이런 예언을 했을까요? 미가 3:11절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돈을 받고 재판하고, 제사장은 삯을 위해서 교훈하며, 선지자는 돈을 위해서 점치며,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시니 재앙이 임하지 아니한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교회 지도자가 돈을 보고 축복하고, 헌금을 많이 내면 잘산다고 가르치고, 헌금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세상에서 잘산다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쫓겨난 자들을 딸 군대라고 일컫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그들의 뺨을 치는 자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탄생은 심판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베들레헴이라는 장소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기들만큼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동방박사가 예수께 경배하고 돌아간 뒤에 예수님은 헤롯의 손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게 되는 데 이것을 15절에서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호 11:1절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애굽으로 내려간 상태이기 때문에 애굽에서 불렀다라는 예언이 맞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예수님인데 애굽에서 불렀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여기서 해결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애굽을 지리적인 요소로 생각하지 말고 누가 존재하느냐로 생각하는 것이 해결점입니다. 즉 구약에서 애굽은 바로 왕이 다스리고 있었던 것 같이 헤롯이 있는 곳을鱁 애굽으로 보고 예수님이 계신 곳을 이스라엘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바로가 있던 곳에서 이스라엘이 핍박을 받았던 것 같이 헤롯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이 핍박을 받았던 것입니다. 결국 마태는 애굽을 지리적인 시각으로 본 것이 아니라 누가 있느냐를 가지고 애굽과 이스라엘로 구분 지은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예수님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입니다. 즉 새로운 출애굽을 말하는 것입니다. 애굽은 예수님의 사상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곧 세상을 애굽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거짓과 참을 구별할 때 참된 것이 거짓된 것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함으로써 구별하십니다. 즉 핍박을 받는 쪽이 예수님이고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 신자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어떤 고난을 받았느냐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헤롯이 두 살 아래의 사내 아이를 다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도 이스라엘의 아이를 죽인 일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살아난 아이가 모세이고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낸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모세에게는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참 이스라엘)을 세상에서 끌어내는 새로운 출애굽을 일으키는 에수님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모세를 따라 나온 자가 이스라엘인 것 같이 예수님을 따라 나온 자가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헤롯이 두 살부터 그 아래로 아이들을 다 죽인 것을 렘 31:15절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18절을 보면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라고 합니다. 라마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포로로 끌려가기 위해서 한군데 모여졌던 장소입니다. 자연히 여기에는 자식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된 것은 오로지 왕과 지도자의 죄로 인해서입니다. 결국 이것은 헤롯때 왕과 지도자로 인해서 두 살 아래의 아기가 당하게 되고 이로 인해서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한다는 것은, 라헬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로서 라헬의 울음은 곧 야곱의 울음이고 야곱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운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라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같이 울음에 참여하는 자가 곧 교회이고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예수님은 나사렛이란 동네로 와서 살게 됩니다. 이것도 또한 '나사렛 사람'이라는 선지자의 말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나사렛은 나실인이란 말에서 나왔습니다. 나실인이란 구별, 새로 시작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나사렛이란 소외받은 동네로부터 세상적 사고방식으로 존재하는 곳을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종교생활 잘하고 열심히 한다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며 기쁨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보고 배운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증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를 발견하고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자신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의 종교단체로 전락해 버릴 때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해 버리실 것입니다.

우리들은 스스로 나는 말씀 앞에서 나의 죄를 발견하기에 힘쓰고, 헌금을 해도 축복을 기대하고 하는 것이 아니며, 봉사를 해도 칭찬을 듣기 위해서 하지 않고 있으니까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이든 아니든 그것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문제입니다. 신자는 단지 예수님만 따라가기 위해서 힘쓰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감싸고 있는 그리스도의 피가 너무 고맙고 좋아서, 십자가가 너무 귀해서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예수님만 좇는데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버리라고 하시면 버리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살아라고 하시면 그렇게 살뿐입니다. 이런 자가 신자이고 하나님은 그를 자기 백성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것을 버리겠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니고 돈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해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 이 사랑이 예수님을 향한 사랑보다 더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을 알고 예수님을 붙들 때 예수님은 우리의 한계를 보충하실 것입니다. 성탄절은 이런 예수님을 기다리는 날입니다. 동방 박사가 예루살렘을 심판하듯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심판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말씀 앞에서 말씀이 아닌 삶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