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마 15:1-11) - 24강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필연코 접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의식입니다. 의식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예전부터 모양새를 갖추는 것을 아주 중요시 해왔기 때문에 의식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의식을 치르는 목적이 무엇이냐 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 의식을 잘 치를 수 있느냐에 더 치중을 하게 되었습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뭔가를 담아서 전달하는 그릇에 불과한데도 사람들은 그릇을 꾸미고 치장하는데 더 관심을 둬 버린 것입니다. 그릇을 금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그 그릇에 담긴 것이 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릇에 담긴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릇 자체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그릇에 대하여 눈길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의식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교회에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교회에도 여러 가지 의식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배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아주 중요시하게 여깁니다. 예배를 신성한 의식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주관하는 이 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예배를 의식화해서 그 의식에 참여한 것이 곧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의식을 좀 더 거룩하게 드려야겠다는 욕망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도록 해야 겠다는 발상에서 인간이 만든 여러 가지 의식법이 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라는 것을 인간 스스로가 거룩한 의식으로 만들어 보고자 여러 가지 규례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 드릴 때는 깨끗한 옷을 입어야 한다거나, 아이들이 떠들면 안된다거나, 헌금은 깨끗한 돈으로 미리 미리 준비해야 한다거나 등등 인간의 정성을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들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만이 아니고 기도할 때도 두 손을 모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눈을 감고 해야 하는가? 무릎을 끓고 해야 하는가? 이와 같이 인간의 행동 자체에다가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교회는 분명히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케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할 일은 그 피를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피를 말하면서 피를 믿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거룩하고, 우리가 그 피를 믿을 때 나 또한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깨끗한 존재가 될 수 있는데 그 피의 기능을 인간의 의식과 인간의 정성으로 대체해 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의식을 치르면서 분명히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의식에 참여하고 하나님을 입술로 불렀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교회는 의식에 참여한 것을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강조해 버리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를 요구하셨을 때도 짐승을 잡는 의식 자체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죄가 제물된 짐승에게 전가되어 제물이 심판 받고 나는 산다는 그 은혜와 긍휼을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차 자신들이 제사를 드리는 의식이 자기들의 의가 되는 줄로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들의 의와 자기들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하는 열정으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아니면 모일 필요가 없는 교회에서, 죄인만 계속 생산해야 할 교회에서 자꾸 사람들을 의인으로 만들어 가고 의인만 자꾸 발생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교회와는 상관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의식은 살아 있고, 입술로 여호와를 부르는 자들은 차고 넘쳐도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고 부르는 자는 단 한명도 없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를 아는 하나님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들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식을 중요시하게 될 때 결국 그 사람은 형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외식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의식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이 좀더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스스로 정한 법률을 가지고 예수님께 시비거는 모습이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시비거는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고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규례였습니다.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은 위생 때문이 아닙니다. 손을 씻는 것을 정결로 본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손을 씻고 기도해야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손을 씻지 않고 하는 것은 모두가 더러운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따라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이 더러운 음식이 되어서 자기를 더럽힌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들이 식사를 할 때 기도를 안하고 먹으면 그 음식 먹은 것이 뭔가 잘못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더러워지고 깨끗해지는 것을 의식에다가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시비에 대하여 부모공경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부모공경을 어떻게 해석했는가하면 자기들이 하나님께 드렸으면 부모에게는 안드려도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드린 것이 부모에게 드린 것과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향해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외식이라는 것은 두마음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속마음은 따로 있는데 그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깨끗한 척 행동하는 것을 외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18절부터 보면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는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뭘 하느냐를 가지고 더럽고 깨끗함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마음이 어떠냐를 가지고 평가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놓고 볼 때 누가 감히 나는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내 속에 더러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의식을 앞세우고 형식을 앞세우고 자신의 행동을 앞세워서 자신의 정결함을 주장하겠습니까? 그러나 자기 속에 있는 더러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러움의 기준을 바리새인과 같이 의식에다가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식의 규례를 정해서 그 규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외식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외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제 아무리 경건해 보이는 의식으로 행동한다고 해도 그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더러움을 모르고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할 때도 하나님은 '네가 부모에게 뭘하였느냐'를 보시는 것이 아니고 '네 속마음이 어떠하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귀찮아하고 싫어하면서도 그 속마음을 감추고 겉으로 공경하는 척 하는 것은 부모 공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듯이 부모를 섬기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보는 눈이 있으니까 부모에게 효도하는 척 하는 것은 공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부모 공경을 예로 들어서 참된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을 앞세우기 마련입니다. 자기가 한 일을 통해서 자기를 정당화하고, 자기는 옳은 사람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행위를 버리지 못합니다. 만약 그 어떤 행위도 없으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신자로서 최소한의 행위라도 있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행위를 가지고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누구라도 그 행위를 부정하고 나선다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죽으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자기를 알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시면서 그 가나안 여인을 개로 취급을 하십니다. 그러자 가나안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개로 취급하는데도 그것은 자기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개든 뭐든 그것은 상관없으니까 오로지 주님으로부터 얻는 것이 있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큰 믿음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에 관심을 두고 살기 때문에 외식적인 행동이 나오게 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전시용 신앙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참된 신앙은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여지건 말건 그것은 상관없이 오직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자신이 채워지기를 소원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일 때 그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은혜와 긍휼로 채워지는 것이고, 결국 그 사람에게서는 주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자비와 온유와 화평으로 모든 자를 대하는 것이고 부모 공경도, 형제를 대하고 이웃을 대하는 것도 자신을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에게 있는 주님의 사랑이 나를 그렇게 움직이게 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다 뽑힐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은 결국 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에게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모습이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는 더러운 존재임을 알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채워져서 겸손함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의식을 행하고, 어떤 보기 좋은 행동을 해도 그것이 여러분을 깨끗케 하거나 신자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내 행동을 내 의로 삼는 것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뽑혀버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