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의 죽음(마 13:1-12) - 22강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가 하는 것은 단 한가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내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며 사느냐 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어떤 일을 하시든지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대해서 일언반구 할말이 없다는 것,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며 찬양할 뿐이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에 대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경우는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해서 자신에게 세상적인 어떤 유익이 발생했을 때입니다. 하지만 유익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와 고통으로 다가왔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이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시는가'라는 불만을 토로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나님께 대해서 한 것을 내세웁니다. '나는 하나님께 이만큼 했는데 하나님은 왜 나에게 그에 따른 보상은커녕 오히려 괴로움을 안겨줍니까?'라고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지금의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결국 여러분은 지금까지 수없이 믿음을 말하고 외쳤지만 결국 믿음이 없는 채로 살아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은 믿음을 너무나 오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로 만들어 낼 수 있고, 사람의 열심으로 얼마든지 꾸밀 수 있는 것을 믿음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믿음을 스스로 만들어 보려고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적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말씀은 거들떠도 안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밑에서 모세가 없을 때 한 것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섬긴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자기들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믿음은 자기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믿음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오늘날 신자들은 누구나 믿음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믿음을 사용한다면 그 믿음의 대상은 자연히 우상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일이 있게 하셔도 그 일을 기뻐하고 찬양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독선이고 상식에 맞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독선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상식에 전혀 어긋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너무나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쪽으로만 생각했고, 그 사랑과 자비도 나를 세상에서 잘되도록 도우시고 지켜주시는 사랑과 자비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를 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시는 하나님은 전혀 상상하지도 않습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모두 자신에게 어떤 죄가 있어서 징계를 받은 것으로 생각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행위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모습으로 지금까지 강조되어 왔지만,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전혀 없는 모습입니다. 결국 고통을 당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서 뭔가 하나님을 화나게 한 부분을 찾아내서 그것을 고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지고 복이 올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믿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독선의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을 자기 상식에 맞추어서 생각해서도 안되고, 내 마음에 드는 쪽으로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내 기대와, 내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서 일하실 뿐입니다. 이것을 알고 오직 내 자신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존재가 되기에 힘쓰는 것이 곧 믿음이고 신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가 부르는 찬송과, 예배와, 기도와, 봉사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가를 알고 그 요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선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러한 독선의 하나님을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상상과 생각으로 만들어 논 하나님이 자기 머리 속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 아닌 하나님이 자기 머리 속에 있는 동안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은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오늘날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나는 믿음이 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당장 내 손에 가시만 하나 박혀도 불만이 나오고 화가 나는 우리인데 만약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나의 소유에 대해서 손을 대시고, 내 자식, 가족에 대해서 손을 대시고, 재산에 대해서도 손을 대실 때 그 일을 인정하실 수 있습니까? 사람은 자기의 고통과 손해에 대해서는 참지를 못하는 법입니다. 아무리 내가 믿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할지라도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신자라면 자신의 입으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믿음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자들은 결국 하게 되는 말은 '주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믿음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입니다. 그 신자는 이 믿음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신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인간의 모든 불신앙의 모습과 그 인간을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건 하나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의 삶이 무엇인가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4천년 전의 사건, 2천년 전의 사건이라 할지라도 시간과 환경을 뛰어 넘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내용입니다. 본문은 세례 요한이 죽음을 당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아주 처참한 죽음입니다. 쉽게 말해서 위대한 영웅의 죽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하찮은 죽음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영웅의 죽음은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죽음이나, 이웃의 생명을 구하다가 대신 죽는 그런 모습만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에게서는 그런 죽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 여인의 말 한마디에 의해서 목이 잘리는 죽음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의 죽음은 어떤 죽음입니까? 하나님은 세례 요한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세례 요한의 죽음의 동기는 헤롯왕의 불법적인 행동을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헤롯 왕헤롯 안디바라고 부르는데 그 헤롯 왕에게는 헤롯 빌립이라고 하는 이복 동생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동생의 부인은 헤로디아였는데 헤롯이 그 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강제로 자신의 아내로 삼아버린 것입니다. 이런 불법적인 행동을 세례 요한이 책망을 하자 헤롯을 요한을 옥에 가두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를 불러서 춤을 추게 하는데 춤을 춘 모습을 보고 헤롯이 너무 기뻐한 나머지 살로메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다 주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그러자 살로메는 자기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세례 요한의 목을 원하게 되고 결국 헤롯은 근심하다가 요한을 죽여서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살로메에게 준다는 내용입니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고 난 후 심리적으로 많은 압박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하시는 여러 가지 일을 듣고는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세례 요한의 죽음이나, 스데반의 죽음 등을 생각하면 의문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죽음의 가치가 뭐냐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가치를 영웅적인 죽음에 두고 있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가치 있게 죽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나, 스데반의 죽음을 놓고 생각하면 그들에게는 어떤 위대함이나 영웅적인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그들의 죽음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들의 죽음에 어떤 가치를 두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입장에서는 세례 요한의 죽음에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일찍 세상에 와서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증거했는데 그 결과가 이런 죽음인가라는 반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이런 죽음도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도대체 하나님은 왜 그런 죽음이 요한에게 있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한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것입니까? 이것이 독선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시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만 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요한 한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알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의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도구로 쓰실 뿐입니다. 결국 세례 요한의 죽음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쓰여진 도구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하는 목적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희생이라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도 희생에는 자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의 결과는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찬사를 하고,열매를 보고 탐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나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 것은 땅속에 파묻힌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꽃도 열매도 저절로 맺힌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뿌리는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꽃과 열매만을 생각합니다. 모든 영광과 찬사가 꽃과 뿌리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뿌리보다는 꽃과 열매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 의중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로서 영광 돌리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꽃과 열매가 되어서 영광 돌리는 것을 원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죽음에서는 그러한 것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단지 헤롯의 불법적인 행동을 책망하다가 죽게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죽고 사는 문제보다는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나무라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 앞서 세상에 온 것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요한의 죽음까지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왜 죽으셔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세상의 죄를 지적하고, 사람이 자기의 의와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곧 멸망의 도구임을 지적할 때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에게는 그 어떤 유익도 없는 것입니까? 세례 요한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줌으로 예수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여줄 때 예수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누릴 복입니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분명합니다. 세상에서의 영광과 내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일을 인정하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달라는 기도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고, 사라지는 그런 역할이라 할지라도 나를 통해서 주님이 보여지는 것을 감사하는 신자로 살아갈 때 그 신자만이 주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 세상을 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살려고 힘쓰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그 속에서 여러분이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