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족(마 12:46-50) - 20강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각기 자기가 자라난 환경이나 문화에 따라서 생각과 살아가는 방식이 전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에서는 당연한 일들이 다른 나라에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일로 여겨지는 것이 많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각기 자기 나라의 문화와 환경 때문에 다른 점은 많다고 할지라도,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삶의 목적입니다. 자기가 태어나서 자라가는 그 삶의 장소에서 좀더 편안하고 부유하게, 좀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결국 사람이 아무리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서로 뭔가 통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세상에서 잘살아보자는 목적아래서는 모든 인간이 동일한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이 같은 이유는, 모든 인간이 다같이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기의 힘으로 세상에서 잘되겠다는 것은 인간의 공통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 세상에 다른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죄인된 인간의 삶의 목적과 다른 목적을 가지고 건설된 나라입니다. 따라서 그 나라의 백성들도 세상과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백성은 다른 곳에서 투입된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다른 사람과 동일한 목적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방향을 돌이킨 사람이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세상 사람과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뭔가 외적으로 특별히 달라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모를 때와 하나님을 알고 난 후의 삶의 목적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전에는 세상에서 크게 되는 것이 목적이고 그것을 소원하였지만 이제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천국을 소원으로 삼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애당초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보겠다는 사람들만 모인 이 땅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발생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기의 힘과 자기의 가능성과 자기의 소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기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만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인간이 자기 스스로 세상에 대한 소망을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은데 대한 아쉬움을 가지고 사는 것인데 자기 스스로 그 소망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면 그것은 분명히 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땅에 대한 소망을 버리고 하늘에 소망을 삼고 산다는 것은 분명히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적을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해서 구세주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구세주를 보내셨다는 것은 세상에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세상에 심판이 없다면 구세주가 필요 없습니다. 죄인으로 살든 의인으로 살든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구세주를 미리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세상을 심판하십니까? 세상에 악해서 심판을 해야 하신다면 악한 자만 심판하시면 되지 무엇 때문에 그 심판 속에 우리가 보기에 선한 사람까지도 포함을 시켜놓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서로 다른 선악의 생각에서 나온 차이점입니다. 인간의 선악은 착하게 살고 도덕적으로 좋은 일 하면서 사는 것을 말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악은 그런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서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살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이루는 것을 자기의 일로 삼고 있는 것을 악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악에서 제외될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이유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심판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면서도 죽음을 지금 나와는 상관없이 먼 나중의 일로 여겨버리면서 지금 현재 내 하고 싶은 일에만 모든 힘을 다 쏟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죽음의 세상에 구세주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세주를 붙드는 자를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구세주만으로 만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세상에 대해서 아쉬워하면서, 부족해 하면서 살아갑니다.

신자는 기적을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자가 하나님을 알게 된 기적을 입은 자입니다. 18절에도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아무나 심판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자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나 알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실 때 무시당하고 버림당하는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세상의 누구나 환영할만한 번쩍이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면 사람들 누구나 예수를 환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성령을 받은 자인가를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안목으로 보면 무시당하고, 버림당할만한 모습, 즉 목수의 아들로, 나사렛 마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겉을 보고 거부하고 무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마지막 날에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 달라서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돈이 더 필요하고, 자식이 공부 잘하는 것이 더 필요하고, 높은 지위가 더 필요한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을 이사야의 말을 통해서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로 비유하십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라는 것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존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기들 힘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지만 나중에 심판을 견딜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는 의미의 말씀인 것입니다. 철저하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시자 그것을 사탄의 힘을 입어서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철저하게 예수님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출신성분이 볼품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구원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유대인, 바리새인이라는 출신성분이 자기들을 얼마든지 구원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이란 그런 것이 아님을 가르치기 위해서 눈먼 자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즉 외부의 힘이 아니면 도저히 고침 받을 수 없는 병자가 나은 것은 구원이란 인간의 힘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자기들에게 구원을 받을만한 의가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볼품없는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핍박하고 무시하고 거절하는 그것이 바로 표적이 되어서 세상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세주를 무시하고, 거부하고, 핍박한 그것이 세상 악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표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 이적으로 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적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체험한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믿지를 못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나서 금방 마실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존재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십자가를 생각하며 주님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고 감사하면서도 세상의 어떤 문제 앞에서는 금방 십자가를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그들과 틀리지 않은데 우리가 비록 지금 홍해의 사건을 체험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구원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능력은 오직 주님의 보혈에 있습니다. 어떤 체험이나 이적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의 피를 믿는 그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주님의 피를 믿는 믿음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을 줍니다. 세상의 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많은 것이 부족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피에 대한 믿음 때문에 모든 것에 기뻐하고 산다면 그자가 바로 예수님의 가족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십니다. 영원토록 예수님과 함께 거할 가족은 세상의 혈통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자만이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예수님의 가족을 이 땅에서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서로 뜻이 통하고 말이 통합니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 서로의 생각과 사고방식의 주님의 것으로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만 바라보고 사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자기의 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주님만 바라보고 사는 신자들이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바로 눈먼자요 벙어리 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은혜를 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합시다. 땅의 것이 우리의 구세주가 아님을 기억합시다.

세상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향한 자기들의 소망과 일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서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이 우리들 마음에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만 원하고 나오는 자를 가족으로 여기십니다. 누구든지, 세상에서 아무리 무시당하고 비천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 자가 예수님만 원하는 삶을 산다면 바로 예수님의 가족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로 그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를 알고 그분을 영접한 자들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 백성으로서 하루하루를 주님만 바라보며 예수님의 가족으로 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