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십자가(마 16:24-28) - 26강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잘 안될 때 자기의 환경 탓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 입시에 실패했을 때 환경이 공부하기에 좋지 않았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갔을 때도 주위 환경이 나빴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자들도 동일합니다. 많은 신자들은 교회 다니기에 좋은 환경과 좋지 않은 환경으로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서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면 교회 다니기에 좋은 환경이라고 말하고, 기독교 집안이 아니고 교회 나가는 것을 반대한다면 환경이 신앙을 지키기에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은 있을 수 있고, 자녀들이 도덕적으로 바르게 자라 가는데 좋은 환경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지키기에 좋은 환경이란 없다고 봅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신자가 날마다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하는데, 과연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환경이 있을 수 있습니까? 대부분의 신자들이 원하는 환경이란 교회를 편하게 다닐 수 있는 환경을 생각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살 수 있는 환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교회를 다니기에 편한 여건 속에서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것을 신앙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지킨다는 것,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다는 것은 교회를 다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나 여건은 신앙의 문제에 전혀 영향이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신자가 자신의 상황이나 여건 속에서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즉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신자가 자기 중심적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기 몸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운다면 모든 것은 쉽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몸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으로 살면서 신앙을 지킬 수 있는 환경을 원한다는 것은 결국 내 몸도 위하고 신앙도 지켜보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어떤 환경을 가지고 신자들이 교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따라가며 주님의 은혜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믿고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살도록 부추기는 것이 곧 사단입니다.

환경을 말한다면 에덴 동산만큼 좋은 환경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 속에서도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이 사단의 지배 아래 있고, 신앙을 지킬만한 좋은 환경이란 결코 없다는 것은 세상은 구원받기에 좋은 환경이 절대 아니란 말과 동일합니다.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그런 환경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은 분명히 외부에서 은혜가 개입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사단의 지배아래 있기 때문에 사단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사단의 사고방식이란 오직 자기를 위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도 자기를 위해서 믿는 것, 그것이 세상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그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정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그 모습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결코 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내가 비정상적인 것으로 깨닫게 되었다면 그것은 나의 지혜가 아니라 외부에서 개입된 지혜이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기적이 임한 자로서 맨처음 보여지는 것이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신앙은 좋은 환경에서 열심히 교회 다니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쁜 환경에서도 불구하고 열심히 교회 다니는 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열심히 교회 나오는 것을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랑으로 삼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신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 것, 그것이 신앙이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신앙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를 만류하는 바람에 사단이라는 책망을 들었던 것을 통해서 교회와 교회 아닌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사단이라는 책망을 들을 것은 신앙고백 할 때와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의 죽음을 만류한 것은 사단의 사고방식이 어떤 것인가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고난이 없이, 십자가에 자기 죽음이 없이 주님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해서 주님을 믿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손과 발을 잘라내는 것만큼 고통입니다. 이 고통이 없이 주님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 사단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만류한 베드로가 사단이라는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교회라고 말하면서도 십자가의 자기 부인을 말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가자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사단이라고 책망 받은 베드로의 모습은 십자가를 만류했지 주님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로 위장하고 교회를 흉내내는 교회 아닌 교회가 많이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도 많은 신자들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을 자기를 포기하는 것 없이 단지 교회에 나와서 교회 일에 열심히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신앙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그 목적지나, 따라가는 방법이나, 따라감으로서 주어지는 혜택 같은 것을 내편에서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약 내 방법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가고, 내 형편대로 따라가고, 내가 가고싶은 곳으로 가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것을 누가 어렵다고 하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의 형편이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전혀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것이 어려운 것이고 우리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능은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자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를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는 믿어야 하기 때문에 양보와 타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면서 적당히 교회 일을 하고, 교회가 하는 좋은 일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우리를 난처하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주님을 따르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부담이 되는 이유는 우리는 내 목숨을 지키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버리는 것이 오히려 목숨을 찾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사고방식과 주님의 생각이 부딪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잘되고,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내가 사는 길로 여기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이 오히려 자기의 생명을 잃는 길이기 때문에 그 길로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고집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고 있는 길이기 때문에 나도 그 길로 가야한다는 고집을 부립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자기 목숨을 주고 바꿀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온 천하도 내 목숨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온 천하를 얻어도 내가 없는 마당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지금 지옥으로 가고 있는데 땅의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의 야심과 소망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힘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이란 이 땅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온 천하를 얻어도 그 속에서 생명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땅의 것은 우리의 생명을 방해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땅의 것을 거부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땅의 것을 거부하라는 것은 땅에 대한 자기의 소망과 야심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이 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드렸지만 그래도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부담이 사라지지 않고, 또 어떻게 사람이 세상에 대한 소망을 버릴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예 처음부터 세상을 버릴 의도가 없는 자기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대한 소망을 십자가로 바꾼다는 것은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바꾸고 싶다고 해서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상대적인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땅의 것을 버릴 만한 가치있는 것, 그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해야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세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해야 기쁜 마음으로 세상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보다 가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광입니다. 27절에 보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신자가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곧 우리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입은 영광은 17장에서 해같이 빛나는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이 영광이 우리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단 세상을 포기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에 한해서입니다.

여러분, 과연 여러분에게 주님은 어떤 분으로 존재하십니까? 진심으로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하신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우리는 너무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 직장보다 더 가치 없는 예수님이고, 내 사업보다 더 가치 없는 예수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돈벌이가 더 소중하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 더 앞서 있고,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목회 성공의 영광이 더 귀중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자기 목숨을 잃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을 알고 십자가를 알며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코 여러분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이며 무가치한 일이 아니고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한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여러분이 입은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세상을 소망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은 주님과 함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결코 무가치한 일로 여기지 마시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갈 수 있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