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아들(마 12:46-50) - 21강

지난 주일에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남보다 크게 되기 위해서 힘쓰며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남들보다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 자기를 과시하는 것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는 전혀 반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를 이 땅에 남겨 놓으신 이유는 우리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즉 신자는 세상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떠들고, 십자가를 말하는 사람들이 교회 밖을 나서면 세상에서 보여지고 들려지는 세상 원리에 치우쳐서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원리를 벗어나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도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모든 흉내를 내고자 힘을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세상의 것은 썩어질 것이라고 하셨고, 세상의 마지막 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한 대로 모든 것이 심판을 받을 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평가받기를 원하고 삽니다. 자식이 잘됐다는 평가, 부자라는 평가, 출세했다는 평가를 받고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자 원합니다. 결국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원리로 살지 않고 세상의 원리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결국 심판 속으로 사라져 버릴 세상을 좇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신자가 세상을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너무 힘들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수도 없이 말씀을 듣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또 잘 알고 있지만 정작 세상에 발을 딛고 살 때 내가 알고 있는 대로, 내가 생각하고 있는 대로 살 수 있는 만만한 세상이 아님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나는 세상을 하나님의 원리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원리를 잘 모르고 있든지 아니면 원리 아닌 것을 원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기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길 수 없는데 이겨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길 수 없으나 이길 수 있는 분이 나에게 등장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은 모두가 천국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3장에서 말하는 천국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미래의 천국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 누릴 수 있는 천국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천국을 말하면 무조건 좋은 곳으로만 상상을 합니다. 즉 극락적인 개념으로만 천국을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고생했던 것, 고통 당하며 살고, 여러 가지 겪었던 어려움들,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편안함과 좋은 것만이 주어지는 곳을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미래에 주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은 고통과 고생과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 땅에 와 있는 천국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 천국을 찾아보라고 하면 찾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천국 하면, 좋은 환경에 편안하게 사는 것만을 연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국을 보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천국입니다. 천국의 특징은 인간들의 상식과, 상상력 가지고는 찾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13절의 말씀과 같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인간의 마음대로, 인간의 힘으로 찾고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하시고는 그 비유에 대한 해석을 하시는 말씀입니다. 씨뿌리는 비유에 대해서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유명한 비유입니다. 그러나 그 해석을 잘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비유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어떤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그 씨가 네가지 밭에 떨어졌습니다. 첫 번째 밭은 길가 밭인데 새가 와서 그 씨를 먹어버립니다. 둘째 밭은 돌밭인데 환난이나 핍박 때문에 견디지를 못합니다. 세 번째 밭은 가시떨기 밭인데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서 자라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네 번째 밭이 옥토 밭인데 여기에 뿌려진 씨는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신자는 사단을 이기고 환난과 핍박을 이기고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이기고 옥토가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인간의 힘으로 천국을 들어가자는 잘못된 가르침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유에서 나오는 사단이나 환난, 핍박, 염려, 재물의 유혹들은 사람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대상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비유를 보면서 우리가 사단을 이기고 환난과 핍박을 이기고 염려를 이기고 유혹을 이겨야 한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들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16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와 있는 천국을 이해하고 천국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우리의 지식과 힘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천국도 우리의 힘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길가에 떨어진 씨이고, 돌밭에 떨어진 씨이고,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옥토에 떨어진 씨가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이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고, 십자가를 알고 있는 것도 내 스스로의 지식이나 의지가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이기고 환난과 핍박을 이기고 염려와 유혹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 속에 계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극복하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굳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자기 힘을 주장하고, 자기 노력을 내세우는 자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왜 메시야인 자신을 거부하고 이 땅에 온 천국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비유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고 있다면 그것은 하늘의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4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가라지 비유를 하시고 계십니다. 38절에 보면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천국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하여 뽑힌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신 그 사랑과 자비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도덕과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사단의 생각이며 가라지입니다. 그런데 이 가라지가 좋은 씨와 함께 자란다는 것입니다. 종들이 가라지를 뽑기를 원하느냐고 물을 때 주인은 뽑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가라지를 뽑지 말도록 하십니까. 그것은 좋은 씨가 왜 좋은지를 가라지를 통해서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즉 가라지가 있음으로 해서 좋은 씨의 모습, 천국의 아들이 어떤 모습인가가 상대적으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아들은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살지 않고, 세상의 원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자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서 세상을 살아가는 자이기 때문에 어떤 환난과 핍박, 염려와 유혹 속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감사하는 자로서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자신의 양심과 윤리와 도덕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피가 자기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윤리와 도덕이 자신을 신자로 만들고, 천국의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결국 자신의 윤리와 도덕으로 인해서 실패하는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서 어둠에서 빠져 나왔고, 천국은 자신의 노력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예수님의 손에 붙들려서 들어가는 나라인 것을 알고 마지막 날까지 주님 안에 붙들려 있기를 소원하면서 언제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한다면 그자가 바로 천국의 아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사단을 이기고 환난과 핍박을 이기고, 염려와 유혹을 이기고자 힘썼다면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핍박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염려를 이기도록 해 주십시오. 재물의 유혹을 이기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결국 내가 이겨보고 싶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도는 내 힘으로 이길 수 없으며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나를 붙들어서 끌어주시기를 소원하는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옥토에 떨어진 씨가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하셨다면 그렇다면 이 열매는 누구의 열매입니까? 우리들의 열매가 아니라 예수님의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씨가 자라서 열매가 맺어진 가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열심히 해서 자신의 힘으로 열매를 맺어보겠다고 애를 씁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천국은 가리워져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하나님의 원리로 살아가는 모습은 오늘도 하나님의 붙드시고 인도하심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십자가를 깨닫고 천국을 알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었기 때문임을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복에 감사하며 날마다 그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며 나의 힘과 노력에 의미를 두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가 천국의 아들이라는 것을 꼭 마음에 두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