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뀌어진 관심(마 14:22-33) - 23강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죄악으로 심판을 받을 세상에 생명을 얻는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남기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데에는 아무도 반대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성경을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제시하는 말씀으로 본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찾고자 해야 합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생명을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 성경을 통해서 생명 아닌 다른 것을 찾고자 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말씀을 남기신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나아가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볼 때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신 의도대로 생명에 관심을 두고 성경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관심이 아닌 자기의 관심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기록된 사건들, 내용들을 인간의 마음에 좋은 방향으로 제멋대로 해석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본문이 기록돼 있는 14장의 내용 중에 흔히 오병이어라고 부르는 이적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이적을 가지고 해석하기를 '예수님은 적은 것을 가지고 많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예수님만 믿으면 우리에게 있는 아무리 적은 것도 풍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할 때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말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적은 것이 많아진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구원과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세상에 있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못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심지어는 산을 들어 바다에 빠뜨리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생명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관심 가지신 것에 내 관심이 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인간의 관심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늘의 것에 대한 것이지만 우리의 관심은 모두 땅에 대한 것에 불과합니다. 땅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하늘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관심이 바뀌어지고 나서 성경을 볼 때 진리가 무엇이며 생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눈이 열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스스로는 본다고 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소경된 자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해석하여 가르친다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은 모두 생명과 상관없이 인간의 관심이 몰려 있는 세상의 욕심을 더욱 부추기고 조장하는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를 가리켜서 '거짓 선지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 아닌 것이 복음으로 위장하고, 생명 아닌 것이 생명으로 위장하여 세상에 판치고 있습니다. 신자는 복음 아닌 것, 생명 아닌 것을 거부하고 물리치면서 오로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생명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면서 성경을 볼 때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우리를 생명 되는 진리의 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삽니까? 물론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혹 다른 관심 때문에 밀려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일에 게을리 하고 있다면 그것은 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의 바른 모습이 분명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습니다. 아무나 듣고 깨달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만 들려지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두고 사는 자만 들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은 이 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인가를 찾고자 하는 간절한 심정으로 이 말씀을 봐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세례요한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참으로 가치 없는 죽음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시각입니다. 하나님 편에서의 가치 있는 죽음은 세상에서 어떤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여주다가 죽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세례 요한 같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하나의 계시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요한의 죽음을 통해서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가를 미리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죽으셔야 했던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미리 요한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세상에는 선이라는 것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악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의인이 같이 멸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의인 오십을 찾으면 용서하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아브라함의 요청대로 의인을 10명만이라도 찾으면 용서하시겠다고 하지만 10명을 찾지를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왜 1명까지 내려가지 못했는가라고 아쉬워하기도 하지만 1명까지 내려갔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은 그 1명의 의인을 찾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의인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의라는 것은 없습니다. 악으로 채워져 있는 세상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요한의 죽음이었습니다. 바른 소리를 한 사람이 죽는 세상입니다. 자기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을 싫어해서 옳은 사람을 죽이는 세상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곧 악으로 가득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요한은 이런 세상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세상이 악하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악으로 가득 채워져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의를 찾습니다. 그러나 의가 없기 때문에 그 세상을 심판해 버리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요한의 죽음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요한은 세상은 이렇게 악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시체를 장사하고 나서 예수님께 와서 요한이 죽었다는 것을 알립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오병이어의 이적이었던 것입니다. 14장의 사건은 서로가 각각 다른 의미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요한의 죽음을 출발로 해서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신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자 길을 떠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온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저녁이 되어서 배가 고파지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무리들을 마을로 보내서 먹을 것을 사먹게 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것은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자신들이 이 많은 무리들을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오병이어를 가지고 많은 무리를 먹이시고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이유로 이런 이적을 일으키셨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단순히 배가 고픈 사람들을 먹이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조금 시장하다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였을까요?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단지 먹을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통해서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있는 것이나 인간적인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이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도 하지를 못한다. 하물며 생명을 주는 일은 너희의 힘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주시니라"고 합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시는 것은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나 우리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자가 세상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앞에서 보여주는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보다는 배고픔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 제자들이 배고픈 문제에서 어떤 문제로 관심이 바뀌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배고픔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바라는 것은 자기의 배고픔을 채워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가지고 있는 관심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서 나를 배불리게 하는 예수님입니다. 모든 관심이 예수님이 주시는 것에 있지, 우리의 필요한 것을 주시고 우리를 살리시는 그 분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이 일을 하시는 분이 누구냐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양식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배에 태워서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예수님은 나중에 물위로 걸어오십니다. 그것을 본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요청을 하고 예수님이 오라하시자 베드로가 물위를 걷게 되는데 바람이 불자 무서워 하다가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손을 붙잡아서 건지셨다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의심은 세상을 두려워하는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남들보다 덜 가지고, 세상의 힘을 남들 같이 소유하지 못한데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가지는 모습입니다. 즉 의심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다고 하면서 결국 세상의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세상에서 그 어떤 바람이 불어도 주님만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를 건져내신 주님을 보면서 제자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합니다. 배고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이 이제는 주님이 누구시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우린 모두 악한 세상에 빠져 살아갑니다. 주님보다는 배고픈 문제에 더 관심이 있고, 믿음으로 살려고 하지만 세상에서 부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면서 믿음에서 멀어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 우리를 붙잡아 건지실 분은 예수님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외침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악한 세상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더 세상의 것으로 인생의 기쁨을 누리려고 할 때 그것이 생명과 멀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주님을 찾습니까? 배고픔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부는 바람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나에게 무엇을 주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이 악한 세상에서 나를 붙들어서 건지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 악한 세상에서 건짐 받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